屋上屋 마루청에 앉은 의자

나의 겨울山行

글/竹把車連錫

나는 이 세월 지나도록 남들이 즐겨찾는 지리산 정상을 밟아보질 못했다. 오늘은 평소 자주 찾아주는 지인 원팔이와 함께 가까운 뒷산, 타래처럼 이어진 웅석봉과 왕산 그리고 필봉산이 삼각으로 둘러쳐진 협곡의 고갯길을 따라 왕등재에 오르기로 했다.

밥맛을 잃어 아침도 걸은 나는 간식을 겸한 요깃거리를 준비했다는 원팔이의 발길을 따라 산죽잎 깔린 산길을 헤집고 겨울 가랑잎을 밟으면서 연신 헐떡이는 숨소리 뱉으며 한발한발 기어서 올랐다. 길섶에는 깊은 산속에서 자라는 머루덩굴이 얼굴을 핡히며 팔을 끌더니 발목 잡은 칡덤불까지 나를 멈칫 세운다. 해는 중천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길은 새을자로만 휘어서 멀기만 한데, 내 사는 마을은 자꾸만 멀어져가는 한적한 산속, 야윈 낙엽송 가지 끝에 매달린 솔방울을 붙잡고 까막까치 한 마리 까욱까욱,… 우는 소리는 인적 없는 산속이 더욱 호젓다 못해 소름마져 끼쳐 내 온몸이 경연이라도 이는 것만 같다. 가다가 숨을 고르자고 친구 원팔이 바짓가랭이 끌어당겨 이끼 낀 검은 바위에 앉히고, 가려진 산죽 사이로 높게만 보이는 하늘을 쳐다본다. 주위는 문자 그대로 울울창창하다. 아름드리 소나무며 전나무. 잣나무. 이름 모를 나무들이 밀림을 이루었으니 탄복 탄복의 감탄 그대로다. 자연의 위대함으로 우리 인간은 이런 자연 속의 하나인 미미한 존재되어 이 자연의 풍만한 혜택을 모르고 사는가!

원팔아 저기 누어있는 고목은 몇 년이나 되었을꼬?

백 년도 넘었을 묵은 세월, 하 많은 세월을 이고 지고, 때로는 서슬 퍼런 뇌성벽력으로 찢긴 가지를 보라. 속살 내민 하이얀 핏물이 흘렀어도, 짓궂은 딱따구리 늙은 살을 쪼아대도, 다람쥐 살을 깎아 집을 짓고, 해묵은 구렁이가 긴 혀를 날름거려 굴을 파고 살았어도, 묵묵히 입 다문 이 자태. 이를 두고 자연은 살아 숨 쉬는 부처라고 했겠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는 인간 된 내가, 이 자연 앞에 서있는 내가 자꾸자꾸 숙연해지기만 해진다. 겨울에 보는 이 자연이 봄이면 꽃 피고 여름이면 녹엽으로 부풀더니 가을 되어 형형색색 나름의 빛깔이 조화로워 스펙트럼의 발광으로 우리를 미치게라도 했던 나무와 숲. 나는 2ｍ가 넘는 장신의 원팔이 친구를 따라 더 깊고 높은 험준한 계곡의 산길을 가쁜 숨을 내뱉으며 기어서 올랐다. 해발 900ｍ. 저기 하늘에 닿은 봉우리가 깃대봉이라고 했던가! 내 퍼질고 앉은 자리, 이곳은 <안부>라고 이름 지어진 곳. 집 떠난 山人이 가족 생각에 安否가 궁금해서 붙여진 이름인가, 내 멋대로 상상을 해보다가 눈앞에 다가선 잣나무 푸른 울을 본다. 그 속에 자리한 묘지 하나, 이렇게 험하고 메마른 정상에, 하늘과 맞닿은 이곳에, 산죽도 추위에 얼어서 죽어있고, 떼풀 몇 그루만 바람에 씻겨 말라진 이곳에, 드물게 겨울을 견디는 모진 굴밤나무만이 바람에 걸리어 떨고 있는 이곳에 ……

―― 묘비에는 <處士密陽孫氏慶陽之墓>라고 씌어있었다. ―― 사방을 둘러봐도 무식한 내 생각으로도 명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후손은 크게 번창하였으리라……. 나도 무언의 경배로 재배를 하고 돌아서니 매서운 바람 속으로 눈발까지 휘몰아치더라. 허기와 무서움으로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하다가 눈 아래 펼쳐진 인간세상을 다시 본다. 가슴팍에 닿은 듯한 천 년 고찰의 대원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고즈넉하고 그 속에 머리 깎은 여승들의 저녁염불소리 바람을 타고 들리는데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선 바윗돌 하나, 천근도 만근도 헤아리기 어려운 고난의 역사로 굳어진 바위, 정면에서 쳐다보니 마치 해골과도 같다. 이곳이 바로 수난의 역사 속에서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바위를 등지고 맴돌았던 곳이려나, 죽어서 해골이 되었나 보다. 산고개 왕등재 너머에는 죄 없는 선량이 억울하게 죽어져 묻힌 함양산청양민학살의 현장인 가현과 방곡이란 지명이 있어 핏물의 계곡을 이룬 곳 있으니, 내 어릴 적 그 때의 참상을 헤아림만도 하구나.

겨울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넘었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에 쉬엄쉬엄 4시간 정도나 걸렸는가 보다.

원팔이와 나는 바람을 지고 눈발을 이고 바윗돌만 돌다가 깃대봉도 늪지도 쑥밭골도 코앞에 두고는 투벅투벅 내려오기로 했다. 가랑잎 밟히는 소리에 무릎뼈 흔들리는 소리도 모르고, 산길을 뒤엎으며 멀어져간 환난의 애절한 울음소리도 뒤로 산에 묻고는 내 지친 걸음으로 어느새 저녁연기 피운 사람사는 세상냄새가 청솔가지 사이로 스미는 곳으로 내렸다.

내려오는 시간은 오를 때보다 훨씬 빨랐다.

지금도 내 귀에는 얼어붙은 바윗돌 틈새로 숨쉬며 흐르는 자연의 숨소리 들린다. 자연은 우리와 더불어 사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