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實과 理想, 이승과 저승을 넘보는 言語의 音響】

----詩의 의미에 대한 나의 小考----

글/竹杷車連錫

초롱하던 시절을 욕심 없이 흘리고 살아온 내가 밀림으로 꽂힌 내 서재의 빛바랜 책들이 읽혀지지도 안은 채 졸고 있다. 읽지도 않으면서 표지의 제목이 좋아서, 아니면 검은 깨알처럼 알알이 박힌 구수한 잉크냄새 풍기는 구절구절의 글 때문인가…, 이렇게 쌓인 귀중한 생명들이 내 서재에서 잠을 자고 있다. 내 한창 배움의 학창시절, 아버지는 책 소리만 하여도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얼굴에 주름살 한 점 찌푸림도 없이 모두 사다주시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도 아버질 닮아서인지 책 사기를 좋아한다.

내가 이제 성인이 되어 살아가면서 이 곳 저 곳 옮기다 보니 추려져 버린 책들도 많으련만, 그래도 村老치고는 적지 않은 책이다. 이는 내 살아온 삶의 보배요 재산이니 이를 보기만 해도 즐겁고 배부르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이곳 산속으로 이사를 하던 그날, 나이는 들었어도 생각이 좁은 딸애가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고물수집상을 불러놓고는 내 살 같은 책들을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난리 아닌 난리가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숨길 끊기는 울화의 광기가 하늘을 치솟아 미친 듯이 날뛰며 울었던 일이 있었다. 내 살아오면서 소홀해진 틈새와 휘어져 굳어진 생활을 메우고 바르게 다듬고자 했던 팔팔한 의욕의 생명줄 같기도 한 책들이기에 찢겨진 한 장의 글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남은 시간들은 그 동안 못다 읽은 책과 함께 지나온 세월을 더듬으면서 살아가고파서…

나이 들어, 나는 세월을 달래고 나이를 다듬는 일로 틈틈이 낙서하는 취미로 시를 쓰기도 한다. 내 시가 남들에겐 웃기는 낙서라고 여겨져도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내 생활의 방편이요 취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평범한 뜻으로, 시는 언어의 압축된 의미를 정서적 운율로 표출한 마음의 글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미완성 시 초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숱한 경험을 했다./神들의 이름을 불러 본 것은/우리가 하나의 對話라서/서로 들을 수가 있게 된 이후의 일이다/>

이 詩句가 하이데거의 유명한 「言語는 存在의 居所」라는 말의 모체가 되는 것이라 본다. 언어는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며 도 언어는 대화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對話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휠덜린의 「우리가 하나의 對話라서」라는 말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말하는 데에 앞서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대화의 근원에 대한 규정이다. 우리는 말하기에 앞서서, 思惟하기에 앞서서, 그리고 詩作하기에 앞서서 神을 들어야 하고, 자연에 귀 기울여야 하고, 사물의 소리에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의 음향과 목소리를 바르게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 경험에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곧 시인의 詩作이 神과 自然과 事物 편에서 걸어오는 이야기에 대한 응답이라는 사실을 말하여 준다. 대상의 음성에 의하여 귀가 뚫리고 입이 열려 神과 세계를 언어로 나타나게 하는 일이 시인의 원초적 경험 양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의 시를 통한 自己展開를 대상과 언어에 의하여 그리고 언어 안에서 하나의 현존재로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오세영씨가 그의 <無明戀詩 31>에서, 한 인간이 시인으로 깨어나기 이전에 彼岸으로부터 들려오는 시인을 부르는 소리에 대하여 말한 바 있다.

나룻배 한 척/긴 강변 모래밭에 매어있다./철없는 어린 것이 잠들어 있다./보리수 그늘 아랜 꽃잎 두어 잎/물결에 실려 흔들려 가고/깊은 잠 흘러흘러/강물은 몇 천리/귀먼 사공은 돌아간 지 오래인데/여어이 여어이/갈대밭 彼岸에선 갈바람 소리.//

나룻배란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움직이는 다리다. 강물의 이쪽과 저쪽의 대화를 실어다 건네주는 언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나룻배는 아직 언어를 알지 못하는 침묵하는 언어이다. 思惟가 비어있고 존재가 비어있는 無明의 강변에서 잠들어있는 것이다. 이 무명의 시간과 공간에 던져진 인간 역시 나룻배와 마찬가지로 無覺省의 침묵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 이 인간은 잠결 속에서 그리고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듣듯이 언젠가는 세계가 환하게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는 신이 그를 깨우고 자연이 말을 걸어올 것을 예감하면서 잠들어있는 것이다. 이 무언의침묵을뚫고들려오는신의첫음성은강물의 물결에 따라 흔들리며 떠내려오는 꽃잎이다. 이 소리 없이 흔들리며 춤추는 꽃잎은 신이 인간을 부르는 눈짓이다.

그러나 이 눈짓으로는 아직도 깊은 잠 속에 빠져있는 인간들을 깨울 수 없다. 인간의 막힌 귀를 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귀가 먹은 채, 잠든 채 인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청량한 바람소리로 인간을 부르고 있다. 언젠가는 이 갈바람 소리에 인간들이 공허 속에서 깨어나 자연의 풍성한 시간 속에 동참하는 기쁨을 얻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최 원의 <세상은 술래>라는 시에서도 신이 건너오는 음성에 화답하기 위해 깨어나고 있는 모습을 詩化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나의 파편들이 상처를 입히는 밤./멀리서 목숨이 닳는 소리/가까이서 살이 닳는 소리//나의 의식은 술래가 되고/나의 육신은 머리카락도 감추고/바람처럼 숨 죽이며/古朝鮮쯤으로 찾아든다//……중략……멀리서 목숨이 닳는 소리/가까이서 살이 닳는 소리/이 한밤에 내가 일어나는 소리//>

신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난 시인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응시하게 되고, 신은 자연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이 속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신의 언어의 음향인 것이다. 이 음향이 대지에 내리면 풀잎은 이슬을 피우고 인간 정신은 순수의 결정체가 된다고 했다. 시인 자신이 말하듯, 불면의 絶對獨存의 밤은 결코 고독한 밤일 수 없는 것이다.

또 시에서 신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나 그 신의 노래에 화답하여 시인이 부르는 노래는 어떠한 노래인가를 말해 준 신동집의 「노래」라는 시에서도 보여진다.

<노래여, 이 밤/어느 별을 향하여 너는/참다운 노래가 되는가./보이지도 않는 어느 별을 향하여/……중략……가장 아름다운 引力이여/마침내 별은/무덤이 되어 한이 없어라.//

이 노래는 하늘과 땅 사이의 덧없는 인연들을 사라지지 않게 단단하게 이어줄 수 있게 된다. 유한한 것들을 무한의 끈으로 매어 상주할 수 있게.…

이 「가장 아름다운 引力」을 지닌 노래는 신과 인간의 벌어진 틈을 메우고 든든한 관련의 밑바탕을 마련해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 위하여 시인은 언어의 영혼을 붙들기 위해 스스로 고통 받는 자일 것이다.

시인 김형영의 <가을 물소리>를 들어보라.

<내가 죽으면/이 가을 물소리 들을 수 있을까/피 맞은 혈관의 피와도 같이/골짝을 스미는 가을 물소리/바라보다 눈 시리어/눈을 감는다//

저문 하늘 몰려오면 물로 접어서/동해로든 서해로든 흘려보내고/이 몸속의 피 다 마를 때까지/바위 위에 앉아 쉬어 볼꺼나//이 몸속의 피 다 말라버려서/이승이고 저승이고 갈 힘없으면/그냥 이대로 가을 물소리같이/골짝으로 골짝으로 스며볼꺼나/가을 물소리로 스며볼꺼나.//>

여기서도 신의 음향인 자연의 소리, 즉 가을 물소리에 全人的으로 동화되어 존재를 체험하는 자신의 육신을 노래하고 있다.

신의 노랫소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 스스로가 노래로 轉身할 때 시인은 골짜기를 스며드는 물소리를 자신의 몸속 혈관으로 흐르는 피의 흐름의 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된다.

계곡의 물이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소리에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체험 속에 환하게 開明되는 존재의 빛에 눈을 감게 된다. 이러한 체험의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피조물로서의 존재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우리의 삶을 주조하는 법칙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규정하는 법칙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며 다가오는 시간을 강물에 띄워 흘려보내고 시인은 신의 음향이 자신의 육신 속에 스며들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위 위에 앉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몸속의 피 다 말라버렸어/이승이고 저승이고 갈 힘없으면」이라는 말은 이승과 저승을 하나의 공간으로 넘나들 수 있는 초월적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은 피와 살로, 즉 육신으로는 이룰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초월의 정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육신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열어 가을 물소리가 혈관을 타고 스며드는 시간을, 즉 산의 근육과 나의 근육이 하나로 엉겨붙는 接身의 순간을 기다려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 다가올 때 서슴없이 육체를 열어 골짝의 물을 몸 안에 받아들여 스스로가 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시인의 언어는 신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신의 부름에 신이 건네는 대화에 응답할 수 있는 언어를 인간은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언어만이 진정한 「存在의 居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를 읽는 내 주변의 사람들은 읽은 시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지를 못하겠노라. 아니면, 현실과는 이해가 되지 않는 환상이나 몽상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는 곧 인간 즉 시인과 神 또는 自然과 사물과의 대화, 곧 音響에 대한 존재의미, 그 자체를 모르거나 認知하지 못한다는 때문이 아닐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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