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진원

 

 

만학의 동기

  아내가 방청소를 하는 동안 산책을 하라기에 운동복 차림으로 뒷동산으로 갔다. 어린아이도 줄달음으로 오르는 뒷동산이다. 처음이라 선지 산중턱도 못 올라 숨이 차고 가슴이 터질듯 아프고 어지러워 속까지 메스꺼웠다.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낯선 사람 옆에 무작정 앉았다. 나를 근심스러운 듯 쳐다보며 이런 일이 처음이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연세가 많아 보였다. 책을 다 읽은 듯이 덮고 일어선다.

 「아직 젊은데, 산책도 자주하고 책도 좀 읽어봐요.」
하면서 읽던 책을 내 코앞에 내민다.

  파란색 표지에 <제삼의 물결>이라 쓰여 있었다. 노인은 윤기 있는 백발을 휘날리며 어느새 저만치 사라진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협소설의 이인을 생각했다.

  아내가 산책 좀 하라고 성화를 부린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식은땀으로 함빡 젖은 채 백짓장 같은 얼굴로 힘없이 돌아온 나를 바라보며, 아내는 걱정 서러운 듯이 “괜찮아요?”하고 묻는다.
「오늘부터 술 담배를 끊을 거야!」

  나는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이날이 1993년 3월 1일이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맥주한잔 줄까요?」
  아내는 맥주 한 병을 퐁하고 딴다.

 「딱 한잔만, 나머지는 당신이 들어요.」

  거품이 소복하게 쌓인 큰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차디찬 맥주가 가슴 속을 시원하게 적신다, 어- 시원하다. 맥주잔을 내려놓고 식탁 앞 진열장을 쳐다보았다. 양주병과 고급담배갑을 봉인한 금박상표가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하다.

 「작심삼일이지」
  아내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아니야, 일 년만 견디면 내년에 방송대학에 입학 할 거요」

 「어디 두고 봅시다!」
  아내는 구박하듯 다짐을 한다.

  다음날부터 담배를 참는답시고 컴퓨터학원에 등록하여 글워드를 배웠다. 답답할 정도로 단편적이고 진도도 없이 산만한 강의는 몇 개월의 학원비만 낭비했다. 어느 날 동창모임에서 컴퓨터 이야기가 나왔다. 초중등 교장이나, 관리직의 공직자 친구들이 컴퓨터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고 푸념한다. 
「나는 지금 학원에서 배우고 있는데 영 틀렸어. 우리 함께 방송대학에서 컴퓨터를 제대로 배워보세!」하고 제안을 했다.

「재주 많은 자네나 배우게」

 교장이란 친구가 신경질 적으로 대꾸한다. 그러자 공무원 친구도 짜증스레 투덜거린다. 마치 컴퓨터가 여기서도 속을 썩인다는 말투다.

「이 나이에 술 담배 끊고 또 대학을 새로 다녀!」
「시간 많은 젊은 너나 다녀라, 나는 시간 없어 살기도 바쁘다.」
날보고 젊은 놈 같은 소리 한다고 퇴박을 준다.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설득을 했다.
「늙고 젊은 사람의 시간이 따로 있나, 시간은 만들어 쓰는 것이야!」 

「그런 시간 너나 만들어 써! 이렇게 곰 같으니까 재주가 많나보다.」

「좀 있어봐라, 젊은 선생들이 컴맹교장을 치매노인 취급 할 거고, 컴퓨터로 지시하지 못하는 컴맹상관은 명퇴하라고 하극상이 날걸.」

하며 나는 희망 없는 친구들이라고 빈정거렸다.

 「걱정 말아 이 사람아, 아직은 부하직원들이 알아서 해주니까 괜찮네!」

  그렇게 큰소리치던 친구들이 K2가 되자마자 弄假成眞이 되어 정년후의 촉탁은커녕 거의 다 명퇴를 당했다. 모두 연금핑계를 대었지만.

  요즘은 그때 자네 말이 옳았다며, 앞으로 진원이가 하는 말은 잘 받아 적어라고 빈정거린다.


만학의 기쁨

  나는 이듬해인 1994년 3월에 친구들 보란 듯이 전산학과(컴퓨터과학과)에 입학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여 입학의 동기와 자기소개도 했다. 회사원, 공무원, 교직자들이 많았고, 고교를 갓 졸업한 17~8세의 미성년도 있었다.

  아들 딸, 손자, 며느리 같은 급우들이 나이든 학우를 배려하며 학습도우미를 자청해 참 고마웠다. 한자가 섞인 경영학개론은 나도 그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과제물이라는 긴 글을 써보기도 처음이다. 다음날 다시 읽어 볼 때마다 전부 고쳐 쓰기를 세 번이나 반복 했다. 일을 할 때도 과제물걱정이었다. 한 과목의 Report를 완성하는데 일주일 밤을 지새웠다. 50견과 목 디스크가 어깨에 내려 팔이 저리고 펜을 잡은 손가락에 물집이 터졌다. 첫 학기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2학기에 들어 학생회의 컴퓨터강좌 덕분에 과제물을 컴퓨터로 작성했고, PC통신으로 학습정보도 얻었다. 당시 학습관장도 나와 경쟁하듯 함께 글을 배웠다. 1학기 때보다 많은 과목을 학습할 여력도 생겼다.

  처음 컴퓨터로 작성한 과제물을 레이저프린트로 산뜻하게 출력을 했을 때의 감동은 말할 수가 없다. 해기사가 되기 전에 나는 도청 인쇄부처에 근무하면서 원지를 필경하여 프린트로 책을 만들거나, 한 글자씩 찾아 공타를 쳐서 마스터인쇄를 했던 일을 기억했다. 컴퓨터가 우리에게 공헌한 최대의 업적은 인쇄술의 대혁명이었다. 방송대학입학 후 PC통신으로 정보를 얻고 컴퓨터로 문서를 자유자재로 인쇄하게 되자, 이것이<제3의 물결>의 징후로 여겼다. 1등기관사로 근무했던 대형MO(무인)선도 겨우 8비트의 트랜지스터 컴퓨터조정실이었다. 지금은 미디어시대를 넘어 4차원의 세계를 열고 있지 않은가.


참된 봉사는 복수전공의 평생학습만이 가능

  전산학과 2학년이 되던 해 문중은 파산직전이었다. 위토와 선산을 관리하던 종손이 적자영농을 핑계로 세비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어려운 일가를 구휼했던 문중이었다. 문중어른들이 종중재산을 조사하여 공개하라고 하였다. 젊은이들은 차제에 사단운영체제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나도 찬성하였다.
  종손을 왕손처럼 아껴주던 어른들도 부득불 승낙하였다. 나는 정관을 만들어 모든 가문의 동의를 얻었고, 서류를 갖추어 사단등록을 하였다. 예전엔 문중행정업무는 대서소의 힘을 빌렸던 것을 컴퓨터통신으로 정보를 얻어 많은 어려운 일을 직접 처리하였다. 

  사단대표등록을 하고 대표명의로 미처리된 문중민원을 해당관청에 청원하여(한전선하부지, 농업기반공사의 수로부지, 군청의 도로편입 토지보상 등)해묵은 문중민원을 종결하였다. 해당관청이 토지보상을 해주려고 하여도 공동명의라 당사자선정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보상금과 군지원금, 선산과 위토를 처분한 1억5천여 만 원의 재원으로 2400기의 奉安堂[帝鄕歸盡]을 건립하고 시향을 모시던 50위의 선조묘소를  이장하여 합동 봉안하였다. 서부경남전역에 산재해 있던 묘소관리비만으로도 시향을 모시고도 남는 예산이 되었다.

  문중이 안정되자 60년 전 갑신년의 전성기가 되돌아 왔다고 어른들은 기뻐하셨다. 더구나 800쪽의 문중<사직공>족보를 전산입력하고, 종중재산이 공개되자 모든 가문이 집행부를 신뢰하게 되었다. 문중어른들은 방송대학이 참 신통한 능력을 가르친다고 격찬하시며, 생각과 행동까지 바꾸는 새로운 지식은 때를 가리지 말고<학이시습>해야 한다는 논어의 말씀을 인용하시기도 하였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권리도 찾고

 1982년 3월경 양사언의 시조처럼 20년의 해상생활을 접고 농장을 구입하여 뭍으로 돌아온 곳이 진주다. 1984년경 시청이 농장을 선매하여 88올림픽공원을 조성한 뒤 10년이 넘도록 손실보상을 회피하였다. 나의 민원서류가 건설과 캐비닛 하나를 채워도 결말은 나지 않았다.

  1994년경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나의 가정을 풍비박산시켜버린 행정부패사실을 고발하듯 청와대로 보낸 탄원서에 고함소리로 실었다.

  어느 날 담당직원이 전화예고를 하고 나를 찾아왔다. 상부의 지시라며 하수과로 가서 즉시 합의보상금을 받아가라는 것이다. 나는 서면으로 다시 통보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그러겠다던 통지가 없어 그를 찾아갔더니, 상부지시가 아니라고 말을 번복했다.
  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야단을 쳤고, 그들은 나에게 폭언과 폭행까지 가하였다. “법으로 똘똘 말아 죽여 버리겠다!”는 그들의 말대로 공동증언의 의한 공무방해죄를 뒤집어쓰고 벌금만 물었다. 행정제국의 위력을 실감 한 순간이었다.

 고소는 내가 했는데, 나의 진술은 하나도 없고, 검경은 쌍둥이의 합창처럼 공무원의 진술만 되물었다.
「딴말 말고 묻는 대로 예, 아니오 로 대답해요.」
「시장 욕했소?」

 「공무원 욕했소?」
「10억짜리 땅 있다고 큰소리 쳤소?」
「나한테 몇 평 안 줄 거요?」
  이런 빈정거림이 예, 아니오 로 답변만 하라는 신문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기가 막혀 욕이 나왔다.

 「인간쓰레기들!」

 「어라, 이것 봐라! 늙은 기 형편없어, 어디 맛 좀 볼래?」

  충절과 예도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정 불신은 여전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동학운동, 형평운동, 어린이새싹운동 등이 하필 이곳 진주에서 시발했을까. 진주를 충절, 예도의 이름을 붙이게 해준 역사의 선인들은 모두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벌금이 없어 도움을 청하려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어느 한곳도 돈 안 되는 상담은 할 데가 없다. 법관면담처럼 변호사 얼굴보기도 어려웠다. 인권보호? 정의의 보루? 차라리 모기 간을 얻어먹는 게 났겠다. 법전에서 변호사강령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선진 외국은 변호사 사무원이 법률상담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국은 사무장이 상담은 물론 변호사를 먹여 살린단다.
이래서 금력과 권력을 가진 자나 법률전문가는 진짜 감옥을 무서워한다. 서민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것이지 감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잘 알지만, 서민은 자기의 죄가 뭔지 잘 모르는 것이 다르다.

  법학도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 <폴뉴먼의 법정>과 <필라델피아>의 映像과音樂이 멋진 인생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컴퓨터를 얼마큼 알게 되자, 서둘러 법학과로 편입한 것은 행정쟁송을 위한 당초의 목적이었다.
  법철학강의시간에 법학과를 지원한 동기의 발표를 과제물로 대체한다는 담당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두 시간에 걸쳐 모두 발표하였다. 교사, 경영학박사, 의학박사, 회사경영자 등의 학우들은 변호사의 이율배반적 양심을 파악하고자 법학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법학과 편입당시에 PC통신이 인터넷으로 바뀌고, 편입생도 기초과목의 학습이 쉬워졌다. 더구나 인터넷에 개방된 Law-firm이 많아 쟁송실무나 민원처리 등의 위법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법학강의에서 모든 위법은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서만 결정된다. 동시에 법률은 강자의 선이며, 약자에겐 의무가 강조된다는 법정의 순리를 깨닫기도 했다.

  국가나 사회의 개혁은 이러한 법정의 순리가 변할 때만이 가능하게 된다. 아직도 우리의 법정은<運七 技三>이란다. 진실이 운수보다 우선하는 <運三 技七>이 되는 날은 언제일까. 아마도 법관과 법률전문가가 혁명을 환영할 때일 것이다.

  나의 행정쟁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시청에서 미 수령 보상금을 예산이월하기위해 공탁을 한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예산을 더 청구하여 합의보상금을 해 주려는가 기대했다. 그런데 3개월 후 의료보험공단에서 월 10만원 가까운 의료보험료를 탕감한다고 연락이 왔다. 너무 고마워 영문을 물었다. 토지가 국유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예산이월을 위한 공탁을 원인으로 토지조서도 없이 촉탁이란 이유로 등기관의 직권으로 소유권을‘국’으로 이전등기를 경료 해버리고 당사자에게는 예고절차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나 법원이 저지른 잘못도 법원의 판결로 결정된다. 법치란 이렇게 강자에게 편리한 변명인 것이다.
  법원은 나의 이의를‘이유 없다’고 기각하면서도‘항소할 수 없다’는 단서까지 붙였다. 최고 강자의 위법은 항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선 등기관이나 행정서기의 직권남용 앞에 서민의 인권이나 사유권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같은 우리의 법치주의다. 다만 대법원의 승소확정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능력자들만의 법치민주국가인 셈이다.

 직접쟁송실무를 체험하면서 법학강의를 듣는 것은 멋진 인생의 篤工이며 값진 수련이었다. 법학과를 졸업한 후, 나의 법정은 초라하게 보였다. 강자의 거짓을 인용하는 법관의 양심을 숨기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행복했던 부부 방송대학 생활

 동냥지식으로 쟁송실무를 공부해가면서 15년의 길고긴 악전고투로 기어이 대법원승소확정판결을 받았다. 진주지원의 위법등기를 직접 말소하고 20년 해기사의 한이 서린 채 남강에 빠져버린 나의 명줄 같은 땅을 기어이 건져 올렸다.

 이때부터 아내는 방송대학생활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대법원승소판결이후 시청은 더 악랄하게 토지보상을 기피했다. 또다시 지겨운 행정쟁송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민원의 무덤이 되어야할 행정심판은 솔거의 벽화처럼 수많은 참새를 현혹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추악한 행정심판을 고발하는 심경으로 <행정심판의 효율적 운용>이란 졸업논문을 쓰고 법학과를 졸업했다.

  어느 날 아내가“당신이 법학과를 졸업할 때 나도 방통고를 졸업한다.”며 부끄러운 듯 자랑했다. 그 천진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게 목이매어 참 장하다는 축하의 말도 못했다. 법학과 2학년 때 법무사 기출문제집을 사면서 고입검정고시문제집도 한권 샀다. 곱게 포장한 그 책을 아내에게 선물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나 남 앞에 나서지 못하던 아내가 이 책을 보고 홍조를 띄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때의 모습을 잠시 잊고 있었나 싶다.

  내가 중문학과에 편입할 때 아내는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그토록 갈망했던 아내의 대학생활은 진짜 힘든 우리의 생활고를 극복하는 얼이 되었다.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던 때는 우리부부가 함께 방속대학을 다녔던 3년간이었다. 그리고 가장 불행한 시기가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인가 보다.

  가족의 생명줄 같은 빼앗긴 땅을 찾아 1/10의 땅값을 받아내기 위해 걸린 무정한 세월이 방송대 첫 입학한 날부터 지금까지 15년이 넘었고, 지천명의 장년은 이순을 스쳐 고희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산가족이 되었고 아내는 방송대 4학년 등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경영학과를 마치면 국문학과에 같이 편입하자고 약속했던 기억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요즘 아내는 페미니스트처럼 나를 보고 능력도 없는 가장이 가족을 떼어놓고 상상의 청중 속에서 자기최면의 노년을 즐긴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지하철의 노숙자 신세를 면케 해주는 방송대학이 고맙단다.

  지금도 아내와 나는 우리가정을 파괴해버린 무책임한 행정부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에게 행복한 3년간의 방송대학의 학습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한국방송대학교를 그대로 남아있게 해준 것이 고마운 일 중의 하나라고 쓴 웃음을 짓는다.


중문학과를 졸업하다

  전산학과 4학년 때 800여쪽짜리 문중<사직공>족보를 전산입력한 후 서책으로도 출간했다. 전통족보의 종서를 횡서로 바꾸어 인명 찾기도 쉽게 하였다. 처음 반대하셨던 어른들이 대동보까지 전산화 하자고 하신다.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문중어른들은 고급노트북만 마련해주면 절로 되는 줄 아셨다. 나는 엄청난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법학과를 졸업하자 그해 바로 중문학과에 편입하였다. 한자를 잘 알고 컴퓨터에 능한 사람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합천이씨 전서공파보만 해도 3500여쪽이 넘는 분량이다. 혼자서 단시간 에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중문학과 학우의 도움을 받아가며 전산입력이 모두 끝날 무렵에 중문학과도 졸업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중문학과에 편입한 후에야 한문에 무지했던 나를 알았고, 대동보전산화를 하겠다고 덤빈 것이 무모한 일임도 깨달았다. 지성감천이라는 愚公移山이란 학습이 인내와 용기를 주었다. 하루 한 두 쪽, 일 년에 400쪽의 책 한권, 삼년이 지나자 어느새 졸업과 동시에 3500여 쪽의 전서공파족보가 완벽하게 입력되어 버렸다.

  족보의 전산처리도 가치재창출의 예술이었다. 엄청난 노력으로 얻은 결실일수록 베풀어야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펴내어 객관적으로 검정을 받아야 사료로 보존될 가치를 얻는다. 또한 전산입력은 족보원형을 보존하면서 수시보정을 하므로 20~30년 주기로 족보재편집을 하던 엄청난 재원낭비를 막을 수가 있게 되었다.

  문중의 젊은이들은 이 족보를 인터넷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입력된 원형을 보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홈페이지 제작소에 상담을 해보았더니 페이지 당 10,000원 이상이 든단다. 입력된 데이터를 하이퍼텍스트로 바꾸는데 종중재산을 몽땅 털어 넣어야 할 판이다.

  나는 방송대학서점에서 나모FX suit라는 두꺼운 책을 샀다. 책속의 할인안내대로 프로그램도 샀다. 족보를 입력하듯 한 페이지씩 꼼꼼하게 반복하며 공부했다. 두꺼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부터 한 페이지씩 만들어진 글과 사진이 떠올랐다. 손 벽을 치면서 아내를 불러 홈페이지가 작동한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가 올려지자 원활하게 작동하지가 않았다. 지역대학의 교수, 조교, 학우, 교직원에게까지 물어보며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다른 종류의 책을 사서 공부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미디어학과목을 이수해야 될 것 같았다. 당초의 국문학과편입을 뒤로 미루고 미디어영상학과 3학년에 조급하게 편입을 했다.


미디어영상학과에서 처음 받아본 방송대문학상

  내가 공부하고 싶은 글쓰기와 인터넷영상매체 학습과목들이 모두 3학년과목에 들어있었다. 2학기학습이 끝날 무렵 나의 홈페이지는 제대로 돌아갔다. 모양새는 없어도 동영상 인터넷 방송도 해낼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큰 수확은 글을 쓰는데 자신이 없었던 내가, 미디어학과목을 공부하면서“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하는 깨우침을 얻었다. 교과서나 작품의 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분별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처녀졸작 두 편을 나름대로 다듬어 제30회 한국방송대문학상모집에 응모했다. 그 중에 <동란의 여명>이 가작으로 뽑혔다. 난생처음 받아본 가장 큰상이며 제일 큰 자랑이었다. 13년간의 방송대학평생학습이 이제 겨우 수필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동학사상에 학문과 예술은 좁고 깊게 파고들수록 직업본능의 이기적 질곡으로 빠져들지만, 넓게 펼치는 복수전공은 봉사의무를 깨닫는다 했다. 

  나는 누구에게나 방송대학에서 평생학습을 하는 이유를“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보게 되고, 바르게 행동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웅변한다. 이것도 동학의 진리다.

  키케로의 노년처럼 만학은 대지와 거래를 하는 것과 같다. 노력한 만큼 되돌려 받는 것처럼 방송대 평생학습이‘인생은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하여주었고, 노년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동학의 전당과도 같다.

  아름다운 인생을 정직하게 형상화 하고 싶은 의욕으로 국문학과에 편입하였다. 국문학과는 인성수련 없이는 이룰 수 없는 思無邪의 예술이란 것도 알았다. 국문학과를 졸업하면 아내와 함께 일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여, 두 섬나라가 강국이 된 연유를 좋은 이야기로 남기고 싶다.<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