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山대사와 花開洞天


鄭  然  可       


글머리에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겨 그 이름이 역사에 빛나는 서산대사, 그의 보람 있는 삶은 이곳 河東의 花開洞天에 터를 잡음으로부터 비롯되었었다. 西山이 示寂한뒤 그의 사리탑이 묘향산 安心寺와 금강산 普賢寺에 세워졌고, 금강산 楡岾寺에다 그의 영골을 봉안했다. 또 전라남도 해남땅 大興寺에는 그의 유품을 거두어 보관하고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그의 위업을 기리는 제향사당으로 묘향산에 酬忠寺, 밀양에 表忠寺를 세웠다. 그런데 西山이 정작 뜻을 세워 몸을 길렀던 하동의 화개동천은 아무런 흔적하나 없으니 뜻있는 이들은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빼어난 경관과 함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 화개계곡에 찾아드는 수많은 관광객의 대부분이 이런 위대한 선인들의 숨겨진 사연들을 모른 채 그냥 지나쳐 버리려니 하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 한량없다.


  그 옛날 紅流橋자리에 새로 축조된 콘크리트 다리 옆에 어울리지 않게 세워져있는 안내판에 선산대사가 수도했던 곳이라는 간략한 내용이 있긴 하나 안내판을 쳐다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고, 설사 눈여겨 읽더라도 별달리 마음에 닿는 게 시원찮도록 안내판일 뿐이다. 차라리 서산이 이곳에서 남긴 시한수라도 새겨 놓았으면 그의 위대한 사상과 함께 이곳의 풍광을 보다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향 같은 三神洞


  대사가 그의 호를 西山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만년에 묘향산에 은거하면서 부터였고, 소년 시절 화개에 들어와 얻은 法名은 休靜이었다. 西山의 어릴 때 이름은 雲鶴, 속성은 完山崔씨였다. 그는 1520년(중종15년)3월에 평안도 安州에서 아버지 世昌과 어머니 金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때 부모의 나이는 이미 50세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먼저 어머니를 잃더니 이듬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버리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게 된 이 천애고아를 安州 목사 李思會가 찾아보았다. 첫 눈에 비범하게 보이는 소년 雲鶴을 보살피고자 마침 內職으로 전근하게 되자 같이 데리고 한양으로 갔었다.


  西山은 곧 성균관에서 유생들 틈에 끼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처지 때문이었는지 학문은 늘지 않고, 아픈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듯 놀이에만 열중하며 세월을 보내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하루는 어떤 노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노인이 西山을 알아보고 자기 친구의 아들이라며 소년의 장래를 매우 걱정하더니 마침내 자기집 근처에 작은 서당을 마련하고 그 노인의 친 자제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공부를 하게 했으나 역시 깊은 공부가 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였다. 3년이 흘러 비로소 生員試에 나가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나이 열다섯 되던 해 그를 가르치던 스승이 全羅監事가 되어 남쪽지방 전주로 내려갔다. 얼마 후 西山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옛 스승이나 한번 찾아본다며 같이 지내던 친구 두 명과 함께 전라도 全州까지 내려왔는데, 마침 스승은 부모상을 입어 다시 한양으로 올라간 뒤였다. 이에 세 소년은 이왕 내려온 김에 남쪽지방의 산천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유랑생활을 하며 頭流山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구례의 화엄사, 연곡사, 하동의 칠불암, 의신사, 쌍계사 등 크고 작은 절간들을 두루 구경하며 반년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花開골짜기에서 崇仁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하필 西山을 보고는

『자네는 기골이 청수하니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여 공명심에 연연하는 생각을 영원히 버려라. 書生의 業은 평생을 허둥대도 백년의 노력이 허튼 이름뿐이리니 실로 아깝다.』하며 佛門에 들어 올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이에 西山이

『어떤게 마음을 비우는 공부라 하옵니까?』하며 반응을 보이니 그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한 참 만에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며 전등록, 화엄경, 법화경, 유마경, 반야경 등 여러 권의 서적을 들어내 보이며 읽어 보고 깊이 생각하면 불문에 들어올 수 있다. 하더니 따로 측근에 자리하고 있던 靈觀대사 芙蓉에게 낯선 소년 西山을 맡기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함께 유랑하던 두 친구는 다시 한양으로 떠나고 달리 의지할 데가 없는 西山은 지리산 속 花開洞天에 남아 절간에 몸을 의탁했다. 그로부터 崇仁, 靈觀 두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3년을 보냈다. 나이 열여덟, 머리가 커지고 생각이 점점 성숙해지니 고향도 그립고, 너무 일찍 떠나버린 아버지와 어머님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결 설레게 하는 봄을 맞이하여 한수의 시를 쓰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漢字의 原文은 생략한다.


                  창밖에 슬피 울던 두견새소리

                  눈에 가득 봄 산이 다 고향 같도다.

                  물 길어 오다, 문득 돌아보니

                  흰 구름 사이에 청산이 떠 있어라.

    

  만리타향에서 고행의 길로 접어든 외로운 소년은 이 짧은 글귀에 그의 심경과 주변의 경관을 담아 뛰어난 문학적 재질을 들어냈다. 이날 그는 비로소 머리를 깎았다. 

  

그리운 花開洞天


  西山은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버린 花開洞天의 여러 절간을 찾아다니며 修道에 전념했다. 주로 깊숙한 곳에 자리했던 三鐵窟, 圓通寺, 圓寂庵, 神興寺 등 여러 寺庵들이 그의 도랑이었다.

  1546년 가을 西山은 13년동안 몸담아 공부하던 花開를 떠나 이제 더 넓은 禪界를 찾아  보고자 雲水行에 나섰다. 낡은 장삼차림에 표주박 하나만 춤에 매달고 오대산, 금강산 등지의 유서 깊은 유명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불도의 경지를 다졌다. 31세 되던 해 마침내 그는 주위의 권유에 못 배겨 별로 내키지도 않응 僧科에 나가게 된다. 그는 곧 中禪科에 장원으로 뽑히고, 연이어 大禪을 거쳐 불교계에서는 고위직인 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이 시기는 명종임금의 모후인 문정황후가 불교육성책을 펼침으로서 西山의 생애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그가 花開에서 『차라리 한평생을 못생긴 놈으로 지낼지언정 맹세코 글자풀이나 하는 강사노릇은 않겠다.』며 마음을 다지고 수도에 정진한 결실이 밖에 나와 이처럼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곧 왕실의 전용 기도처인 선교의 宗刹 봉은사 주지까지 겸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딴 데 있었다. 뭇사람들의 시선이 끌리는 고위직이나 화려한 명성은 그의 본분에 맞지 않았다. 봉은사 주지를 맡은 지 2년 만에 모든 직첩을 벗어 던지고 한양을 떠나고 만다.

『괴롭고 무의미한 영화로움이 꿈처럼 흘러 지나버렸다.』고 술회하며 승과에 오른 것부터를 부질없는 잡념으로 단정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단출한 차림으로 표주박 하나만 매달고 먼저 금강산을 찾았고, 묘향산, 구월산등지로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 정진하면서 다시 찾을 지리산 花開洞天을 못내 그리워했다. 멀리 지리산속의 친구들에게 보낸 문안 서찰들에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나 생각느니 강남의 달, 자고새울고 온갖 꽃피어 향기로운 곳…』 

『…老夫는 지팡이를 잡고 자주 그림자를 돌아 볼 뿐이오. 때때로 남쪽을 바라보며, 날아 내리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오. 귀뚜라미 곁에서 꿈이 깨매, 몸이 만첩산봉에 누었으니 어찌할까, 어찌할까…』

『…1년은 열두 달이요 한 달은 서른 날, 하루는 12경인데, 하루 열두 번씩 마음 둔들 어찌할까. 생각한들 어찌할까. 아득하여 이만 씀.』


다시 花開에 淸虛堂을 짓고


  1560년(명종15년) 西山은 다시 花開洞天으로 돌아왔다. 나이 41세였다. 그는 신흥계곡에 허물어져 쓸어져가는 옛 암자 內隱寂庵을 손질, 개축하여 淸虛堂이라 이름 지었다. 內隱寂庵은 신라 때 왕족 居胥旱이 처음 세웠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 불교의 핍박에 훼철되었던 암자였다.

  西山은 전국8도에서 시주를 얻어 2년에 걸쳐 淸虛堂을 지으니 비로소 거처할 곳을 마련하게된 것이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의 유유자적한 삶을 들어낸 詩를 한 수 남겼다.


      스님 대여섯이 내 암자 앞에 방을 지었네.

      새벽종소리에 함께 일고 저녁 북 울리면 같이 잠드네.

      달빛에 집 앞 물 함께 길어 차 다려 향기 나누며,

      날마다 무슨 일 하는가, 염불이고 참선이네.


  西山은 淸虛堂에서 그가 남긴 많은 저서중의 力作인 三家龜鑑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淸虛堂에 거처를 전한 이듬해 신흥사 주지 玉崙스님이 사찰 앞 범왕 골짜기와 의신계곡에서 사납게 흘러내리는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바윗돌을 다듬어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였는데 다리는 紅流橋라 하고, 누각은 凌波閣이라 이름 지었다. 큰일을 도모한 玉崙스님이 西山으로 하여금 凌波閣記文을 짓게 하니 西山은 서슴없이 아래의 기문을 썼다. 원문은 생략하고 한글로 풀이된 것만 소개한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