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갑오 동학혁명이란?


  포덕 35년(1894) 3월 21일 갑오 동학혁명운동의 횃불이 올랐다. 당시 조선 봉건왕조 말엽 우리나라는 안으로는 모든 면에 걸쳐 부패가 극심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밖으로는 선진 열강의 침략 마수가 뻗쳐 위기가 절정에 달했었다. 그때 동학은 도탄 속에서 새 세상을 갈망하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는 밝은 빛이 되어 교세가 날로 늘어나자 부패한 조선 왕조는 동학을 이단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잡아 처형하는 극심한 탄압을 가했다. 동학은 이에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저항하였다. 한편 동학군은 억울한 죄로 처형당한 대신사의 伸寃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교조 신원 운동은 포덕33년(1892) 공주에서 충청감사에게 신원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한 것에서 비롯되고, 이어 수천 명의 도인이 전라도 전주 三禮譯에 모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집단 시위운동을 일으켰고, 포덕 34년(1893)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소(伏疏)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시 충청도 보은에서는 2만 여의 도인이 모여 근 20일간에 걸친 대신사의 신원과 庶政개혁, 외세 배격 등을 요구하는 근대적 무저항 시위를 전개 하였다.


  이때 관변에서는 일시해산을 종용한 후 더욱 심한 박해를 가하니 동학은 이제 평화적 상소나 시위로는 도탄에 빠져있는 민중과 외세의 침입으로 흔들리는 나라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혁명적 분위기가 조조되어갔다. 그리고 민중과 밀접하게 되어 있던 동학지도층인 접주들이 사회개혁과 구국의 선구자로 앞장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해월신사의 지도아래 동학교도들은 영해 신원운동을 비롯한 공주 장사와 전주 삼례집회, 서울 광화문 복합 상소, 그리고 보은집회 등을 통하여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좌도가 아닌 정도이며 천도]임을 여러 차례 주장하였으나 조정은 이를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동학도들에 대한 탄압과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는 더욱 극심하여 민중은 도탄에 빠져 살길을 찾지 못했으며, 국가의 운명은 위기일발의 패망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탐관오리의 원흉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행패와 수탈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동학교도과 그 지방 고부의 동학접주 全琫準은 수천 군중을 지휘하여 포덕35년(1894) 갑오년 1월 10일(음) 고부군을 습격하니 군수 조병갑은 도주하고 흥분한 구중들은 군아를 때려 부수고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어 무장하는 한편, 창고의 양곡을 풀어 원래의 주인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다시 원성의 표적이었던 萬石洑(저수지)로 가서 조병갑이 강제동원으로 새로 쌓은 둑을 터뜨리기 했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급보에 접한 전라도 감영과 조정은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민란 조사단)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 진압하려고 했는데, 8백여 역졸을 거느리고 당도한 이용태는 무고한 백성을 모조리 동학당으로 몰아 잡아 가두고 민재를 약탈하며 심지어 그 집까지 불 지르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이에 동학군은 마침내 全琫準, 孫和中, 金開男, 金德明 등 각지의 동학 접주들 간에 통문이 돌려졌고 고부 백산에 동학군을 집결하게 되었다. 동학군은 격문과 행동강령 등을 앞세우고 혁명의 횃불을 높이 올리게 되니 격문에 이르기를


  [팔역이 한마음으로 억조가 순의하여 보국안민의 기치 들어 사생맹서 하노니…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른 것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 하는 관리들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들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方伯 守令들 밑에서 굴욕을 당하는 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하였고,


  4대 강령으로

  (1)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부수지 않는다. (不殺人, 不殺物)

  (2) 충, 효를 다하고 제세안민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3) 왜놈을 몰아내고 성도를 맑게한다.(逐滅倭夷, 澄淸聖道)

  (4) 군사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로 진멸한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등을 내세웠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전봉준(동도대장)으로 하여금 그 군기와 오색의 가포별 깃발을 휘날리며 수만 동학도들의 당당한 기세아래 3월 21일(양4월 26일)궐기하여 동학혁명의 횃불을 높이 올린 것이다. 이에 고부의 안핵사 이용태는 대항도 못한 채 도망가고 이어 태인 현을 함락한 동학군은 그 수가 점점 늘어 고부 백산을 본거지로 인근 각 읍을 호령하게 되었다.

  이어 동학군은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道橋山으로 이동, 4월 7일에 黃土峴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불과 10여일 만에 정읍, 흥덕, 고창, 등을 합락하여 동학의 기세는 호남일대를 휩쓸었다.

  그리고 동학군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倡義文을 천하에 공포했다.


  <창의문>

  사람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君臣과 父子는 人倫의 가장 큰 것이니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곧으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한 연후에야 이에 국가를 이루어 능히 무궁한 복에 이르나니 지금 우리 聖上께서는 仁孝慈愛하시고 神明聖睿하시어 어질고 정직한 신하가 翼贊하여 총명을 도우면 요순의 풍화와 文景의 정치를 가히 몇 날이 안가서 바랄 수 있으리라.

  지금 신하들은 報國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녹위를 탐하여 총명을 가리우고 아첨할 뿐 충성으로 간하는 선비를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은 나쁜 무리라 하여 안에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에는 백성들에게 사납게 하는 관리가 많아 인면의 마음이 날로 더욱 병들어 가면 생을 즐길 직업이 없고 나가면 몸을 안보할 계책이 없어 확정이 날로 심함에 원성이 계속하여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천륜과 상하의 분별이 무너져 남음이 없게 되었다.

  管子는 말하기를 四維(禮義兼治)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이에 망한다. 하였으니 방금 형세는 옛날보다 마음의 힘은 있으나 公卿이하로부터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자기 몸만 살찌우게 하고 자기 집만 윤택하게 할 계책을 하여 사람 뽑는 곳을 재물 생기는 길로 보며, 응시하는 장소를 交易하는 시장으로 보아 허다한 돈을 국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자기 주머니를 채워 나라에 누적된 빚이 있는데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짓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이하여 八路가 魚肉이오 만민이 도탄이라 관리의 탐학이 진실로 이러하니 어찌하여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으리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깍이우면 나라가 쇠잔하나니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鄕第를 베풀어 오직 홀로 보전할 방법만 도모하고 한갓 녹위를 도적질하니 어찌 그것이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보잘 것 없는 백성이나 임금의 토지에서 밥을 먹고 임금의 덕에 옷을 입으면서 가히 앉아서 국가의 위태한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팔로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가 의논하여 이제 창의의 깃발을 들고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을 같이 할 명세를 하였으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라 할 것이나 절대로 겁내어 만동하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편한하여 한가지로 태평세월이 되기를 빌며 다 같이 임금의 덕화에 잠기면 千萬幸甚이라.

  湖南倡義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동학군은 무고한 백성에 피해가 없도록 국기를 엄하게 확립 행동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민중의 환호를 받고 [마당포덕]이 일어나 군세가 날로 증가하여 4월 9일에는 영광을 함락하고 동 17일에는 함평으로 진격해 나갔다.

  당시 동학군 스스로가 내세운 군기를 보면,

  [적을 대할 때 무기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手功으로 삼고, 비록 부득이 해서 싸우더라도 인명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귀히 여기며, 매양 군대가 지나갈 때에는 사람의 물건을 해치지 말고, 효제충신이 살고 있는 촌락 10리 이내에는 주둔하지 말라]고 하였고, 또 다음과 같은 12개조의 軍律을 표방하여 정의의 군대임을 과시하였다.

  (1) 항복하는 자는 잘 대우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욕한 자는 쫓아낸다.

  (4) 순응하는 자에 敬服한다.

  (5) 도망하는 자는 쫒지 말라.

  (6) 굶주린 자는 먹을 것을 준다.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없애 버린다.

  (8) 가난한 자는 도와준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曉論)한다.

  (11) 병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不孝한 자는 죽인다.


  동학군이 이렇듯 크게 떨치니 조정은 당황하여 洪啓薰을 兩湖招討師로 임명하여 서울의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동학군은 4월 27일에는 전주를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홍계훈은 관군의 병력부족을 조정에 호소하고, 나약한 조정 대신들은 청국에 원군을 청함으로써 망국적 침략을 자초하는 민족반역을 범하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청국군 2천여 명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에 상륙하자 일본이 또한 7천의 군사를 5월 6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로 진주했다.


  이때 동학군은 전주성에 웅거하여 관군을 제압하던 중 내전을 틈탄 외세의 개입으로 크게 국가 운명에 해가 미칠 염려가 있다고 판단, 관군과 화약을 맞게 되었다. 동학군은 5월 7일에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다음날 전주성을 관군에 다시 내어주었는데 이때[東學執綱所]를 전라도 53개 군현마다 설치하여 민간의 정치 참여를 실시하는 동시 다음과 같은 12개조의 개혁요구 조건의 실시를 보게 되었다.

  

  12개조 폐정 개혁 안

  (1) 도인과 정부 사이에 오래 끌어온 혐오의 감정을 씻어 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구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중하게 징계할 것

  (3) 횡포한 부호 배들은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배는 징계할 것

  (5)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머리에 쓰는 평량갓(平涼笠)은 벗겨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용할 것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할 것

  (9)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료로 돌릴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케 할 것 


  이와 같은 개혁안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혁명의 의지를 보인 것으로 이는 전근재적 신분제를 타파하는 봉건적 사회질서의 부정일 뿐 아니라 외세의 침투를 강력히 배제하려는 주체성의 발로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근대화의 재 개혁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를 무대로 청 일 전쟁이 일어났다. 전세는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어지고 일본군은 재빨리 고종왕을 사실상 포로로 하여 괴뢰 내각을 출범시켜 소위 甲午更張을 실시하였다. 동학 천도교의 개혁요구는 민족적 자주성과 근대 지향성을 나타낸 것이며 나아가 민간의 정치참여를 포함한 민권의식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라도 각 군현 53개소에 ‘동학집강소’가 설치되어 민간의 정치참여가 실시된 바 있었다. 한편 이때 청 일 양국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조선 내정에 깊이 간섭하는 동시 6월 17일에는 일본을 견제하던 청국의 원세계를 서울에서 쫓아내고 드디어는 청 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6월 25일에는 친일 金弘集내각이 발족되고 소위 甲午更張이 일본에 의해 강요되니 이러한 일본의 침략사실이 알려지자 동학군은 해체되었던 무장을 다시 가다듬기 시작하여 전주를 무혈 재점령하고 북상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때 일본은 이미 朝日暫定合同條款과 이어 朝日攻守同盟協約조인을 강요했고 한편 대원군과 국군 기무처 안에 암투가 있어 사회적 여러 개혁안의 채택이 일시 좌절된 바 있었는데 그 후 8월에 일본군이 평양에서 청군을 대파하고 9월9일에 일본 공사가 井上馨으로 바뀌면서 조선 왕조를 더욱 강압하였다.

  

  여기에서 동학군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대거 재궐기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에 9월 18일 해월신사의 명령으로 전국의 동학접주를 靑山에 소집하여 총 동원령을 내리니 해월신사 이르기를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것이 天運所致니 오등은 도인들이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해서 師冤을 펴며 우리도의 대원을 실현하라.” 하시며 統領旗를 제 삼세 교조 義庵聖師 孫秉熙에게 내렸다. 이리하여 의암성사 지휘하의 북접 동학군이 전봉준의 남접 동학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보국안민을 위한 거족적 대일항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군은 이미 이때 압록강 이북으로 청군을 격퇴하고 10월에 이르러 대원군을 실각 시키고 제2차로 조선 내정의 개혁 간섭을 자행하면서 한편 동학군을 대거 징벌하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여기에 맞서 동학군은 적국에 걸쳐 339포(包)가 동원되고 수십만의 대군을 형성하여 삼남 일대와 충청도 동남부를 이미 장악하고 북상하여 10월 22일 전략적 요새지인 공주를 공격하게 되었다.


  동학군은 공주 공격에 앞서 木川 싸움에서 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공주 이인역 옥녀봉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봉황산에 이르러 10월 22일부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 혈전을 전개했다. 여기서 수 십 차례에 걸친 뺏고 빼기는 서산해혈에서 대혈투가 벌어졌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왜구의 막강한 화력 앞에 거의 맨주먹의 동학군은 쓰러지기만 할 뿐 끝내 11월 11일 우금치 계곡을 시체로 메운 채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 후 논산으로 퇴각한 동학군은 전주, 태인 등지로 쫓기고 금구, 원평 장성에서 다시 접전을 벌였으나 희생자만 속출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미 주력 부대가 흩어져 도처에서 동학군이 왜군의 총칼에 쓰러졌다. 이 때 일본은 조선의 反日세력을 뿌리 채 없애려는 의도로 동학군을 악착같이 추격하여 30여만이나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월 7일 영동, 양산 싸움에서도 왜군 총칼에 동학군 1천여 명이 쓰러지고 11월 13일 서산 태안으로 쫓긴 만여 명의 동학군이 무참히 살육당하고 11월 14일 여산 싸움에서, 같은 날 청주 전투에서, 11월 15일 진천 전투에서, 11월 17일 율곡전투에서, 청산, 문안 전투에서 수없이 많은 동학군이 쓰러졌다. 또한 바다로 쫓기는 동학군을 왜군은 점함까지 동원하고 광양만에 육전대를 풀어 다치는 대로 죽였으니 그 참상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함편 남해, 진주, 사천, 하동 등지에서 줄기차게 동학군이 일어나 싸웠으나 하동의 고성산에 집결한 동학군 수만 명이 쓰러지고, 강원도 홍천과 청청도 충주 등지에서 2만여 동학군이 집결하였다가 패하고, 황해도 평산, 석현, 구월산, 장수산 골짜기에서 수많은 동학군이 처절한 싸움 끝에 쓰러져 갔다.


  그리고 전봉준 장군은 금구 원평 싸움에서 패퇴한 후 정읍에 피신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순창으로 가서 몇몇 동지와 再擧를 모의 하던 중 12월 2일 관군에 붙들려 서울로 압송되어 다음해 3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포덕 39년(1898) 해월신사 역시 체포당하여 72세의 고령으로 교형을 받으실 때

  “나 죽은 10년 후에는 주문 읽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 하리라.” 하시니 비록 갑오동학혁명은 왜병의 총칼 앞에 무참히도 좌절됐지만 그 정신은 끊이지 않아 10년 후 갑진년에 동학의 개화혁신 운동이 일어나고 다시 기미년 3월 1일에는 항일 독립 운동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우려 퍼졌던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혁명 운동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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