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한 옛날 宇宙의 大始에 하늘과 맞닿은 天柱山 頂上에 麻姑가 居處하는 麻姑城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實達城과 虛達城이 있는 가운데 그 허달성을 마주한 실달성에 뭇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달성의 사람들은 네 부족으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것인데 黃穹族, 藍穹族, 赤巢族, 白巢族이었었다.


  이들은 모두가 그 麻姑宮으로부터 지하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地乳를 配分받아 먹고사는 터수였다. 그런 어느 때 有巢氏가 그 地乳의 배급차례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자기의 巢處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핏 잠결에도 어디선가 달콤한 果實익는 향 내음이 허기진 그의 코 속을 갈근갈근 후벼들고 있었다. 퍼뜩! 잠을 깨보니 자기 巢處 기둥가사리에 뱀처럼 칭칭 감겨 올라온 萄木(포도넝쿨)에 자주색열매가 탐스럽게 익어 짙은 향내를 풍기고 있는 게 아닌가! 허기진 유소씨는 그 과실을 잡히는 대로 몽땅 따먹고 말았다. 그러자 몸이 허공중에 붕붕 뜨는 것 같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봄눈 녹듯 사그라진 황홀극치의 기분이 되어 저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근심스레 採根을 해 물었다. 이에 유소씨는 내말을 들어보라 하고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들려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地乳만으로 어딘가 未洽하던 欲求였는지라 그길로 너도 나도 陶木으로 달려가 그 陶實을 따먹기에 餘念이 없었다. 그런 뒤 모두가 취하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狂亂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 麻姑의 麻姑城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실달성마져 허물어 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제사 사람들은 놀라서 우왕좌왕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던 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四方八處로 흩어져 살길을 찾던 四部族族長들이 연석회합을 갖고 罪惡을 贖罪하여 麻姑城이 다시 보디대로 나타나도록 사라진 實達城을 재건하자고 誓盟하여 그것을 多勿의 精神이라고 銘念키로 했더란 것이었다. 이러한 多勿의 精神이 고구려 태조 高朱蒙의 建國精神이요 年號가 되었던 것이었다.


  소년 雲鶴의 가슴 깊숙이 무엇인지 모를 뜨거운 그 무엇이 저며들고 있었다. 사라진 麻姑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할 것 없이 두루 곳곳에다 고인돌을 뿌려 놓았다고 하는 傳說이 아니었던가 그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 두류산기슭 곳곳마다 그 전설의 神話境이 펼쳐져 있지를 않은가! 漣河川 北極 모서리에는 達宮이 있고, 그 남녘기슭에는 百巫洞이 있음이로다.


  雲鶴一行들은 이같은 華崇洞溪谷周邊을 6개월 동안 두루 살피고 구경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로를 풀고 있던 화엄사객실로 노스님 한분이 소년 雲鶴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雲鶴을 마주하며 하는 말씀이 보아하니, 너는 기골이 청수하여 보통사람과는 다르구나. 그러니 마음을 心空及第에다 돌려서 세상의 名利心을 아주 끊어버리도록 하거라! 書生의 業이란 비록 매일 매일을 終日토록 애써 하여도 백 년 동안에 얻는 소득은 단지 한 낱의 虛名뿐인 것이니 너도 그와 같은 一生을 덧없이 보내버린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될게야! 라고 歎息調로 일러주는 것이었다.


  이에 雲鶴이 그러면 스님, 어떤것이 心空及第입니까? 하고 되물어 보았다. 노스님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눈을 껌벅! 하고는 갑자기 ‘알겠느냐?’ 하는 게 아닌가.

  운학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노스님은 그 제사 측은한 표정을 띠우며, ‘말로서 어려운 話頭인 것이니라!’ 하고는 뒷짐을 지으면서 얼어서 나가는 것이었다. 소년 운학은 그 노스님의 신비스러운 擧動과 강열한 호기심에 잡혀 뒤따라갔다. 그랬더니 그 노스님은 그의 선방의 서가에서 몇 권의 經書를 추려 건네주며, 이 책들을 자세히 일고 깊이 생각하면 그 심공급제라한 화두를 차츰 스스로 깨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소년 운학은 제방으로 돌아와 그 노스님이 준 몇 권의 經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경서들은 傳燈錄, 拈頌, 華嚴經, 圓覺經, 愣嚴經, 法華經, 維摩經, 般若經등이었다. 소년 雲鶴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마 세상 나고 무수한 儒家經典은 거의 보다싶이 했건만 이런 書名의 경전들은 처음이었다. 운학의 타고난 학구열이 가만있지 않으려 했다. 이로써 소년 운학은 마침내 그 심오한 불도의 세계로 실제적으로 들게 되었던 것이었다.


  운학은 독경수주동안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갖고 노스님을 자주 찾게 되었던 이다. 이에 노스님은 꼭 불경을 필독할 결심이 확고한가를 다짐받고는 달리 經學에 밝은 스님 한분을 연계시켜 주었다. 그 연계된 스님이 바로 壺中別有天花開洞凡旺谷에 있는 雲上仙院七佛庵의 靈觀禪師였다. 그리고 雲鶴을 引導한 노스님은 崇仁長老였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유명한 禪宗大宗師였던 壁松堂 智嚴禪師(AD1464~1534)의 直前弟子들이었다.


  이로써 少年 雲鶴은 七佛庵에서 만삼년동안 佛經修學三昧에 들게 되었고, 그것이 끝난날 그곳을 하산하여 의신골의 神凝庵을 찾아가 스스로 삭발을 한뒤 正式으로 入門하는 節次를 要請하여 마침내 一禪大師를 授戒師로 靈觀禪師를 法典師로 崇仁長老를 養育師로 각각 모시고 佛門의 傳統대로 儀式을 行하여 合法的인 空門弟子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열아홉 된 해였다. 여기서 그의 正式法名이 休靜으로 入座된 것이었고, 그밖에 불려지는 西山 또는 淸虛등은 그의 號인 것이다. 그가 서른세살 되던 해는 명종7년 이었다. 그해 4월에 僧科가 있었다. 高麗王朝를 易姓革命시킨 이씨조선은 抑佛崇儒의 政策基調로 하여 初期의 兩宗 및 僧科가 中宗代에 들어서는 그것마저 완전폐지 당하였었다. 그러나 중종재위39년에  卒하고 어린 明宗이 卽位하자 그 어머니 文定太后가 垂簾聽政하게 되어 平素 篤實하게 崇佛하던 그녀였음에 모처럼 興佛의 契機가 되었던 터였다.


  文定太后는 이에 佛門中興의 重責을 凝虛堂, 普雨禪師에게 맡겨 명종5년에 폐지되었던 禪敎兩宗을 王命으로 復興케 하고 儒林과 士大夫의 극열한 반대에도 불구, 다음해에는 普雨禪師를 判禪宗事都大禪師겸 奉恩寺 住持로 特命하고, 守眞大師를 判敎宗事都大師겸 奉仙寺住持로 任命하였으며, 또 이듬해에는 마침내 僧科마저 完全復活을 시켰던 것이었다. 이러하여 救國求族의 우리 역사본래의 護國佛敎 그 소임대로 과연 위대한 聖僧 西山大師 혜성처럼 나타나는 밑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런 迂餘曲折끝의 僧科에 大選으로 合格하고, 설흔 여섯이 된 해에 休靜은 判敎宗事都大師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敎宗首寺刹인 奉先寺의 住持도 함께 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석달 뒤에는 判禪宗師都大禪師겸 奉恩寺住持까지 겸임케 되었다. 이는 그만큼 西山의 圓覺水位와 모든 方面의 能幹이 나이와는  相關없이 높고 卓越했었음을 입증하는 일이다. 이러한 그 였기에 그 문하에는 또한 훌륭한 제자들이 수다히 쏟아져 나왔던 까닭이었다. 우선 그 유명한 四溟大師 惟政을 비롯하여 騎虛堂 靈圭 등등이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兩宗判事로서 그가 해야 할 사명을 大體로 이룩해 내자 그 막강한 권좌도 아무런 미련 없이 헌신짝인양 사임하고 홀홀히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지리산으로 돌아 왔었다. 그에게 있어서 俗人으로서의 고향은 智異山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妙香山院寂庵에서 85세를 一期로 入寂할 때까지 그는 智異山에서 金剛山으로 금강산에서 묘향산으로 그리고는 다시 되밟아오는 求道의 行路만을 따라던 것이었다. 그가 固執스러히 그렇게 한데에는 아마도 推察컨대, 이른바 三神山의 氣路를 追踏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推論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根據에서다.

  우리겨레의 오랜 哲理書인 大辯經의 五帝說主에 보면


『三神山爲天下之根山, 以三神名者蓋自上世以來咸信, 三神峰遊於此化宣三界三百六十萬之大周天, 其體不生不滅, 其用無窮無限, 其妙里有時有境, 神之之徵至縣, 神之如意自在, 終不可得以知也, 其迎也愛然以如有見, 其獻也愾然而如有聞, 其讚也肅然而如有賜, 其誓也然而如有得, 其送也恍然而如憮, 是爲萬世人民之所以認識追仰於順和信悅之域者也』


【解講) 三神山은 天氣가 下降하여 뿌리를 이룬 산이다. 조화의 氣運가운데 그 중심으로써 으뜸되는 氣(數理로 三)가 발하는 광명인 삼신을 가지고 붙여진 이름인 것인데, 대개 不自生인 圓心우로부터 내려옴으로 말마 암아 두루 밝아지는 것으로 삼신은 이것에 있다가 발산되어 圓方角의 三界로 이루어지는 360도의 원주를 圓滿시켜 萬物을 造化하여 베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 體는 不生, 不滅하는 것이고, 그 用명은 無窮 無限한 것이며, 그 原理가 스스로 調節하여 自制함은 時間과 空間이 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광명인 신의 지극히 微細함과 깊이 숨겨져 있다가 들어나는 玄妙스러움, 그리고 신의 그처럼 自在로히 제 뜻대로 함은 끝내 앎으로서 깨달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맞이할 時辰에는 眼鏡에  먼지 낀 듯 희미하게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고, 그것이 들어 바쳐올 시진에는 한숨쉬는 듯 가만스러움으로 들려옴과 같으며, 그것이 밝아지는 시진에는 기쁜 마음으로 주는 것과 같고,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期約해 줌은 肅然한대로 깨달아 알게함과 같으며, 그것을 보내는 시진에는 微妙하여 헤아려 알기 어려운 狀態중에 어루만지는 것과 같다.

  고로 이는 萬歲의 人民이 順化信悅의 境地로써 認識하여 推仰하는 것인 때문이다.】라고 說破해 놓은 바에 힘입은 것일 터이다.


  또 한편 漢나라의 司馬遷은 史記秦始皇編에서 이르기를 ‘渤海가운데에는 삼신산이 있는데,  이름 하여 봉래, 방장, 영주라 한다. 신선들이 살고 있다.’라고 하고, 또 ‘封禪書編에서는 그러한 三神山에는 不死之藥이 있다.’ 고도 하였었다. 그런데 이같은 사마천의 摘記를 두고 從來에는 金剛山을 蓬萊, 智異山을 方丈, 韓拏山을 瀛洲라고도 풀이했는가 하면, 瀛洲는 白頭山을 말한 것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런데 妙香山은 白頭山에 비춰 서쪽에 있는 白山이란 뜻으로 太白山이라하여 神聖視 하였었다.


  따라서 白頭山을 天山m로 할때 鎭山이 되어 天一로서 乾方의 北이 됨으로 그 외의 三山은 모두가 각기 東 南 西의 한 方位씩을 지키고 있는 셈이된다. 그러므로 이 세군데 산과 백두산을 모두 연결하면 우리나라 全域이 하나의 네모꼴속에 모두 드는 形局임으로 이는 곧 전국토의 主脈穴을 踏鎭한 것이 된다는 堪輿學的結論이 成立된다.


  끝으로 佛門에서 말하는 緣起의 사슬이란 因緣法을 두고 볼때에 묘향산은 그가 출생낙지한 평북 안주 고을의 배후 진산이 되고, 지리산은 진리를 圓覺하여 인생행로릐 방향을 일대전환케한 기지이며, 금강산은 그에게 전법한 은사인 영관선사가 미륵봉의 內院庵에서 면벽9년의 참선을 하고 입적한 由緖가 緣分지워진 산이기도 한 까닭에서였다고 보여진다.


  선조25년은 서산이 일흔세살이 된 해였다. 이해 4월에 느닷없이 부산에 상륙한 大兵力 의 倭軍은 新式武器인 鳥銃을 지니고 파죽지세로 北上進軍하여 한달도 체 못되는 사이에 首都 漢陽이 陷落당하고 전국토가 거의 유린당하기에 이름에 왕은 평북의주로 야간도주를 하였었다. 이에 묘향산에 은거하여 선정에 들어있던 서산은 의주로 73세의 노구를 끌고 달려가 선조를 배알하고 그 자리서 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사령을 받고 八道에 격문을 띄워 전국사찰의 僧侶義兵을 招募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전국방방곡곡에서 승군이 궐기하여 왜적과 싸우며 국토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승려의병단의 지휘자는 거의가 다 서산의 제자들이었다.


  선조26년10월에 서울이 수복되어 환도하게 되었다. 이에 팔십을 바라보는 西山은 僧軍總責을 辭意하며 산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이에 선조대왕도 더는 만류치 못하고 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尊號를 내리고 許諾하였던 것이다.

  이로 하여 西山은 野馬같은 老山僧이 되어 다시금 智異山으로 금강산으로 묘향산으로 그의 僧杖은 해저문 山嶺石徑을 타박타박 그의 如是心口相應名曰念佛을 대신하며 걸어갔던 터였다.

  

  春來草自靑(봄이 오면 풀은 절로 푸르러진다) 이고 때문에 春去草自黃(봄이 가면 풀은 절로 시들어 진다)이리라. 그러니 가고 옴이 모두 無常함이고녀! 이렇게 孤雲遊處에 西山日落 하였던 것이나 그들의 그 송고한 정신만은 지금도 壺中別有天을 감돌며 우리고장 河東을 지키고 있음이다. 그것은 바로 天符一氣인 것이다. 그런 때문에 孤雲도 또 西山도 한결같이 그것을 들어 깨우쳐 놓았던 까닭이다.


  西山은 말했다. 儒家思想이나 道家思想이나 간에 그 형태면으로 보아서는 제 각각으로 別立되어 있으나, 그 진리성에 있어서는 불가사상과 다름이 없이 하나의 진리세계에 會通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禪家龜鑑이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說破한다.

(1)『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明不得狀不得』【註)여기에 한 品物이 있으니 본래로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난일도 없었고 멸한 일도 없었으며 이름붙일 수도 없고 모양지울 수도 없는 것이다.】


(2)『然, 法有多義, 人有多義, 不妨施設』【註) 그러나 현상세계에도 여러 가지 각기 다른 제각기의 마땅함이 있고 사람을 대표로하는 生命에도 여러 가지 제각기의 다른 근거가 있으므로 방편을 베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3)『强立種種名字, 惑心惑佛惑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動念卽乘』【註) 억지로 여러 가지의 이름을 붙여서, 혹은 마음이라 하고, 혹은 부처라 하고, 혹은 중생이라 하나, 이름에 얽매어서 알음알이(理解)를 내어서는 아니 되며, 그대로가 옳은 것임으로 생각을 움직이면, 움직인 즉시 곧 어그러지게 되는 것이다.】


(4)『一物上强立之名字者, 敎之不得已也, 不可守名生解者, 亦禪之不得已也』【註) 그 하나의 品物에다가 억지로 그 이름을 붙인 것은 그르침의 어쩔 수 없음인 것이고, 이름에 얽매어 알음알이(理解)를 내는 것도 또한 고요한 冥想을 통한 깨달음을 위한 화두로서 어쩔 수 없음인 것이다.】


  한편, 그는 그의 儒家龜鑑이란 저서를 통해서 이렇게 說破했던 바이다.

(1)『孔子曰天何言哉, 董仲舒曰道之大源出於天, 蔡沈曰天者嚴其心之所自出, 此卽周茂叔所謂無極而太極也』【공자는 하늘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동중서는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채침은 하늘이란 존엄한 마음이 나온 곳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주무숙(주돈이)의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하는 것이다】


(2)『書傳序曰精一執中, 堯舜禹相傳之心法也, 建中建極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 曰德曰仁曰敬曰誠言雖殊而里則一, 無非所以明心之妙也, 呼, 心之德其盛矣乎』【서전의 서문에 아주정교하고 한결같아 중용을 지킨다고 한 것은 요임금과 순임금과 우임금이 서로 전한 마음의 법이다. 중(中道)을 세우고 극(標準)을 세운다는 것은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이 서로 전한 心法이다. 덕이니 인이니 경이니 성이니 하는 것은 말은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로서 모두 이마음의 오묘함을 밝히지 않은 것은 없다. 아! 마음의 덕은 참으로 크구나!】


(3)『中庸性道敎三句, 亦名異實同, 體用備焉, 此乃孔子傳授心法』【중용에 있는 성 도 교라한 세어구도 또한 그이름은 다르나 내용은 같으며, 體와 用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공자와 맹자가 전수한 心法이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한편, 그는 道家龜鑑이란 著書를 통해서는 또 이렇게 밝혀 놓은 것이다.

(1)『有物運成先天地生, 至大至妙至虛至靈, 浩浩蕩蕩 歷歷明明 方隅不可定其居, 劫數不能窮其壽, 吾不知其名强名曰心』【어떤 品物이 모든 것을 모아 이루어져 天과 地에 앞서서 생겼으니, 지극히 크고 지극히 묘하며 지극히 虛하고 지극히 신령하며, 한없이 넓고 한없이 또렷하게 밝히며, 방위로도 그 장소를 정할 수가 없고, 劫의 數로도 그 수명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이름을 알 수가 없어서 억지로 이름 붙여 마음이라 한다】


(2)『亦曰谷神(虛明靈妙), 遂爲三才之本, 萬物之妙, 有明無明, 有念無念, 同出於斯, 故曰玄之又玄衆妙之門』【또한 谷神(谷은 虛明으로 비고 밝다는 뜻. 신은 靈妙로서 신령스럽고 묘하다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三才(天地人)의 근본이 되고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름이 있고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고 없는 것이나 모두가 다 함께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심오하고 또 심오하여 온갖 오묘한 진리의 문이라고 한 것이다.】


(3)『體曰道 用曰德, 用無體不妙 體無用不生, 故備掌道德諸捨諸緣, 以觀其妙』【그 본체를 도라 하고, 그 작용을 덕이라 한다. 작용이 없으면 그 본체가 묘하지 않고, 본체가 없으면 작용이 생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도와 덕을 갖추어 들었으니, 부디 모든 인연을 버리고 그 오묘한 이치를 관찰하라.】고 말하고 또 덧붙여 이 마음은 천지의 여관이며,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다. 이 마음은 나온 근본도 없고 들어가는 구멍도 없으며, 실지로 있으면서도 그 거처가 없으나 항상 動用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西山의 思念은 곧 바로 先代의 孤雲에 있어서의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의 觀點이나 다름이 없이 한결같은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겨레 上古眞經 天符經이 일찍이 밝혀놓은 우주의 근본인 眞如로서의 天符一氣라는 것이다. 이 같은 천부일기가 늘 변함없이 흐르고 있음이 文化의 根脈이 되는 常理이다.


  이에 河東文化의 그러한 根脈도 늘 常存함으로서 때가 되면 꽃을 활작 피워내는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