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流仙脈 智異河東』論

  諸 相 宰   

 

                                五. 春來草自請의 章


  봄이 오면 풀은 절로 푸르러진다. 이는 自然의 理法이다. 朝鮮朝五百年을 통해 顯名을 靑史에 길이 남긴 儒林巨脈 尤庵 宋時烈이 그 같은 自然을 읊은 時調를 남겼던 까닭이었다.

  靑山은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절로 水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그 中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그런데 그 같은 自然이란 天然(大一인 元氣가 作動하여 펼쳐져 그럴 연해진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찍이 老子는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註)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道를 본받는데 道는 自然을 본받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自然이라 하여 어떠한 整序의 틀(匱)이 없이 마구잡이는 결코 아닌 것이다.


  自然의 常理는 이른바 五行과 七政인 것이니, 五行은 先天易數라 하는 것이며, 七政은 後天易數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先天易數는 數理的으로는 生數 1(一), 2(二), 3(三), 4(四), 5(五) 로써 그 展開, 收縮의 變化를 나타내 보이는 理法이고, 後天易數는 萬變의 圖形的立體論으로서 同心圓의 原理를 나타낸 理法인 것이다.


  이러한 無而有的象(없는듯 한 것으로써 들어나지 않은 채 있는 모습의 들어나는 조짐) 으로서의 天地造化의 徵候를 그 같은 數理的掛圖로서 有相的體系를 만들어 世上에 敎示하여 流布시킨 先覺者는 世稱 太昊 伏羲였었다.


  우리겨레의 上古史書인 朝代記에 따르면 桓雄天皇으로부터 5세를 전해와 太候儀桓雄이 있었다. 아들 12인이 있었는데, 長子를 多儀發桓雄이라 하고, 季子를 太昊라 하였다. 太昊는  號를 伏羲라 하였으니, 어느날 꿈에 山神이 몸에 降靈하여 萬里를 洞徹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三神山(白頭山)에가서 하늘에 祭祀를 지내게 하여 天河(天池)에서 掛圖를 얻었는데, 三絶三緣하여 換位推理하면 모하게도 三極(天地人)을 품고 있어 그 변화가 무궁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는 太昊 伏羲가 白頭山天地淵邊에서 天符經을 究理하여 先天八卦를 비로소 體系化함으로써 世傳케 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겨레의 上古眞經인 天符經에 밝혀 놓기를

  첫 째『一始無始, 一析三極, 無盡本』【解講) 지극히 작아서 그體조차 없는 것 같은 小一이 모이고 쌓여서 또한 무한 스럽게 큰 大一을 이루나니. 소일이 대일로 聚凝되는 그 첫 움직임은 없는 듯 있고, 있는듯 없는 그런 始動인 것이니라. 이러한 根源인 大一의 始動은 作裂하여 모든 兆朕이나 모든 品物을 造化해내는 그 中心이 되는 標準의 氣運으로 擴散하였나니, 그러한 造化의 활력은 陰과 陽이란 어긋맞은 두 氣運으로 하여 陰氣가 한번 움직여 安靜을 이루었다가 至極해져 陽氣가 한번 極盛스러히 作動하는 갈음질이 그 本相이 되었느니라.】


  둘 째『天一一, 地一二, 人一三』【解講) 天道는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지 않은 데가 없이 새처럼 날아 스스로 나아가서 새로운 造化의 일을 하며 돌고 도는 普圓(無極而太極)이 되고, 地道는 두텁게 갈아 앉아 넉넉하게 불어나게 하는 씨눈(種)을 기르는 胎盤으로써 돌고 도는 效圓이 되며, 人道는 그 普圓과 效圓이 널리 어울리어 하나가 된 가운데서 가려내져 뽑힌 生命이 돌고 도는 擇圓을 이룸이니 이는 또한 그 바로 正 反 合 하는 圓, 方, 角의 同心圓을 이룸이니라.】


  셋 째『一積十鉅, 無匱化三』【解講) 그처럼 小一이 모이고 쌓여 大一이 됨으로써 밀고(推;動) 당기는(引;靜) 들쑥날쑥속에서 完成(鉅)을 이루나니. 그것은 또한 없는듯 있고 있는듯 없는 틀(匱)을 지어 萬象萬物造化의 氣運의 中心標準을 이룩하는 것이니라.】


  넷 째『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解講) 天道에도 늘 反極하는 搖動 끝에 融合을 통해 이뤄지는 그런 調和的氣運의 中心되는 標準이 있고, 地道, 人道에도 한결같이 제각기 있나니 그것들이 죄다 한데 聚合되어 絶對安靜의 母體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造化生成의 週期度率이 暗中에 作動하여 東西南北四方과 四間方의 八方으로 짜여지는 空間위에 春夏秋冬四時와 春分夏至 秋分冬至의 四季그리고 晝夜十二時의 時間이 一切現象을 現出시키는 가운데 四象體質의 形形色色인 生命體들이 存在케 됨으로써 完成態를 이룩 하느니라.】


  다섯째『運三四成, 環五七, 一妙衍, 萬王萬來』【解講) 이같은 造化現象은 모든 것이 造化氣運의 中心이 되는 標準이 그 能力을 發動시켜 베풀어지는 본바탕을 이룩함인 것이고 그러한 能力의 發動은 先天的으로 水, 木, 火, 金, 土란 五才의 行이 나타내는 相生相克에 의하고 後天的으로는 日月五星이란 七曜의 七政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임이니라. 이로써 그 原根인 大一이 玄妙하게 불어나서 萬가지가 가고(往) 오는(來) 重重無盡의 世上을 만든 것이니라.】라고 하였던 바다.


  이 같은 天符經의 妙理를 터득한 이른바 太昊 伏羲가 三絶(三三坤卦 : 陰氣의 凝結)과 三緣(三乾卦 : 陽氣의 凝結)의 卦象을 創案하고 그것의 各各인 卦爻들을 換位(互體半象의 原理의 活用)함으로써 推理하여 迷惑수러운 易相을 感知하는데 援用하게 하였었다. 이것이 이른바 伏羲先天八卦라 하는 易理이다.


  이러한 伏羲는 密記에 의하면 神市(桓雄天皇께서 다스리던 倍達國시대의 開明天地)에 태어나서 雨師의 職責을 맡아 그 所任을 다하고 서쪽 邊方 陳留에 封해져 立號하였었다고 記述되어 있다. 그런데 이 伏羲의 封地인 陳留는 黃河의 支流인 渭水가 흐르는 東쪽 流域에 자리하고 있었던 오늘날의 中原땅, 山西省平陽府安邑이었는데 그 後代에 이르러 이곳의 地名을 河東이라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河東은 銀河水를 象徵하는 黃河의 河로 認識하여 認識하여 곧 銀河의 東쪽 땅 이란 뜻으로 부르게 된 緣由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러한 銀河가 天上으로부터 地上에 내려서 水源이 되고 그 奚摩籬(蓋馬의 뜻. 곧 頭가됨)로부터 흘러내린 山이라 하여 頭流山이란 山名이 생기는데 奚摩籬는 곧 白까닭은 예전에 있어서 智는 곧 奚摩籬였고, 異는 分流(나뉘어져 흐르다)였던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든 條件들의 考證을 두고 볼 때에 바로 우리고장 河東이 靈山 智異의 西南麓으로서 孤雲을 비롯하여 西山등 수많은 顯名隱名의 賢士志師들이 雲集될 수밖에 없었던 이른바 우리 古來本源의 仙脈때문이었음을 凡常히 보고 넘겨버려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겨레의 國祖 檀君桓儉께서 이른바 우리들의 先民 九桓六十四氏族十二夫族을 다시금 통합하여 世界人類史上初有로 大民族國家로서 東方大帝國을 開天하셨을 때 오늘날의 滿洲一帶와 蒙古全域은 이른바 辰韓이라 이름하는 天皇直轄圈으로 하시고 瞭河 以西地方은 番韓이라 이름 하는 自治委任圈으로 하되 神市系列의 後裔들로써 王侯를 封하여 一定 地域의 部族親屬部落을 管掌케 하였었다. 이로써 唐堯, 虞舜 등이 있게 된 來歷이다. 그리고 漢水(아리수 : 오늘날의 압록강과 두만강)以南과 日本列島는 馬韓이라 이름 하여 雲師 倍達臣에게 總管의 責任을 맡겨서 그 倍達臣의 뜻을 받는 臣志들로써 委任自治케 하였었다. 이것이 國祖 檀君桓儉의 三韓管境制였다.

  

  이는 人物이 다 같이 삼진을 받았으나 오직 사람만이 땅에서 迷惑하여 三妄이 着根한다. 眞과 妄이 對하여 三途를 만드니 父道(父系中心社會의 攝理)의 法은 天이 眞一하여 거짓이 없고, 師道의 法은 地가 勤一하여 게으름이 없고, 君道의 法은 人이 協一하여 어김없다는 帝의 神明한 治道哲理에 말미암음이었다. 이러한 三韓時代에 이미 우리 故場을 韓多沙라 命名하였던 터이니, 그 自體가 곧 미리내덮개로 태어난 뭇 生靈들이란 뜻이었다.(韓은 井橋로써 미리내덮개란 뜻이고, 多는 衆, 沙는 生命 또는 生靈이란 뜻임) 이렇듯 天氣가 흐르곳 곧 그곳이 仙脈의 本故場 아닐리 있을 텐가!


  關西地方은 寒帶氣候에 들어 있었지만 등 뒤의 우람스러운 妙香山脈이 滿洲벌의 朔風이 몰아오는 冷氣를 調和시키는 머리에 平安道의 안주 고을은 三冬이라해도 그닥 꽁꽁스럽게 얼어붙지는 않는 편이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고을이 白布를 덮어놓은 듯 하얗게 잠겨 있었건만, 밤 지새가며 밑천 다 날려 버리고 멍청해진 노름꾼 꺾다리같이 아직도 성긴 눈발이 꺼벙하게 오락가락거리고 있는 한나절이었다.


  安州고을 官衙 東軒의 대청마루 곁 舍廊에는 고을원님 李思曾을 中心하여 左右로 두서너 사람 道袍客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리고 李思曾원님 바로 앞 두세자 발치에는 여남은 살이 될둥말둥한 수수한 옷차림의 어린 소년하나도 꿇어 앉아 있었다. 少年은 그를 향해 눈길들을 보내고 있는 그 어른들을 잠깐 둘러보며 무슨 영문인가? 하는 의아로움이 얼핏 비췄을 뿐 티 없이 해맑은 눈동자에는 겁보다는 영롱스런 聰氣만 빤작거리고 있었다.


  仁慈로운 微笑를 흘리며 이윽고 원님 李四曾이 가만가만 입을 떼었다.

  『그래, 아가 네가 전에 鄕官을 지낸 崔德老의 晩得子 汝信이란 아이냐?』

  『예에 그러하옵니다.』

  『호오! 그러면 너희 本貫이 어딘지를 아느냐?』

  『예에 完山이옵니다.』

  少年의 應對는 조그마한 구김살 하나 없이 천길 낭떠리지에서 떨어지는 瀑布水만큼이나 그 목소리가 淸亮하기만 했다.

  고을원 李思曾은 마음속에 한없이 대견스럽다는 親念이 스몄다.

  『그러면 지금 몇 살인고오?』

  『예에 이제 마악 열 살 들었아옵니다.』

  『그래에? 열 살이라 열 살. 흐음…, 헌데 듣자하니 네가 詩文에 그리도 뛰어났다던데 그래 오늘 나랑 風音을 한번 해 보겠느냐?』

  『下命하옵시면 재주껏 응하겠아옵니다.』

  『기특허고나! 그러면 내가 韻자을 부를 테니 네가 和答토록 해 봐라!』

   그러고서 고을원 李思曾은 다시한번 대견해하는 눈빛으로 둘러앉은 來客들을 돌아보았다. 來客들 조차도 나 어린 少年의 그렇듯한 聰氣와 沈着스러움에 하나같이 歎服하고 있는 눈치들이었다.

  고을원 李思曾은 묵직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斜!하고 韻을 불렀다. 그러자 少年 汝信이 조금의 서슴도 없이 잽싸게

  『香凝高閣日初斜』(향내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처음 비꼈는데) 하고 七言絶句를 소리 똑똑히 朗誦했다. 이에 고을원 이사증이 놀란듯한 목소리로 花! 하고 다음 韻字를 불렀다.

  이번에도 소년은 고을원의 운자 부름의 餘韻이 다 가시기도 전에 대뜸

  『千里江山雪若花』(천리강산에 내린 눈이 꽃과 같구나)라고 應答 했다.

  그러자 고을원 이사증이 엎어지듯 다가와 소년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아 가슴에 끌어안으며, 오호! 과연 名不虛傳이로고! 기특하고 훌륭하다. 훌륭해! 내 아들아! 흥겹도록 대견스러워 어쩔줄을 몰라했다.


   天賦의 聰氣를 지니고 있는 소년이 선조25년 임진4월에 일어난 壬辰倭亂때에 風前燈火같았던 이 민족을 求命圖生시킨 聖僧 西山大師 淸虛 休靜 이었다. 西山의 兒名이 汝信이었고, 完山崔氏로 外家는 漢南金氏로 親家의 原鄕은 漢陽 東門밖의 沙川邊(安岩川)이었는데 代代로 儒學을 닦아온 士大夫였다. 그런데 縣尹벼슬을 하던 그의 外祖父 金禹가 연산군 4년 戊午士禍 당시 燕山君에게 죄를 얻어 平北 安能으로 流配될 때에 三族을 더불어 懲治했던 責罰制에 따라 그의 아버지 崔世昌도 함께 流配되었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中宗反正이 일어나고 연산군이 失脚함에 그의 집안을 얽어매었던 귀양살이는 풀려 외조부는 다시 관로에 복귀했으나 그의 친가는 풍물 좋고 넉넉한 安州땅에 그대로 주저앉아 關西地方百姓이 되었었다.


  그의 아버지 崔世昌은 豪傑風의 風流男兒로 평생을 벗님네들과 어울려 詩나 읊조리며 남의 어려운 사정 돌보기에 봉사했을 뿐 家事는 그의 어머니 한남김씨가 모두 도맡아 꾸려가며 그런 지아비의 뒷수발까지 군소리 없이 다 하였다. 이런 아버지는 관아에서 請하는 箕子影殿의 監官(參奉) 벼슬도 拒絶했는데 말하기를 정든 산촌의 풍정에 한 병의 막걸리와 처자식들의 즐거워하는 마음이 내 분수에 만족할 따름이오.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繼起하는 사화의 와중에서 부패해 가는 사대부들의 망국적 기강해이에 대한 환멸을 느낀 탓이었다.

   

  그러나 고을주민들의 강청만은 차마 뿌리칠 수 없어 鄕官은 맡아 고을백성들의 相談役이 되어 주었었다. 이로 인하여 德老라는 號稱을 얻게 되었던 것이었다. 西山은 이러한 집에서 同甲이었던 그의 부모가 四十七歲된해 3月에 四男妹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던 터였다.

  晩得子라 유달리 貴愛하는 그의 아버지 德老가 西山이 세 살 된 해 어느 봄날 樓閣에 데리고 가 閒遊하던중 노곤한 春困의 南柯一夢을 꾸었는데 한 백발노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애기스님(小沙門)을 만나러왔소’하고는 뜰에 놀고 있는 汝信을 덥석 보듬아 치켜들고서 알아들을 수 없는 念佛을 중얼거린 뒤 도로 내려놓으며 ‘너의 이름은 雲鶴 두 글자로 삼아 앞으로는 珍重하고 珍重토록 하거라!’ 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버지 德老가 그 노인장을 잡고 묻기를 雲鶴이란 뜻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더니, 노인장이 답하기를 장차 이아이의 한평생 살아감이 그름과 같고 학과 같을 것이오! 하고는 가버리는 터였다.


  이런 雲鶴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孤德스러히 한해간격으로 그의 兩親父母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운학을 그 고을원 李思曾이 그 재주를 아껴 친아들처럼 거두어서 內職이 되어 상경하자 함께 다리고 와 西山의 서울생활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가 서울에 와 두해가 지나 열 두 살 되던 때 李思曾은 그를 성균관의 泮齊에 入學케 하였었다. 그런데 아직도 稚氣를 벗지 못한 어린 雲鶴은 勉學보다는 또래의 學童들과 어울려 한양거리 구경다니기에 더 열심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雲鶴은 生前不面識의 老學士 한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 老學士는 운학을 행하여 ‘애야, 너 나를 알아보겠느냐? 너의 安胎本이 여기서 멀지가 않단다. 너의 선친은 나와 莫逆한 사이였으니 내가 너를 모른척할 수가 없구나.’ 하고는 그의 先祖가 살았다는 곳을 알려주겠다면서 운학을 데리고 갔다. 興仁門(東大門)밖으로 나가 한참을 가자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沙川邊(安岩川;龍頭洞)의 언덕을 기리키며 ‘여기가 바로 너의 아버지의 옛집터였느니라.’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 崔世昌은 安州로 귀양 가기전 바로 이곳에서 살았다는 말이었다.


  그런일이 있은 얼마뒤에 그 老學士는 바로 그 자리에 두어 칸 크기의 서당을 짓고는 雲鶴을 爲始한 5, 6명의 學童을 불러모아 至誠껏 글을 가르쳤다. 이에 놀기 좋아하든 어린소년 雲鶴도 옛 자기네의 집터에 다시 세워진 學堂이란 색다른 感懷때문 이었던지 日久月深으로 열심히 글을 읽어갔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 되었을 때 중종29년 8월 謁聖科를 보게 되었다. 타고난 재질을 바탕으로 不撤晝夜 닦아온 學問에 少年雲鶴은 靑雲의 꿈이 衝天해 있었다. 그러나 希望과는 달리 落榜이 되고 말았다. 自信感과 抱負로 한껏 충만되고 팽창되어 있던 소년의 마음은 격심한 충격과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이에 雲鶴은 몇몇 벗들과 相議한 끝에 그 노학사 스승이 마침 家門事로 하여 下京해 있는 湖南地方으로 洗心遊覽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人間世事는 塞翁之馬런가. 소년 운학이 이 洗心遊覽의 行步가 그의 天生佛緣을 顯色케한 運命的契機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며 天心이 按配해 놓은 民族圖生의 遠謀妙計의 天羅地網일줄은 더더구나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少年雲鶴의 一行은 그길로 전라도 求禮郡땅의 頭流山西麓의 華崇洞溪谷으로 들게 되었다. 그곳에는 古刹 華嚴寺가 불무잔등이에서 조금더 西向한 지리산 천황봉 뫼줄기가 시암재 영마루에서 반야봉으로 갈라져 나가는 어우름의 문수골등마루 西麓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맞은편 뫼줄기가 바로 불무잔등이로 그 대머리는 老姑壇이요, 그 또 東便기슭은 燕谷寺가 있는 燕谷洞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老姑壇, 그 영마루가 소년 운학이 언젠가 꼭 한번은 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老姑壇은 麻姑를 모셔서 祭올리는 祈壇이 설치되어 있었던 곳이란 來歷에서 불려진 이름이었다. 이른바 麻姑前說은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 일대에 예부터 口傳되어 민간에 퍼져있었고, 神仙通鑑에도 記述되어 있지를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신라초기의 大碩學이자 불멸의 충신이었던 朴提上선생의 유저 潧心錄에는 보다 더 實史的인 民族崇仰神으로 記述되기까지 않았던가. 소년 雲鶴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라한 옛날 宇宙의 大始에 하늘과 맞닿은 天柱山 頂上에 麻姑가 居處하는 麻姑城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實達城과 虛達城이 있는 가운데 그 허달성을 마주한 실달성에 뭇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달성의 사람들은 네 부족으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것인데 黃穹族, 藍穹族, 赤巢族, 白巢族이었었다.


  이들은 모두가 그 麻姑宮으로부터 지하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地乳를 配分받아 먹고사는 터수였다. 그런 어느 때 有巢氏가 그 地乳의 배급차례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자기의 巢處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핏 잠결에도 어디선가 달콤한 果實익는 향 내음이 허기진 그의 코 속을 갈근갈근 후벼들고 있었다. 퍼뜩! 잠을 깨보니 자기 巢處 기둥가사리에 뱀처럼 칭칭 감겨 올라온 萄木(포도넝쿨)에 자주색열매가 탐스럽게 익어 짙은 향내를 풍기고 있는 게 아닌가! 허기진 유소씨는 그 과실을 잡히는 대로 몽땅 따먹고 말았다. 그러자 몸이 허공중에 붕붕 뜨는 것 같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봄눈 녹듯 사그라진 황홀극치의 기분이 되어 저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근심스레 採根을 해 물었다. 이에 유소씨는 내말을 들어보라 하고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들려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地乳만으로 어딘가 未洽하던 欲求였는지라 그길로 너도 나도 陶木으로 달려가 그 陶實을 따먹기에 餘念이 없었다. 그런 뒤 모두가 취하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狂亂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 麻姑의 麻姑城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실달성마져 허물어 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제사 사람들은 놀라서 우왕좌왕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던 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四方八處로 흩어져 살길을 찾던 四部族族長들이 연석회합을 갖고 罪惡을 贖罪하여 麻姑城이 다시 보디대로 나타나도록 사라진 實達城을 재건하자고 誓盟하여 그것을 多勿의 精神이라고 銘念키로 했더란 것이었다. 이러한 多勿의 精神이 고구려 태조 高朱蒙의 建國精神이요 年號가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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