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流仙脈 智異河東』論

  諸 相 宰   


                                       
 四. 空手來 空手去의 章


  碧霄嶺 마루터기에 솔바람 타고 白雪이 紛紛하더니, 그 눈발처럼 孤雲은 西山日落의 노을 속으로 蹤迹없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春風秋雨 그 雨露위에 六百餘年의 말없는 세월이 흘렀다. “根本을 잊을 수 있으리요!” 해서 돌아왔던 故國山川이었다. 그러나 腐敗될대로 腐敗되어 亡國의 徵候마저 들어내며 득실대는 그 故國이란 그릇은 그를 容納하질 않았다. 차라리 용납할 수가 없게되어 있었다.


  모르랑, 모르랑, 담배가치 꼬투리에 피어난 紫煙처럼 그는 八道雲遊가운데 끝내 碧霄嶺마루를 넘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한조각 구름이 된 것이었다. 그런 孤雲이 비워놓은 花開洞天기슭마다 헬 수 없이 울려 퍼진 梵鐘소리, 그 메아리만 空虛히 지고 돌아오는 山僧의 발자취들이 三法印의 授記를 남기고 있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一切皆空 의 般若心經 念佛소리가 寂寞한 山谷을 어루만질 뿐이든 터다. 諸行이 無常하고, 諸法 또한 無我하여 一切가 皆苦인데 念佛은 무슨 所用일고… 我空, 法空, 俱空으로 一切가 皆空 아니든가? 그런 壺中別有天花開洞중의 하나 범왕골 기슭에 터 내린 雲上仙院 七佛庵을 내려오는 弱冠未滿의 少年行者 하나이, 그닥 바쁠 것 없는 듯한 悠悠自適 가운데서도 잰걸음을 떼놓고 있었다.


  때는 李氏朝鮮朝 中宗33年 2月 初春(西紀1518年)이었다. 이작도 녹아내릴 어두마져 낼 수 없었던지 기슭에는 白花積雪이 銀嶺을 이루었는데, 그 속에서도 天地造化는 二十四花信風을 불게하여 옹달쪽 비탈 군데군데 雪中玉梅가 연분홍꽃망울을 수집은 듯 붉히고 있었다.

  少年行者는 두툼한 길버선 발목을 감발로 단단히 감고, 눈덧신 발길을 재면서 날아갈듯 개운한 기분을 감출 수없는듯해 보였다. 그런 興趣를 못내 참지 못한 듯, 한 首의 詩를 소리 내어 朗誦했다.

  『其止也如如, 其行也徐徐, 仰止而笑, 附之而噓, 出入兮無門, 天地兮籧盧』

 【註) 그 머무름도 나고 죽음 없는 眞如 그것이고, 그 行함도 거기 따라 거고 옴이 悠悠하다. 우러러선 웃음 짓고, 구부려선 한숨 쉬네. 出入에 문이 없고, 天地는 모두 居處할 집 일 네라.】


  오!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아직도 솜털가시지 않은 것 같기만 한 弱冠未滿의 少年行者의 입을 통해 나온 詩句는 그 바로 大方廣不華嚴境地를 得志한 戒頌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少年行者는 바로 華嚴經속의 善財童子의 化身이란 말인가? 이 疑問을 가려내기 위해 흘려버린 옛일들을 더듬어 따라 가보자.


  지금으로부터 六千年을 거슬러 가보면 오늘날의 印度 西北部平原인 카시미르에는 그보다 더 아득한 옛날인 二萬餘年을 앞선 때에 東方의 위대한 어머니의 나라로부터 온 釋提桓仁께서 오늘날 中原땅의 甘肅省靈臺縣 周邊의 原始群集人種들을 敎化習服시켜 父系社會의 氏族集團을 이룩시켰던 터이니 이로써 우리겨레 先民인 이른바 九桓六十四氏族十二部族 中의 한 部族 須密 爾族이 그 親屬部落群을 形成하고 살았던 텃수였다. 그런데 이들 氏族의 子孫들이 점점더 불어나서 擴充됨에 따라 더 서남쪽으로 옮겨가 유프라테스 江流域인 메소포타미아 地方의 妙高山(스메루山)을 중심하여 찬연히 새로운 文明國 스메루(Sumer)를 建立하였었다. 그러나 二千餘年이 흐른 뒤 어느 때 폭풍처럼 밀어닥친 돌궐족(흉노족)들에 의하여 무너지고 그들은 뿔뿔이 나뉘어져서 그중 한 派는 오늘날의 中東아시아지역으로 가 바빌로니아王國을 다시 일으켰고, 그 또한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南下하여 城郭都市國家形態인 가비라 왕국을 세웠던 터였다.


  그 가비라 王國의 淨飯王의 王子로 태어난 「고다마 싯달타」는 어느날 城中市井에서 葬事行列과 늙고 병든 사람들을 보고 돌아와 「人生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왜 사람은 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일까?」하는 심각한 懷疑에 빠져들기 시작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끝내 四圍가 괴괴히 잠든 틈을 잡아 城砦를 몰래 타고 넘어 그 이른바 妙高山깊은 雪谷으로 苦行修道를 위해 潛跡해 버렸었다.


  그로부터 六年間 그는 粉骨碎身의 正思惟에 의한 집요한 參禪 끝에 섣달초여드렛날 새벽 啓明星이 曜曜히 밝는 時辰에 마침내 大悟覺醒하였던 터이니 곧 부처(佛陀)였던 것이다. 한갓되고 窮僻한 草原의 한 城都 迦毘羅國의 王子이든 「고다마 싯달타」가 宇宙自體의 神 즉, 光明인 부처(佛陀)가 되는 時辰은 곧 그 바로 宇宙 그 自體를 깨달은 瞬間이었고, 여기서 宇宙란 또한 그 바로 時間과 空間이 圓融되는 刹那(梵語로 Ksana 곧 ‘梵’)였었다.


  이것이 또한 그 바로 大方廣佛華嚴의 境地이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逆行시켜서 返本하면 한 点에 歸納되는 것이니 그 歸納된 一點이 곧 空인 것이고, 一切萬象萬物의 本源이고 一切生命이 現出하는 生生死死의 根本인 本佛生의 眞如 그것인 것이다.


  여기서 『眞如』【註) 西洋哲學이 追究하는 이른바 眞實在, 칸트는 이를 X(不知)라 하고 事物自體라 한 것임. 그리고 니체는 이를 超人이라 했으며, 이에 의하여 永遠回歸한다한 것임.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萬有라 했고, 이것으로부터 이른바 形相과 質料가 發出되어 나와 無限한 現象界가 펼쳐진다한 것이다. 대문에 쇼펜하우어는 現象界를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세계라 한 것이었음.】는 그 自體가 이른바 本佛生으로서 原來가 生도, 滅도 없는 境地인 것이다. 그러므로 本佛生인 眞如는 마땅히 不生이고 더불어 不死인 것이다. 그 같은 眞如가 그 自體不生임으로하여 他者的으로는 生生하는 까닭이며, 不生임으로하여 他者的으로 死死즉 殺生하는 까닭의 이른바 生殺與奪의 權能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眞如는 곧 圓心인 것이며, 그 圓心으로부터 形體도 없고, 香色도 없는채로 發散되어 나오는 元氣가 膨脹하고 牽引하는 動力學的作用의 하나 이고도 큰 틀(匱)인 것이다. 그러므로 一切皆空이라 함이며, 一切唯心造라 함인 것이다. 이 要諦가 곧 大方廣佛華嚴의 境地였다.


  이 같은 華嚴世界의 境地는 그 淵源으로 거슬러가 省察해 보면 곧바로 우리겨레 太始祖께서 남기신 진경 天符經에 그 源泉이 있음이다. 즉, 天符經에 밝혀놓으시되, 『一始無始, 一析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匱化三』이라 하였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함으로 世傳에 人生은 空手來 空手去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空手來空手去란 命題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뜻풀이로 인식하고 설파하는 짓은 전혀 틀렸다고 함이 아니나, 너무 俗說스러운 것임을 똑바로 더불어서 올바르게 認識해야 한다. 그리하여 절대로 虛無主義에 沈潛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깊이 諦觀해 보자면 이른바 그 空手來는 眞如인바 圓心에서 發해지는 元氣의 膨脹(遠心力)을 가리킴이고, 空手去는 眞如인 圓心으로 牽引되는 元氣의 返本(求心力)을 가리킨 지극히 深奧한 玄義의 絶句인 것이다.


  이로 볼때 佛敎가 오늘날 誤認된 대로 결단코 虛無主義的否定觀일 수 없음이 自明해지는게며, 그것은 또한 우리겨레의 玄妙之道인 神仙圖의 한 翼端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雲上仙院 七佛庵을 下山하는 少年行者의 奮氣된 戒訟이 이같이 심오한 華嚴의 境地에 接近되어 있음은 그런 때문에 놀랍지 않을 수 없는 境地였다. 이러한 少年行者가 그 바로 壬亂時民族의 危急을 打開하고 廣濟하였던 活佛인 西山大師 休靜 淸虛였다.


  西山의 思惟는 단순한 一個僧徒에 局限됨이 아니고, 儒 佛 道 三敎를 모두 攝受한 圓融의 우리겨레 固有의 神仙道에 達觀된 一以貫之의 境地였었다. 때문에 禪劍一體觀으로써 終始流轉觀을 통한 國難有備의 先見之明을 發現하였던 터였다.

 이런 측면에서 이제 위대한 禪僧 西山大師의 生涯를 追考해 보지 않을 수 없다할 것이다. 작히나 禪師의 그 得道가 德氣로써 바로 우리의 故場 河東에 緣脈되어 있음에랴!
다음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