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流仙脈 智異河東』論


諸 相 宰

                            三. 命寄刳木의 章


  命寄刳木이란 絶句는 孤雲 崔致元先生이 남긴 雙溪寺의 國寶第47號 眞鑑禪師頌德碑가운데 驅使된 말이다. 그러나 원래 이 말은 周易에서 引用된 것으로서 周易繫辭專下篇에 보면 刳木爲舟, 剡木爲楫라는 句節로 表記되어 있는 것이다. 孤雲의 그 獨特한 文章技法인 駢麗文體는 그처럼 한마디 한 句節마다 모두 古典으로부터 引用하여 玄義롭게 驅使한 것을 그 特色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한 까닭은 孤雲이 習得한 그 騈麗文體가 바로 上古以來의 金石文이었던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짧고 좁은 餘白에다 無限한 感想이나 思想을 낱낱이 다 摘記할 수는 없는 制約性때문에서 였다. 그러므로 孤雲의 文章속의 한 자 한 구절은 제각기 先代高人이나 先覺者가 이미 所論한 絶句 또는 槪念을 引用, 그것을 全體的인 틀속의 自記思想으로 昇化시켜 놓은 玄義로운 調和로써 짜놓은 것이다. 때문에 孤雲의 文章은 홑으로 보는 一般漢文에 接近하는 方式으로 對하여서는 本義아닌 誤謬를 犯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로 그 眞鑑禪師頌德碑文을 두고 볼 때에도 오늘날 世間의 譯文들 중 일부는 그러한 誤謬에 沈潛되어 있는 것도 더러 있다 할 것이다. 眞鑑禪師頌德碑文中에서 誤謬를 犯그하기 쉬운 例證을 몇 가지 列擧해보자면;

①夫道不遠人; 子思의 中庸 제13장의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引用

②心顯寶洲; 唐僧 玄獎의 大唐西域記의 『南瞻部洲, 地有四洲, 北馬主, 東人主, 西寶主, 上則印度, 馬則突闕, 人則中夏, 寶則胡國也』引用

③許往實貴; 壯子 德充符 『虛而往, 實而歸』

④先難後獲; 孔子 論語 ‘雍也’ 編 『樊遲問仁, 子曰, 先難而後獲, 可謂仁矣』

⑤黙對文殊; 維摩經의 『文殊舍利問維摩詰~時維摩詰黙然無言』

⑥憧憧; 周易 咸卦文言傳『憧憧往來, 朋從爾思』

⑦斷金爲心; 周易 繫辭傳上編 『二人同心其利斷金』

⑧適足爲自哇之玷; 詩經 大雅 抑 編中 『自哇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⑨未能盡醉衢罇; 淮南子 繆稱訓 編 『聖人之道, 猶中衢而致罇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名得其所宜, 是故得一人, 所以得白人也』등등이다.


  이처럼 孤雲의 文章은 지극히 難解하달 地境으로 玄義롭게 該博精深한 것이다. 그러나마 그 正鵠을 認識하고 나면 一瀉千里로 쉽게 解義되는 것이 또한 孤雲의 文言인 것이다. 그 까닭은 宇宙란 것이 그 自體, 이런바 一妙衍萬往萬來【註) 시원인 하나가 현묘하게 불어나서 만가지로 가고 오는 것】인 것인데 있다.

  

  오, 學問의 深奧함이여! 三生을 거듭 산대해도 다 할 바 없음이로다! 그렇지만, 千古의 奇才 崔孤雲先生, 그의 그 解脫된 圓覺의 靜學을 우리의 그 바로 鄕里에 고스란히 묻어두고 있음이여! 이 얼마나 天惠로운지고! 이러한 孤雲선생의 一生을 여기서 더듬어 그 體香을 滿喫하지 않아서는 “개 바위 지남”과 무엇이 다를 것이겠는가?


  孤雲의 家系는 原來가 앞서 말한 鷄林六村가운데의 慶州崔氏였다. 家門이 衰落하고 疎外당하여 眞骨에도 들지 못하고 社會支配階層의 最下位級인 이른바 六頭品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 어떤 社會身分的欲求不滿이 累積되어 있었는듯 보이는 그의 아버지 肩逸의 慫慂으로 그가 12살 들던 해에 官費留學生이 아닌 私費留學生으로서 商船을 타고 入唐留學의 길에 오른 것이다.


  이 때에 만리길을 떠나는 어린아들에게 신신당부하여 명념케한 말씀이 곧 그 같은 아버지의 오롯된 집념이었던 것이니 즉,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치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공부하라!”였다. 이 대목을 그의 桂苑筆耕集 自序에서 이렇게 述懷해 놓고 있다.

『臣佩服嚴訓, 不敢弭忘, 縣刺無遑, 諧養志, 實得人百之己千之, 觀光六年, 金名牌尾』【註) 아버님의 그 엄격하신 훈계를 마음에 새겨 흩어져 해이해지려는 마음을 단단히 얽어매고 한순간의 짬도 없이 노력하며 오로지 아버님의 뜻을 이루고저 애썼던바 실로 人百己千(中庸;남이 백번 노력으로 이루면 자신은 천 번의 노력을 더한다)의 精進 끝에 타국만리의 낯선 풍물을 보아온 6년만에 이름을 金榜(과거합격)에 걸게 되었던 것이다.】라 한 것이다.


  이것이 眞鑑禪師頌德碑에 새겨진 『西浮大洋, 重譯從學, 命寄刳木, 心縣寶洲』【註) 大洋의 서쪽에 뜬 인도로 原 우리의 玄妙之道가 옮아가서 불타를 탄생케하고 그것이 다시 中原으로 再次 옮겨져 온 것을 따라 배우려고 나무를 쪼개의 만든 배에 목숨을 의탁하여 건너가서 마침내 마음속에 우주의 진리를 다 터득하여 담았던 것이다】란 句節들의 뉘앙스이다.


  이는 바로 自記와 한결같게 入唐留學으로 佛道, 그것도 華嚴學을 터득하였고, 또한 終南山에 入山修道까지한 崔氏家門의 後裔인 慧超大師(眞鑑禪師; 獻康王이 賜與한 諡號)의 佛曆에다 自身의 理念과 四端七情을 두루 渾融시켜 表出한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入唐後 孤雲은 6年間을 어디의 누구에게서 儒學을 敎授받고 探究했는지에 관하여는 참고 될 만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全般的인 흐름으로써 推論컨대, 京都의 大學에서 五經博士에 의해 勉學했으리라 집작한다. 그 까닭은 當時의 中原에 있어서는 漢代이후 儒學이 衰殘하여졌다가 唐代를 거쳐 宋代에 이르는 동안 이른바 道家의 學問이 體系的으로 勃興되면서, 儒學을 새삼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道學을 探究한다는 명제가 풍미한 것처럼 儒道融合의 學風이 振作되어 漢族學問의 르네쌍스기를 이룩했던 까닭으로 唐代 에는 곳곳에 一種의 官立學校가 세워지고, 五經博士를 두어 充當했던 때문에서다.


  아무튼 孤雲은 18歲되던해에 唐의 賓貢科에 드디어 及第케된다. 그리고 20歲들던때에 江南道宣州의 慄水縣尉로 임명되어 在職한다. 그러나 孤雲은 一年餘의 그 官職生活을 사임하고 終南山의 全眞派道場에 入山하여 申天師의 門下에서 3年間 修道를 하였다. 이는 그가 當時에 澎湃하는 老莊學을 中核으로한 道學에 心醉한 그의 타고난 學究熱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결국 戰國時代에 六國을 席卷하다싶이 하였던 鄒衍一派의 方仙道의 眞髓를 了知했던 것으로 確認된다. 이런바 鄒衍一派의 方仙道는 桓雄天皇의 倍達國時代에 敎化된 우리겨레의 玄妙之道인 東方仙道의 流波였다. 그러므로 孤雲의 民族史觀과 國學精神은 이로하여 大成을 이루어서 儒佛道三敎의 敎學을 하나로 聚凝시켰고, 그 本脈이 또한 바로 우리겨레 始祖님들의 神哲한 天理觀에 의해 歸納된 이른바 天經神誥(天符經과 三一神誥)에 있음을 그야말로 一以貫之할 수 있었던 契機가 되었었다.


  이러한 全眞派의 이른바 全眞養和라는 그 修行基本은 우리겨레 上古史書이든 朝代記에 따르면 桓雄天皇으로부터 五世를 전해 와서 太后儀桓雄이 있었던 바, 사람들을 가르치기를 반드시 黙念, 淸心, 調息, 保精을 하게 하였었다. 이것이 곧 長生久視의 術이었다고 하였는데, 이 바로 長生久視의 術에 淵源한 것이었다. 그러나 孤雲은 經費의 窮乏때문이었던지 다시 3年滿에 終南山을 惜別下山케 되었었다.


  그런 뒤 때마침 黃巢의 謀反事件으로 中原天地가 戰亂속에 휘말려 있었고, 이를 鎭壓하려는 唐나라 朝廷으로부터 高駢將軍이 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와 있었다. 이에 산을 내려왔던 고운은 그 高駢將軍에게 引見되어, 그 幕下의 道統巡官으로 從軍케 되었었다.

  이때 孤雲이 代撰한 叛賊黃巢辯討激文이 黃巢를 그 바로 三寸之說로써 驚愕케하여 그때껏 强占하고 있던 京都에서 撤兵케 하였던 바, 이로 하여 唐나라 坊坊曲曲을 振動시킨 一大名文이 되었으며, 그 이후 唐의 科試希望儒生들의 必讀의 龜鑑이 되었던 터였다.


  孤雲은 언제고 不忘하던 故國에 향한 執念으로하여 마침내 28世 되던 해에 入唐留學16年만에 歸國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先生의 歸國志心은 그 바로 雙溪寺의 眞鑑禪師頌德碑文중에 表出된 絶句에 잘 나타나 있다. 곧 『雖曰觀空, 豈能忘本』【註) 비록 空을 諦觀한다 할지라도 어찌 根本을 잊을 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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