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流仙脈 智異河東』論


諸 相 宰    


                                二. 聖骨眞骨의 章

 

  시방 새삼스레 가만히 눈감고 明鏡止水의 思索. 그 別莊에 坐定하고 보면 나의 살던 고향은 그처럼 壺中別有天花開洞의 淸淨한 溪川水가 질펀하게 八十里를 흘러내리며 감돌아드는 浦口 동녘에 天一이 生水함으로써 뭇 생령(衆生)을 영걸어 놓은 故場 河東임을 문득 깨달아 알게 한다. 그래서 잊혀져간 어느 한때 어떤 風流詩人이 지나는 발자욱 위에 이렇게 흘려놓고 갔었던 희미한 記憶을 이제 새삼 들춰내어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藤作蕃籬 樹作門      구름속에 두서너 집 한가한 마을 칡넝쿨 어우러져 울을 이루고

白雲叢裏 兩三村      나무는 자라서 절로 사립이 되었네.

春水桃花 杳然去      시냇물에 복사꽃 떠가는 걸 보면 아마도 여기 어디 

不知何處 是仙源      仙道의 源泉이 있나 보네.


  이러하기에 孤雲은 그 碧霄嶺을 경계로 한 영마루 저 너머 天嶺(咸陽郡 古名)의 太守로 奉職하면서 그 寧日없는 나날 속에서도 짬짬이 그 嶺마루를 넘나들어 雲遊를 즐겼던 것이니 바로 그 까닭인즉 꼳 그러한 仙源에 이끌렸던 때문이었다.


  우리겨레의 옛 眞經인 大辯經에 보면

 『神市氏以佺修戒敎人, 祭天所謂佺從人之所自全, 能通性以成眞也. 靑引氏以仙設法敎人, 管境所謂仙從人之所自山, 能知命以廣善也, 朝鮮氏以倧建王敎人, 責禍所謂倧從人之所自宗, 能保精以淸美也』

【 註) 환인천제님이 처음 비로소 열으셨던 開明天地의 氏族社會시대에는 『佺』(생명을 온전하게 한다)으로써 戒法을 삼아 修養하도록 사람을 가르쳤으니, 하늘을 받들어 모심이 곧 생명을 온전케 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온전해지는 바는 하늘이 내린 목숨의 도리를 깨우쳐서 참함을 이루는 것이다.

  환웅천왕님이 여신 農耕安着의 씨족사회시대에는 『仙』으로써 規範을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쳤으니, 서로서로의 境界를 잘 지키도록 管理함이 곧 生命을 生生(낳고 또 낳음)하는 『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스스로 代물려갈 二世의 생명을 스스로 낳는 바는 능히 하늘과 땅이 사람에게 내린 목숨을 제대로 알게된 所爲였던 것으로 끊임없이 널리 持續되게 함인 것이다.

  단군왕검님이 여신 씨족사회시대에는 “사람의 根本을 깨우쳐 倫理를 지켜 實行하는 法度인 倧으로써 밝은 光明의 化身인 임금을 세워 나라를 이룩하고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誠信愛濟의 四理에 따르는 禍福報應의 四理가 곧 사람이 그 근본을 깨우쳐 그 윤리를 지켜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만물의 으뜸 되는 根本이 되는 바는 능히 그 專一함을 간직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여기서 가만히 살펴보면 이른바 仙이라 하는 말은 곧 生命이 生生함의 변함없는 理致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仙道는 곧 一切의 生命이 어찌하여 生生死死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생명은 終局엔 어딜 가는 것인가? 그리고 存續하는 동안은 그런 생명이 지니는 道理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밝혀 깨닫게 하는 哲理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生命의 源泉은 곧 바로 光明에 있는 것이고, 그러한 光明은 또한 神 이라 認識해온 바임으로 이를 綜合해 서 所謂 神仙道라 말해온 것이었다. 이러한 生命의 그 玄妙한 道理를 人類는 일찍부터 追究하여 왔던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宗敎가 생기게 되고 이에 맞춰서 佛陀의 佛學이 黃老의 道學이 그리고 또 孔子의 儒學이 體系化되어 제각기 갈래를 잡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孤雲은 이런 內情을 죄다 꿰뚫어 보고 鸞郞碑序란 新羅花郞의 風流道를 禮讚한 그의 有名한 碑銘에서 밝혀놓기를『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 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宼之旨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註)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玄妙한 道 가 있으니 이르기를 風流(天地造化의 氣가 運行하는 理致를 깨달은 道)라 하느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세운 그 根源은 仙史에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거니와, 그 實內容은 儒彿道 三敎가 本是로 모두 갈무려져 있는 것으로 모든 生命과 事物을 마땅하게 맞아들여 造化하는 原理인 것이니라. 이를테면 집에 들어서는 부모에게 孝道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忠誠하게 한 그 가르침은 魯나라 司宼벼슬을 한 孔子 中心思想이 되었고,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宇宙의 造化作用 그 本體를 꿰뚫은 境地에 다달아 말없이 行함의 가르침은 周나라 柱史의 職分을 맡아있던 老子의 根本認識이 되었던 것이며, 모든 惡業을 짓지 말고, 모든 善業만을 지켜 행하게 함은 天竺(印度)나라 太子 釋迦의 以心傳心法 이 된 것이든 바이니라.】라고 뚜렷하게 밝혀 놓았었다.


  이런 까닭에 天嶺(智異山)의 碧霄嶺을 넘어와 俗緣으로는 崔氏門中의 後裔이고 學緣으로는 中原땅 終南山 入山修道의 同文이며, 佛緣으로는 佛陀의 圓覺主經인 大方廣佛華嚴學 同修者인 智異山 雙溪寺의 開祖大德 眞鑑禪師의 頌德碑銘을 손수 짓고, 이른바 中國四大名筆인 歐陽詢의 書體를 그 根骨로 하고 거기다가 顔眞卿의 書體를 살로 입힌 神筆로써 몸소 썼던 銘文에 이르기를 『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 東人之子, 爲釋爲儒必也』

【註) 무릇 宇宙의 玄妙한 道理를 깨달은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른바가 없느니라. 이로하여, 生命을 現出케 하는 東方木氣를 타고난 우리겨레의 子孫은 그 누구이든, 釋門의 弟子가 되거나 儒門의 제자가 되거나, 참다운 根本을 깨달아 成就하게 됨은 必然인 것이니라.】라고 說破해 놓았던 來歷이었다.

  

  이러한 孤雲을 欽慕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追從해 보면, 先生은 그러한 玄妙之道 인 仙을 끝내 入唐留學을 통하여 通觀하고, 그 源泉은 바로 해돋는 扶桑의 나라 東國新羅에 있음을 直觀하여, 母國으로 歸還했던 그의 誠心의 本領이었다.


  이러한 그의 通理는 당시의 官費留學生인 이른바 宿衛學生의 大部分이 母國을 잊고 唐에 歸化하여 一身의 榮達을 좇던 所謂 西化者의 風潮에 비춰볼 때 실로 大先覺의 至人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는 良識의 龜鑑이 되고도 남는 일이다.


  自古以來로 人類의 社會史는 元始群集制에 있어서의 이른바 母系中心社會가 父系中心社會로 轉移된 基点에서 氏族이란 人類의 集團形態가 나타나게 되었음을 如實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氏族社會體制는 곧 그 社會構成的紀綱으로서의 이른바 整序原理를 建極시키기에 이르고, 그런 만큼 開明된 社會라는 特色을 지니게 되었었다. 곧 이른바 文化時代가 바야흐로 열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父系社會는 지금으로부터 約3萬年前인 後記 舊石器時代에 오늘날의 東北滿洲를 貫流하는 松花江流域에서 人類史最初의 一大變革으로써 비로소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 바로 太初의 父系社會領導者를 일러 桓因天帝라 하게된 이런바 安巴堅으로서의 우리겨레 始祖이자 人類社會初有의 氏族頭祖였었다.


  이로부터 間斷없이 長長2萬3千年을 거쳐 오는 동안 그 過程에서 父系社會의 定着된 生活體制의 모든 能幹을 習得한 監群이 輩出되어 未開地境인 서쪽으로 서쪽으로 뻗어가면서, 아직도 原始母系社會體制로써 流浪하는 原始狩獵과 自然採取의 未開人種들을 開明習服시켜 나감으로서 일곱차례의 神話時代를 開天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氏族의 象徵的符號로서의 姓氏가 表出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으뜸된 號稱이 桓因氏였었다. 이어서 漸進된 開明分化의 展開는 廣域으로 擴散되고, 그에 따라 桓因氏는 煥氏와 因氏로 兩分되기에 이르렀었다. 따라서 桓氏는 太初에 父權을 確立하여 安巴堅이 되었던 監群의 直系血統의 氏族이고, 因氏는 그 傍系血統의 氏族을 가리킴이다.


  이를 두고 後代에 이르러 漢族은 前者를 太昊氏라 하고, 後者는 小昊氏라 分別하여 불러 왔었다. 더불어서 前者의 代表的始祖로서 言必稱  伏羲를 擧揚하고, 候者의 代表的始祖로서는 皇帝軒轅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前者를 高陽氏라고도 하고, 後者를 高辛氏라고도 別稱하기도 하였다.


  新羅는 그와 같은 松花江流域의 그 바로 桓因氏系가 東海를 끼고, 白頭大幹을 따라 점차 南進하게된 部族인 이른바 濊貊族의 後裔러써 古代 ‘알타이’語인 純粹 우리말의 原語로서 ‘새발기달’이 轉化된 서라벌에 安着하여 鷄林六村을 이루었던 來歷이다. 이 같은 鷄林六村의 象徵的符號에서 오늘날 쓰이고 있는 姓氏인 이른바 金氏, 朴氏, 蘇氏, 崔氏, 昔氏, 鄭氏의 六姓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밖에 李氏, 韓氏, 王氏, 姜氏, 全氏, 夫氏, 高氏 등이 유입 또는 派生되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現象은 이른바 姓氏가 文字化되는 基盤을 훨씬 後代에 들어서야 갖추게 된 日本이나 西洋社會에서는 所謂 家門紋章으로 表出하기도 하여 傳承되고 있기도 했던 慣行에 아직도 나타나곤 한다. 이로써 新羅人들은 그와 같은 血統의 象徵因習으로써 현실적인 社會身分으로 制度化하여 社會秩序의 大綱으로 삼은 이른바 骨品制를 運用하였었다.


  여기서 骨品制란 父系血性의 分別을 가리키는 制度를 말한 것으로서 純粹한 安波堅 直系血統은 聖骨이라 하고 그 傍系血統은 眞骨이라 하였던 것이나마 그것이 世代의 久遠함에 의하여 通俗化 됨으로써 나중에는 父母가 모두 王族인 血統을 聖骨, 父母兩系 가운데 一代라도 王族이 아닌 血統이 섞인 子孫은 眞骨로 認識된 것이었다.


  이러한 遺習이 後代인 李氏朝鮮에 이르러서는 世稱 兩班制라는 身分制로 轉化되기도 한 것으로 推論된다. 아무튼 간에 이러한 社會身分制度는 近二千餘年間을 누벼오면서 이른바 農耕制産業生産社會의 根幹이 된 封建制度의 中樞를 確固히 해왔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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