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花開洞天


  金 梵   


  백두대간이 뻗어 지리산을 이루고, 그 지맥이 흘러 한 터전을 이루니, 여기가 천혜의 花開洞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花開谷, 고려시대에는 花開部曲, 조선조 전기에는 花開縣, 임진왜란 후에는 花開縣里, 숙종28년(1708)부터는 花開面이라 불리어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에서 발원된 영천이 桃花 뜬 시냇물이 되어, 5백리 굽이쳐 흘러온 섬진강에 이른 고을이다. 그리고 화개라는 말은 본시 “눈(雪)속에서 칡꽃이 피었다”는 설에 의하여 불리었다고 한다. 雪中葛花설은 구한말 때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이던 李能和(1869~1943)의 朝鮮佛敎通史에서 인용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쌍계사 십리 벚 꽃길”로 더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화개동, 화개는 예로부터 선경의 별천지(壺中別有天地)라 하여 花開洞天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영조 때의 지리학자 李重煥(1690~?)은 그의 택리지에서 화개동은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山水甚佳)고 했거니와, 대개 이 고을은 깊고 아름다워 山明水麗 하기로 일컬어 寄絶淸勝의 武陵桃源이라고 한다. 일천바위는 겨루듯 빼어났고, 일만 구릉의 물은 다투어 흐르는데, 2천년의 명승고적이 온 고을에 펼쳐져 있어, 지나는 굽이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는 모두가 洞天이다.


  靑鶴峰과 白鶴峰 사이에는 石磵水가 흐르고, 수백길 높이의 불일복포는 거세게 흘러내려 하늘이 놀래고 땅이 움직이는 황홀함을 느낀다.


  화개는 일찍이 가락국 7왕자가 불전을 터전하여, 남방불교 전래설을 입증한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 雲上院 : 七佛寺)의 고장이라 불리었고, 운상원 玉寶高의 가야금 음률과 雙溪寺 진감선사의 범패는 삼라만상의 적막함을 깨트리기도 했다.


  신라 법흥왕은, 때에 大廉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茶종자를 지리산에 심게 했는데, 여기 시배지의 花開洞茶는 雀舌茶로 일컬으고, 해동의 문장가로 일컫는 고운 崔致遠(857~?)의 遺墨(眞鑑禪師大空塔碑)은 국보(제47호)로 전한다.

 

  그리고 고려말기 경 陜州(陜川) 三歧縣(三嘉) 출신의 無學大師(自超:1327~1405)는 이곳 불일암에서 산수 지리 도참 등을 술법을 터득하여 조선조를 개창한 태조 李成桂(1335~1408)를 도와 한양천도에 기여했다는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또 화개는 詩文이 많기로 더욱 유명하다. 멀리는 신라 때 최고운선생의 花開洞詩를 비롯, 고려 명종 때의 대문호 李仁老(1152~1220)가 화개동을 찾아 남긴 靑鶴洞記, 조선조 초기 시문에 뛰어났던 柳方善(1388~1443)의 靑鶴洞詩, 성종 때의 경상도 관찰사이던 李陸(1438~1498)의 頭流錄, 영남 사림의 종조가 된 점필재 金宗直(1431~1498)의 遊頭流錄과 雙溪寺詩, 생육신의 한 분인 추강 南孝溫(1454~1492)의 智異山日課, 진주목학 교수이던 탁영 金馹孫(1464~1498)의 續頭流錄, 중종때의 문신 관포 魚得江(1470~1550)의 쌍계사 八詠樓詩抃序, 명종 때의 성리학자 남명 曺植(1501~1572)의 遊頭流錄, 임진왜란 때의 僧軍將

西山大師 休靜(1520~1604)의 雙溪寺重創記와 花開洞詩, 광해조 때의 문신이던 미수 許穆(1595~1982)의 靑鶴樓重修記, 고종 때의 명승 離峰(1814~1890)의 七佛庵詩, 살신성인의 유학자 면암 崔益鉉(1833~1906)에 의하여 창설된 靑鶴樓吟社와 岳陽亭重建記, 구한말에 우국 순절한 매천 黃 玹(1855~1910)의 花開洞詩, 하동군수 李韶榮의 花開洞天記 등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문이 오늘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아득한 옛날 “신선이 노닐었다”는 仙遊洞을 비롯, 隱者의 전설이 있는 靑鶴洞(佛日溪谷)이 있고, 신라 때 영신사, 의신사, 신흥사 등 3사와 연유된 三神洞과 고려 때 崔忠憲(1150~1219)에 의한 무인정치를 예상하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여 지리산으로 숨어온 대비원녹사 韓惟漢과 關聯된 富春洞이 있으며, 또 조선조 성종 때의 성리학자 일두 鄭汝昌(1450~1504)의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는 德隱洞이 있다.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방자취가 닿은 影池와 불가사의한 신비의 亞字房이 칠불암에서, 선조 때의 대승 서산대사는 유, 불, 도의 三敎統合論 을 펼쳤고, 순조 때의 명승 艸衣禪師(1768~?)는 이곳에서 茶神傳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그 무렵 추사 金正喜(1786~1856)는 쌍계사에 들려 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필체를 남기면서, “화개동 작설차는 중국에서 제일가는 龍井이나 頭綱보다도 질이 더 좋다”고 극찬 했다.


  특히 화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바는 구한말 때, 당시 진주에서 발간된 경남일보 1910년 2월 6일자 3면을 보면 “화개면 주재 일본 수비대장이 면장과 각 이장을 召集하여 놓고 한일합방의 好否에 대하여 물은즉, 면장 金鎭灝(1882~1935)씨가 대답하기를 ‘국민된 자로서 어찌 좋다고 하리요, 차라리 죽을지언정 원치 않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라’ 고 하니 수비대장은 안색이 변하면서 면장과 이장의 퇴장을 명 하였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어, 87년 전의 화개면 정서를 알듯 하여 매우 흥미롭다.


  이상에서 보듯 화개는 사료가 풍부한 문화의 공장이다. 어찌 그 것 뿐이겠는가. 국보1, 보물3, 유형문화재11, 기념물3, 문화재자료5, 그 밖에 도목2, 면목8개의 보호수가 있는 화개동천, 지금은 쌍계사 십리 벚꽃 길을 비롯, 김동리의 단편 <역마> 박경리의 장편 <토지>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 등으로 더더욱 널리 알려진 화개동천 이다.


  천혜의 자연과 태고의 신비를 찾아 洗耳巖에서 속세를 잊는다면, 진정 別有天地 非人間世이려니, 그래서 많은 선현들이 즐겨 찾아 詩歌와 명문을 남겼던 것이 아니겠는가. 내 고향 화개동천은 정말 유서 깊은 명승의 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