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자유의지를 분석 · 서술함

                                                                                        이 진 원


1. 자유의지의 개념과 환경의 지배


   인간의 자유의지는 天賦의 은혜로 얻어진 자연의 권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이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연의 불변진리를 지닌 신의 권리와도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연의 불가사의한 무궁한 변화와 인간이 불가사의하게 이루어 내는 초능력이 또한 같은 것으로 통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전통적 성리학의 본원이기도 하지만, 선천적 종교인 유 ․ 불 ․ 선 ․ 기독교의 天理가 융합되어 종교통일의 핵을 만들어낸 후천적 종교로 태어난 천도교(동학)의 실천적 진리와도 상통한다.

   이것은 한국의 자생종교인 천도교(동학)의 종교이념일 뿐 아니라 宗旨라고 하여 이‘자유의지’를 반드시 실천궁행하는 공동의 의무를 갖는다고 한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동양철학과 동남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세계 및 서양의 기독교 사상과도 상통하는 보편적 진리이기도 하다.

  영국의 윤리학자 조셉 · 그렌빌의 저서에 ‘그 이면에는 의지(意志)가 있는데 그것은 결코 죽어 버리지 않는다. 누가 이 의지의 신비로움과 활기를 알 수 있겠는가? 즉, 의지란 신(神)이 스스로 모든 것에 침투 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이며, 인간이 천사들이나 또는 죽음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반드시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다만 환경의 지배를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환경의 지배란 각인이나 습성, 또는 관습에 따라 자의적으로 자유의지가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형된 자유의지를 종교적 이념이나 정치적 이념으로 착각하거나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른 부득이한 진리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북한작품속의 황진이의 자유의지란 작가 홍석중의 자유의지일 뿐만 아니라 작품의 배경이기도 한 정치상황의 이념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상대적 조건을 그들의 사상체계로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변형되어 나왔다는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전개 속에서 나타난 황진이의 자유의지가 환경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탄원하는데도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문학 자율성을 솔직히 인정하는 듯하다. 작가의 정치 환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작가 홍석중과 정치 환경의 변화


   북한작품『황진이』의 매력은 작가의 창작적 개성이 잘 드러나는 표현이나 어휘의 구사다. 작가는 조선조의 상층부 사람들의 구어나 하층민의 일상어를 가감 없이 사용했다. 속담과 상상도 못할 토속적 음담패설을 원형그대로 실어 독자를 당시의 상황 속으로 몰입하게 하였다. 어떻게 북한에서 이런 소설, 이런 문학이 존재 할 수 있을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작가의 조부는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 부친은 인문학자 김일성대학 수석교수인 홍기명이다. 두 분의 소양을 이어받은 북한의 유능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지구상의 유독한 북한정치이념의 현상에서 엄청난 비판의 성격을 가진 이런 작품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 격세지감이 앞섰다.

  그런 측면에서 홍석중의『황진이』는 북한문학이 다양성의 문학으로 나아가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작품들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여 어휘들이 풍부하지 못하다고 지적하여 작가들의 창발성을 억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교시나 훈시가 있었기에 이러한 작품이 나타났겠지만,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었던 문학의 자유의지를『황진이』의 입이나 작품의 주변인물 특히 상직할멈의 입을 빌어 정직하고 비열한 변명 없이 표현한 것은 순수문학의 의무를 다한 것 같았다. 작품『황진이』가 북한은 물론 대내외에서 화제가 된 이유는 북한문학의 환경패러다임을 선도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정도로 질펀한 성적묘사나 에로틱한 사랑의 표현을 아무런 장애 없이 발표하였다는데 있다.

  북한의 환경변화가 없었다면 노골적인 성적묘사나 무자비한 불합리성의 성토와 불만의 표현은 사대주의니, 교조주의니, 수정주의 등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비판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하늘로부터 얻어진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특이 할 것은 새롭게 부각시킨 놈이의 허구적 설정은 황진이의 자유의지를 더없이 아름답고 진실하게 만들었다. 등시에 관료들의 부패와 불신을 혁명적 사고로 표출해내는 놈이의 자유의지 또한 거룩하리만치 순수하다. 영원히 정화될 수없는 행정제국의 부패는 오직 혁명밖에 그 대안이 없다는 절실한 명제를 남겨주기도 한다.

  

   

3. 황진이의 자유의지


  자유의지란 천부의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황진이의 자유이지를 홍석중의 작품 중에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당시의 지엄한 양반 사대부집안 규수가 외부의 정보를 얻기 위해 남장을 하고 험지를 단독으로 체험을 해보려는 실천의지가 바로 황진이의 자유의지다.

  *호기심이 없는 자유의지란 존재하기 어렵다.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지식의 날개와 같다. 많이 알게 될수록 날개는 더 크게 자라고 커진 만큼 더 넓은 창공을 날아다니고 싶게 한다. 황진이도 높은 담장으로 둘러막힌 후원이 자신을 가두어 놓은 초롱처럼 여겼고  푸른 창공으로 더 높이 날아오르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풍치나 맑은 공기로 말하면 집 후원의 청신한 숲속과 이 번잡한 먼지투성이의 거리바닥을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자유가 있다. 황진이는 오, 자유여! 귀신이 묶인 신선보다 낫고 여윈 자유가 살찐 종살이보다 낫다는 것은 체험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황진이의 자신의 출신과 윤씨 가문과의 파혼을 당했을 때의 진이는 생그레 웃었다. 이것은 진실한 자유의지의 표출이었다. 천출 출신이라는 것과 양반이라는 인간이 만든 허울이 천부의 자유의지와 비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인정하는 황진이의 웃음이 아닐까.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준 믿음과 같았던 위선의 족자를 불태워버리는 것은 황진이가 위선의 늪에서 탈출하려는 자유의지와 같다. 매미가 허물을 벗고 환골탈태하는 것 같이 스스로가 생모의 인륜을 인정하는 용감한 의식과 같다.

  *황진이는 언젠가 자신도 비석 없는 어머니의 초라한 무덤 속에 누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는 적어도 내 나이만한 수자의 불상이 내 손에서 하잘 것 없는 흙덩이로 나딩굴어야 한다고 했다. 황진이의 자유의지란 미래까지도 실천을 위해 형상화 것이리라.

  *“저는 양반 댁의 아씨로 여러분들을 찾아뵌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한 비천한 여인의 딸로 여러분들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불초한 자식 대신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주셨고 마지막 길을 바래주신 여러분들께 절을 올리고 싶었어요.”진이는 그 자리에서 끓어 앉으며 큰절을 했다. 청교방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상두꾼들의‘그네뛰기’가 멎었다. 진이는 마치 눈에 보이는 그 누구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유두날 밤 달빛 속에서 자기를 넋 잃고 쳐다보는 그 총각의 얼굴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진이를 처음 보고 상사병에 걸려 죽은 ‘또복이’의 혼백과 저승에서의 사랑을 약속했다.

  *놈이에게 자신의 양반규수의 처녀성을 바치고 환골탈태한 후 청루로 나서는 황진이, 사회통념을 벗어나려고 허세로 가득한 기득권의 중심지역에 교방을 정하여 그들과 쟁투를 선언하고 그들을 조롱하듯 성적욕구의 발산도 능동적 선택에 의하여 그들을 조롱하는 등, 황진이의 자유의지에 대한 발상은 처음부터 작품이 끝날 때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 가는 것은 진정 놀라운 암흑세계의 광채가 아닌가. 

  

        

      

4. 남 · 북한 작가의 심성

  홍석중의 황진이에서 확인된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창작력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남한의 작가들이 잊고 있는 소설적 서사의 진수를 속 시원하게 경고하듯 복원해 주는 한편 독자들로 하여금 풍부하고 긴장된 거대 서사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인 황진이와 많은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 묘사는 참으로 치밀하고 절실했다. 또한 사실과 야사, 고전적인 속담과 토속적 비유와 품위 있는 시적표현, 북한의 언어와 남한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문체는 참으로 한국적 문학대표성을 나타내고도 남음이 있다.

  주인공 황진이의 인생역정이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하여 출발하여 천부의 심령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인생까지 아름다움을 서정적 서사시로 표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남한의 작가들도 작품 속에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올바른 자유의지를 선명하게 표현한 것은 아직도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고의 환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페미니즘이나 민중주의로 착각하고 있는 남한의 작가들과 비교하여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문학이 우리작품들이 크게 반성해야할 일이 아닌가.

  양반에서 기생으로 변신한 황진이는 체제와 반체제의 텍스트 바깥으로 이탈케 함으로써 도가적 逍遙遊의 경계를 거닌다. 화담마저 부정되는 이 절대자유의 경지! 이 작품은 신분사회의 질곡에 대한 침통한 숙고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현존사회주의 너머로 우리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5. 나의 견해


  문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밑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학문으로써 존재가치를 상실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이념과 사상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본으로 하여 출발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망각케 하거나 착각하도록 하여, 그 자유의지를 무시하거나 핍박함으로써 발생하는 자연의 반대급부가 권위와 권력과 기득권을 만들어 내고 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란 진의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합리란 것이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 지식의 날개를 펼 의지가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왕이나 국가 원수나 거대 조직의 최상위의 계층들이 지식의 날개를 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킨다면 인간세계에 어떠한 종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혁명이나 전쟁이란 말이나 사상이나 이념이란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이란 인간의 자유의지를 펼쳐주는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란 작품에서 인간의 지유의지를 표현하기에 앞서, 창작 이전에 실천하고 남을 위해 각인시켜야 할 행동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석중은 동학이념을 확고히 알고 있는 작가다. 그의 작품 속의 황진이는 선천과 후천 세계의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 이것은 천도교(동학)의 사상은 바로 문학예술을 하는 작가의 자유의지의 실천이 창작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남한의 작가나 학자들도 모든 문학이나 학문의 바탕을 진정한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문학에서 변명이나 책임회피를 위한 비굴한 작품을 만들어 황금을 구리로 바꾸어 무엇에 쓸 것인가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진다.




참고문헌


박태상 저 북한문학의 현상 2008. 깊은샘

홍석중 저 황진이          2001. 대훈닷컴

전경린 저 황진이          2004. 이름

포우 단편집 김병호 역     1977. 상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