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世紀 末에 우리와 중국이 일본보다 西歐文物의 도입에 있어서 늦어진 原因을 記述하고 評價하시오.

 

방송대 중문4년 이진원


목    차

                            1. 머리말

                            2. 19세기 중국·우리나라·일본의 개방정책

                                2. 1. 중국의 피동적 개방

                                2. 2. 우리나라 사대사상에 의한 간접개방

                                2. 3. 일본의 능동적 개방

                            3. 삼국의 비교

                            4. 맺음

                            5. 參考文獻



1. 머리말

  건강의 기초를 갖추지 못한 조숙아의 어설픈 성장이 마지막에는 오히려 성장의 멈춤을 불러오는 결과를 얻게된다는 비유가 중국과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서구문물의 도입에 있어서 늦어진 원인이라고 가정하고 이러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지적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내려온 공통적 사상의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사상과 문화의 전달은 한 시대 뒤늦게 전달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와 중국으로부터 동양이라 하여 대륙 밖의 영역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의 간섭을 배제 당한 특별한 독립지역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에 의하여 언제나 침략 타도되어야 하는 외환의 근거지로만 생각되어지거나 야만으로 간주되어, 배부른 귀족이 살찌고 기름진 사냥개 훈련을 위해 운동하듯 심심하면 우리나라를 하명하거나 설득하여 일본을 정벌하기도 했던 역사의 예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자기들보다 눈앞에 보이는 선진 중국과 조선에 대한 열등의식은 언제나 중국과 조선이 일본을 침략하는 나라로 인식하였고, 우선적으로 그들을 방어하고 먼저 타도 할 수 있는 국력을 배양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을 것이란 가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시기의 19세기 전후기의 한․중․일 삼국은 서구문화교류를 절실히 필요로 한 일본보다 뒤 처지게 되었고, 일본의 침략을 당하여 근현대에 시련의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2. 19世紀 中國·우리나라· 日本의 개방정책

  우리나라와 중국이 19세기말에 일본보다 서구 문물의 도입이 늦어진 그 원인과 배경은 지증학적 이유에 의한 정치사조가 더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19세기 중국의 정치사회의 환경을 설명하고,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사대관계의 고착으로 모든 문화를 중국을 경유하여 도입될 수밖에 없는 지증학적 고찰, 아울러 독립적인 자율성과  어설픈 선진세력의 침략을 받아왔던 일본의 조기개방과 의욕적 문화창달은 우리나라와 중국을 앞서 갈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가 있다.

   

 2. 1. 中國 被動的 開放

    西洋 列强의 東洋貿易, 특히 中國侵略은 商業植民地를 획득하려는 목표에서 진행되었으나 청은 廣東에만 제한하여 公行무역을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양무역에서 최종 승리를 획득한 영국은 對淸貿易을 확대시키려고 통상제도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역침략을 강행하여 마침내 아편전쟁(1839~1842)을  야기 시켰고, 그 결과 南京條約이 체결되어 문호는 개방되었다. 계속하여 여러 열강과 맺어진 조약은 關稅自主權을 상실하게 되었고 治外法權․最惠國約款 등이 규정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줄달음치게 되었다.

  한편으로 국내에서는 太平天國의 난(1850~65)이 일어나 청조의 弱體化를 초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洋務運動이 일어나 근대적 군사 공업이 발흥하였다. 그러나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淸日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安南에서의 프랑스와의 전쟁 등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思想을 초래, 姜有爲의 戊戌政變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와 청조자체의 전근대적 모순은 청의 지배체제의 재정비를 달성치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義和團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청의 쇠퇴가 불가피하게 되자, 孫 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이 차츰 성장하여 드디어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 中華民國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민주주의 정치가 즉시 실현된 것은 아니고 밖으로는 더욱 외세의 침략이 가해졌고, 안으로는 軍閥의 대립 투쟁이 한층 심해지고 있을 즈음인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본의 진출에 대한 반발로 五四運動이 일어나서 광범위한 反帝운동과 아울러 군벌타도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와 함께 文化革命이 일어났다. 이처럼 외세의 침략과 대내적 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國共合作을 계기로 한 중국 공산주의의 진출은 일본의 적극적인 대륙침략의 틈을 타서 그 세력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毛澤東의 중국 공산당은 중국대륙에서 실권을 잡게 되었고,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臺灣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949). 그 후 본토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人民公社의 설립, 文化革命 등을 거쳐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배척함으로 인하여 西歐文物의 도입에 부정적인 환경을 자연스럽게 조성하게 되었다.  


  2. 2. 事大思想에 의한 우리의 間接開放

      明 末·淸 初에 유럽문물이 들어옴에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중국을 통하여 한시대의 시차를 지나 유럽의 과학지식과 정신문명에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중국의 경세치용의 실학 학풍이 우리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청에서 발전한 고증학의 학풍이 도입되어서 우리도 영․정조시대에 실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유형원· 이익을 비롯한 박지원·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정치·경제·경학·천문·지리·금석·과학 등의 각 분야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도 중국을 통한 영향이 컸다. 천주교의 전파는 조선시대 후기의 정치와도 관계가 깊다. 청에 대한 사대관계는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고, 메이지유신(1868)이후 일본의 진출로 이 관계에 변모를 일으켰다. 즉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하여 일본과의 병자조약(1876)이 체결되자 일본이 우리나라에 진출하였고, 한편 러시아가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청이 우리나라에 권고하여 한미수호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중국은 우리나라와 종래의 형식적에 불과하던 종속관계마저 지양하게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청은 오히려 조선에 관심을 배가시켜, 드디어는 임오군란(1886)을 계기로 정치간섭을 도모했다. 대원군의 납치, 중국 관제의 실시강요, 청군의 서울주둔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거쳐 동학혁명을 계기로 발생한 청일전쟁(1894~1895)의 결과,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국은 조선에서 손을 떼게 되었으나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이 구체화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독립군이 애국지사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1919년 3․1운동직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게 되었다.

   

 2. 3. 日本의 能動的 開放

     일본은 1853년 미국인 Perry가 군함을 이끌고 상륙하여 통상을 강요하자 쇄국정책을 버리고 다음해 1854년 美日和親條約을 맺은 다음, 이어서 영국․프랑스와도 같은 조약을 맺고 개국을 하였다. 미국과의 개국문제는 일본의 朝野에 큰 충격을 주어 개국과 관련되어 尊王․攘夷․倒幕․公武合體 등 한때 정국이 혼란하였으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이 요망되어, 1867년 바꾸후는 왕에게 정권을 돌리어 王政復古가 이루어지고 다음해에 新政의 施政방침을 반포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정치가 추진되었다. 봉건제의 遺制를 타파하기 위하여 版籍返還․廢藩置縣을 하여 중앙집권이 확립되었고, 신분제도를 철폐하여 家祿制度를 폐지하고 정부의 재정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 地租를 개정하고 교육제도를 개혁, 법전을 정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무사들의 반발과 자유민권운동 등이 있었다.

  일본은 비교적 쉽게 새로운 정치로 옮아가서 근대국가를 이룬 것 같이 보이나, 메이지유신 이후를 곧 근대사회라 할 수 없으며, 봉건적 성격이 상당히 남아있어서 덴노오제 절대주의(天皇制絶對主義)의 형성기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후꾸자와유끼지(福澤諭吉) 등에 의해 자유민권운동이 전개되어 정당 활동이 시작되자 정부는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헌법을 초안케 하여 정부에 유리한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1889년에는 國會를 발족하였다. 이어서 제1차 산업혁명이 일어나 주로 방직․製紙 등의 경공업 분야가 기계화되었다. 그러나 국내 구매력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해외시장을 찾지 않을 수 없어 자본가들이 정치가와 결탁하여 軍國主義를 성립시켜 청일전쟁․노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이어서 대륙침략을 위해 그 기초로써 조선을 병합하고 중공업을 일으켰으며, 財閥중심의 제국주의로 화하고 말았다. 근세의 문화는 西歐思潮의 도입이 큰 특징이며, 그 전의 쇄국시대에는 겨우 네델란드인들을 통하여 다소의 서구지식을 얻고 있었으나 신문․잡지․서적을 통하여 더욱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구의 근대사상․학술을 수입하고 학자를 외국 초빙하여 교육제도를 보급시킴과 동시에 인쇄술․출판사업이 발달하여 학문의 발달과 문화의 보급이 더욱 빨라졌다. 문예는 각 분야에 걸쳐 여러 가지 思潮가 도입되었으나 1890년경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강조되었고,  정치사상으로는 國粹主義가 대두되어 파탄을 일으킬 前兆가 되기도 하였다.


3. 三國의 比較

   1859년 5월 일본은 가나가와(神奈川나)· 나가사끼(長崎)·하고다데(函舘)를 개항하여, 러시아·프랑스·화란·영국·미국에 무역을 허가했으나, 중국은 格林沈, 太沽砲臺에서 영국·프랑스군을 격파하여 중국은 그 당시부터 스스로를 문명국이라 여기고 있었고, 洋夷를 보잘것없는 후진오랑캐라고 여겼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역사를 한 주기 약10~20년의 뒤의 과정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다. 서양열강과 중국사이에 벌어진 1850년대와 1860년대의 기나긴 전쟁과 협상은 한복이 일반적으로 원칙을 방어하기 위해서 싸우려는 자세를 갖추었던 반면, 만주족은 일반적으로 왕조의 보존을 앞세운 이익을 위해서 침략자들과 타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유교에 기초한 통치체제를 고수하여 관료 및 그 가족과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우월한 진위와 특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결점이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과 우리나라는 아주 특이하게 威信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명치유신개혁을 단행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폐습을 타파하고 자율적 개방을 하여 신문물의 기술과 과학을 받아들임으로써 19세기 말엽에는 서구열광과 비견할 수 있는 국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며 종국에는 대동아 공영권을 열강과 함께 갖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국이 되어 버렸고 중국은 대만을 일본에게 바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불수 있다.


4. 맺 음     

   역사는 반추된다는 진리를 믿을 수밖에 없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렇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가 그러하다. 더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는 판에 박은 듯 그러하다. 특히 우리의 경우 남북이 대치하여 이념적 대립이나 사상 또는 사고관념의 대립으로 분탕질이 나고 질시하는 모습들이 그렇고 현대의 국내정치상황이나 지도적 국가권력의 양상이 중국과 일본 등 인접국가와 서구열강과의 외교적 모습들이 한 세기의 世間을 두고 반복하고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왜 이토록 역사의 치차바퀴를 스스로 돌려볼 수 있는 main-gear의 역할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가 이태리와 같은 지증학 상의 같은 요건에서도 로마제국을 건설하지 못하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위대한 지도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국민의 역량이 부족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몽골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정신의 규합은 진리와 같다. 우리는 왜 남을 위해 배려하는 기본적 사회성이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아야하고, 알려고 노력해야한다. 정치인, 종교인, 학자, 과학자, 예술인 등의 사회지도계층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말로만 존경하는 서민들 모두에게도 바로 이것이 추구해야 할 명제임을 제안해본다.  

     

參考文獻

 1. John King Fairbank 著  중국사 연구회 譯

 <新中國史> 1994. 까치글방

 2. 송창섭 홍순권 著 <한국사의 이해> 2002. 한국방송통신대학교.

 3. 國史百科事典編纂委員會 編著 <國史百科事典> 1975. 東亞文化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