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무술영화의 발달과정을 서술하시오.

방송대 중문4년 이진원  

 

   

목    차


                              1. 홍콩의 역사개관
                                
 1. 1. 홍콩의 정치 경제
                                
  1. 2. 홍콩의 생활과 문화

                              2. 홍콩의 무협영화

                                 2. 1. 무협영화의 발전 배경

                                 2. 2. 무협영화와 무협소설

                              3. 무협영화의 교육적 영향

                              4. 참고문헌

 


1. 홍콩(香港)의 歷史槪觀


   홍콩이 1992년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 1950년 이전의 역사적 기록이 홍콩무술영화의 발전을 가져온 배경으로 간주하고 근현대의 역사를 요약한다. 홍콩(香港)은 중국 廣東省 동남쪽 연안에 위치한 영국의 직할식민지였다. 한때는 대영제국의 왕관에 점철된 보석의 하나라고 일컬어진 때도 있었다. 지금도 동양의 眞珠라는 말로 형용되는바와 같이 섬과 반도 위에 건설된 아름답고 정서 풍부한 도시다. 

  지금으로부터 백 수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홍콩은 남 중국의 연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황량한 바위산의 하나로, 몇 사람의 어민들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1816년 7월, 영국정부가 淸朝 政府와의 통상문제 해결을 위해 베이핑(北平)에 파견한 애머스트경(Lord Amherst)이 이곳에 기항하여, 음료수를 보급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 영국의 阿片무역의 근거지로 유명해졌다.

  홍콩섬은 1841년 아편전쟁 때문에 영국에 점령되고 다음해 42년의 난징(南京)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되었다. 더욱이 영국은 1856년의 아로오호사건을 계기로 베이핑(北平)에 진격하여 九龍半島의 남단인 九龍地區도 1860년의 북경조약으로 할양시키고, 1898년에는 深圳河 이남의 九龍半島 대부분이 조차지로 되었음.

  지금의 홍콩은 이역사가 표시하듯이 홍콩 섬과 츄룡(九龍) 및 新界의 세 지구로 구성되어있다. 홍콩섬은 면적 약80Km2 거리는 섬의 북쪽 해안에 연해 전개되고, 견고한 암석의 산허리까지 계단식으로 건물이 서있다. 특히 밤에는 이 거리에서 산고대기에 이르는 도로에 빨간 불이 켜지고, 이것을 츄룡측 혹은 홍콩섬과 츄룡을 연결하는 나룻배에서 보면, 마치 함정전체에 장식을 한 커다란 선박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아름다움은 세계 유수의 미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의 반딧불 바구니>라고 상찬되고 있다. 츄룡 지구는 반도의 남단부를 점하고 미이톤도(彌敦道)라는 큰길을 중심으로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남단에서 서해안에 걸쳐 홍콩섬에의 나룻배 발착장과 일만톤급의 큰배도 정박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북동부의 산록에는 치떠(啓德)비행장이 있다. 신계는 츄룡 반도의 대부분을 점하고 면적은 약954Km2 평지가 많고 농업이 행하여지고 있다. 홍콩시민에 대한 쌀․채소․과실의 공급원이다.


 1. 1. 홍콩의 정치 경제

   영국 여왕이 임명하는 총독이 홍콩 政廳의 長으로서 영국 植民省 大臣의 지시를 받아 홍콩 통치의 책임을 맡으며 총독의 보좌 기관으로는 행정 참사회와 입법심의회가 설치되어 있다.

  홍콩주민의 99%는 중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정치참여의 길은 열려있지 않았음으로 중국인이 홍콩통치에 관여하는 비율은 극히 낮아 거의 형식적인 정도다. 홍콩의 번영은 대부분 자유무역항으로서 무관세 주의를 채택하여 홍콩의 번영을 지탱하여왔다.

  무역의 대부분은 중개무역으로 번영하였으나, 2차대전후에는 많은 제조공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섬유공업의 발전이 현저하고, 그 외에 금속·고무·식료품·전기 기구 등의 경공업이 성하였다. 1954년에는 총수출액의 30%를 홍콩제품이 차지하였다. 제품은 주로 면제품으로 수출대상국은 아시아 제국과 아프리카 시장이다.

  홍콩은 유럽이나 아메리카로부터 동양에 이르는 해·공·로의 요지로 국제적으로 특수한 지위를 저하고 있다. 밀무역도 성하여 섬유 금속 품 등의 전략물자가 이곳을 거쳐 중공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무역과 교통으로 점하는 이익은 막대하여 홍콩의 오늘의 번영을 이룬 조건이기도 하다.


  1. 2. 홍콩의 생활과 문화

     1950년대의 기록으로 추정인구 약280만이라고 하는 영국 식민지인 홍콩이지만, 주민의 99%까지는 중국인이다. 따라서 거리의 외관도 동양 독특한 색채 외에도, 서유럽과 중국 교류에 의한 혼연한 아름다움이 넘쳐있다. 홍콩은 문명과 봉건성이 공존하고 있는 동시이며 전보와 정체, 근대 문명과 고대 사상이 뒤섞인 거리이다. 인구가 이와 같이 팽창한 원인은, 중국내전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중공군의 남하와 더불어 소위 피난민으로서 중국 본토의 중국인들이 속속 홍콩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러한 인구증가로 첫째 일어나는 문제는 주택 문제였다. 평지가 적은 곳이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바위산의 허리에 아파트를 세웠다. 홍콩섬과 츄룽의 교외에 많은 주택을 지었으나 집을 빌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산허리에 판자 집을 지어 비와 이슬을 가리고 산다. 거지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띈다. 거지가 일소된 중국의 본토와 어디서나 거지를 볼 수 있는 식민지 홍콩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외국여행객이 한번쯤은 소매치기 당하는 것은 홍콩에서는 예사이다.

   인구증가로 생긴 재미있는 현상은 언어 면에서도 볼 수 있다. 전에는 홍콩에서는 영어 외에는 중국어로서는 꽝뚱어 밖에 통용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중국본토 도처에서 피난민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뻬이핑보통어와 상하이 말도 통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말 중 어느 한가지만 알고있으면 부자유하진 않다. 한정된 면적에 인구가 밀집하여 곤란한 점은 식수문제다. 바위산이 많고 개천이 적은 이곳엔 저수지나 수도 시설이 빈약하였다. 수도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사람은 빗물을 받아쓰기도 하고, 공동 수도 앞에 물통을 들고 급수시간을 기다리고 줄지어 서 잇는 광경도 보게된다.

  홍콩섬과 츄룽 사이를 7척의 나룻배가 5분마다 하루 19시간 왔다갔다하는 스타아페리 회사의 선편 외에도 몇 개의 선편이 있어 육지에 못지 않게 교통이 편리하다.  어느 식민지나 마찬가지로 홍콩도 문화적으로는 보잘 것이 없다. 학교는 홍콩 政廳경영의 홍콩대학과 중․소학 야학 등 합해서 29개의 공립학교와 政廳의 보조를 받고있는 사립학교가 있다.

  의무교육은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다. 국제적인 지위의 중요성에서 신문은 여러 가지 경향의 것이 발행되고 그 수효도 많다. 방송은 홍콩 전대(電臺)에 Radio HongKong 외에 민간유선방송이 있다. 영화는 동남아시아 쪽으로 수출할 시장이 많고, 인구가 증가한 탓으로 제작과 상영이 모두 활발하다.

 

2. 홍콩의 무협영화

   홍콩의 이러한 역사는 언어의 복합으로 인한 상상력의 발달이 필연적으로 발생하여 열악한 환경의 극복을 위한 전위적 예술이 그들의 기능적 능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 기능적 사고의 능력중의 하나가 바로 홍콩영화중의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 장르의 하나이자 북경어나 광동어를 막론하고 중국어로 제작된 영화가운데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진 유일한 장르는 무협영화라 할 수 있다.

   67년 최초의 무협영화 ‘방랑의 결투’가 극장에서 상영되었을 때 관객의 반응은 경이 그 자체였다고 한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가 하면, 바위를 깨뜨리는 장풍 등, 이후 홍콩영화가 쏟아져 들어오는데 이즈음의 ‘삼인의 협객’은 최초의 홍콩스타 왕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권법영화를 활짝 꽃피운 인물로, 죽음의 비밀로 인해 더욱 신비감을 풍인 이 소룡의 영화는 73년 그가 죽은 후에 국내에 들어왔다. 


  2. 1. 무협영화의 발전

       홍콩 무협영화의 역사는 1928년 상해에서 제작된 <火燒紅蓮寺>가 시작이다. 이것은 무려 90여편이 리메이크되어 중국인의 자존심을 지켰던 <황비홍>을 비롯해 무협영화를장르를 저질이라고 오랫동안 멸시하던 제작태도에서 탈피한 북경어권의 영화감독들인 호금전, 장철, 초원의 <大醉俠,1966>, <獨譬刀, 1967-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玉夢香,1970>을 거쳐 칼싸움에서 주먹싸움으로 넘어가 왕우,  성룡, 홍금보 등을 낳은 쿵푸 코메디, 북경어-광동어 차이가 없어진 서극의 SFX 무협영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무협장르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왜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 장르인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     

 홍콩영화 가운데 무협영화는 전통문화를 전수하며 서양의 영향을 거리낌 없이 흡수하는 자질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중국인의 정서를 정확히 읽어내는 열의와 실험정신, 중국적인 것을 국제적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시대흐름에 대해 발빠른 대응전략들을 능히 짐작케 해 준다.

  60년대 북경어 무협영화의 등장 시 홍콩영화는 카메라 조작, 효과, 스턴트 외에도 대결방법까지도 서구와 일본영화에서 배웠고, 80년대 후반에 오면 할리우드의 특수효과나 TV물의 상상력과 소설적 대사까지도 받아 들였다. 이처럼 언제나 중국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접목을 추구해온 홍콩영화에 대한 특성을 염두에 두고 무협영화장르를 다루어 보자. 무협영화장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뒤에 별도의 장으로 다루게 될 근대의 무협소설이다.


  2. 2. 무협영화와 무협소설

       근대 무협소설이란 수 천년 된 기서나 무림전설을 지닌 중국의 전통이 근대의 과도기적 현상 속에서 가정 세대 집단적인 충돌을 근대적으로 반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대중소설양식이었다. 흔히 김용, 양우생, 와룡생, 고룡의 소설이 무협소설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청말 민초부터 무협소설은 대중들의 큰사랑을 받았고 1920년대 무협소설을 각색한 최초의 영화가 만들어지면서부터 무협장르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흔히 ‘성인들의 동화’로 이름 붙여진 무협소설과 무협영화는 과도기적 사회현상을 겪은 대중들에게 현실세계의 시공간을 완전히 벗어나 가공의 세계를 무제한적으로 상상하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 가공의 세계는 신비한 무림세계, 신천지, 광대한 중국대륙에서의 영웅과 미녀의 사랑, 협객과 표사, 화상과 도사, 탕녀와 음부 등등의 비현실적인 신비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충돌과 무력감, 혼돈을 무공대결, 복수, 권력쟁탈로 변형시키며 대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梁守中의 中國武俠古今에서-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무협영화나 무협소설을 일종의 영화나 소설 속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술보다 예술을 우선시한 경향이 있으나 송 명 왕조의 전통을 계승한 식자층에는 멸시의 대상이었고 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화들이 홍콩에서 집중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시기는 무협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계기로 무협소설과 무협영화가 사이좋게 발전하게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무협’은 앞서 말했듯이 홍콩영화의 주류 작이다.     홍콩영화가 처음 세계에 이름을 드높이게 된 계기도 무협을 통해서 가능하였고 현재 홍콩영화를 휩쓸고 있는 것 또한 “풍운” “중화영웅” 등의 무협영화 들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이유이다.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로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홍콩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받아야 했고 이들은 그저 부를 쌓아 가는 데만 열중했다. 이런 홍콩인 들의 세계관은 강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무협 영화 속의 영웅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협지를 노할 때 무협영화를 빼 놓을 수 없다. 무협지를 따라 들어온 이른바 ‘홍콩영화’는 무협지와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오랫동안 천하를 지배했다.


3. 무협영화의 교육적 영향

  열강들의 무력 다툼으로 탄생한 홍콩이라는 도시와 봉건시대와 자본주의시대의 폐해, 그 속에서의 혼란상은 자연히 무협영화로 수렴되었고 홍콩에서는 50년대 초기에 홍콩으로 이주한 북경어권과 원래의 광동어권의 주도권 쟁탈 속에 점차 대중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영화적으로 50~60년까지의 무협영화는 내용상 가정 혹은 사무의 유가윤리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봉건적 유대관계가 파괴되었을 때에는 지체 없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폭력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테마 속에서도 정의와 진실도 강력한 실질적 실력의 배경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타의에 의하여 도태 될 수밖에 없다는 약육강식의 진리를 비정하고 철저하게 각인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협영화의 특징이다.

  전쟁 후에 인기를 끌었던 광동어권 무협영화는 60년대 말기에 쇠락 하고, 77년까지 북경어권 영화로 대체되는 비운을 맞게된다. 신파 북경어권 무협영화는 60년대 중기에 발흥하여 70년대 초에 이르러 쿵푸영화로 갈라졌으며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무력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관거회상적인 TV씨리즈 물의 영향으로 광동어가 다시 인기를 모으면서 쿵푸, 쿵푸코메디도 광동어로 제작되는 양상을 보였다. 90년대에는 마치 봇물 터지듯 쿵푸, 액션, SFX로 포장된 무협영화가 뒤섞여 쏟아지면서 대사도 북경어-광동어 2개의 언어로 제작되어 점차 언어의 구분이 사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사회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84년 중국과 영국의 공동성명으로 홍콩반환이 공식화되면서부터 홍콩인들은 영어를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북경어 학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92년 홍콩이 중국으로 편입된 지금의 시점에서는 거의 무협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4. 參考文獻  

   동아출판사폅집부 編著 <20世紀世界大觀> 1963. 동아출판사

   김학주 외3인 共著 <중국공연예술> 2002.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國史百科事典編纂委員會 編著 <國史百科事典> 1975. 東亞文化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