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子

 

第 1 逍遙遊


  北溟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徒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북쪽의 어두운 바다에 살고있는 물고기가 있었다. 그 이름을 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리 인지 알 수가 없다. 이윽고 새로 化하여, 그 이름을 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한번 힘차게 날개를 치면, 그 날개는 하늘을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새는 이윽고 바다가 폭풍으로 들끓으면 남녘 어두운 바다로 옮기려 한다. 이 남쪽 바다란 곧 天池를 말하는 것이다.

  齊諧라는 이는 志怪를 많이 알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기려고 할 때는, 날개를 펴서 3천리에 미치는 수면을 치고 치솟는 회오리바람에 날개를 흔들면서 구만리 높이에 올라간다. 이렇게 하여 계속 여섯 달을 날아서 목적지에 도착하여 쉬는 것이다.   

   九萬里 상공에 떠있는 大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지상의 온갖 빛은 사라져 버리고 오직 푸른 빛 하나가 있을 뿐이다. 莊子의 根本思想인 萬物齊同, 絶對 無差別의 境地를 암시하고 있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칠 수가 없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칠 수가 없다. 매미나 비둘기 따위가 어찌 大鵬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가.

  天地의 正道에 몸을 싣고 자연의 변화에 걸터앉아서, 무한의 세계에 노니는 자에 이르르면 이미 아무것에도 기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至人에게는 私心이 없고, 神人에게는 공명심이 없으며, 聖人에게는 명예욕이 없다>고 이르는 것이다.

  한정된 사고를 가진 사람은 바가지란 물 퍼내는 그릇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박을 사용하지 못하고 깨어버리는 것처럼, 발상의 전환으로 지붕이나 배를 만들어 쓸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어떠한 방법과 방편들이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과 사고에 따라서는 엄청난 결과를 달성하게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한사람의 가장은 손이 트지 않는 약 처방으로 가정을 꾸려 가문을 이어가지만 한 장군이 이 약의 처방을 이용하여 전쟁을 이기고 나라를 구했거나 건국을 했다면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될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 용기를 키워, 큰 기획을 하고 이를 실천했을 때, 그 결과는 반드시 그 기획과 실천의지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대망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다.

  

第 二 齊物論


  齊物論은 莊子의 中心思想을 나타낸 것이다. 齊物이란 “만물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며, 萬物齊同, 絶對 無差別의 論理가 展開되고 있다.

  인간이 사람이 연주하는 음악소리는 들으면서도 땅과 하늘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地籟라는 것은 이 地上에서 생기는 온갖 음의 총칭이다. 그 音의 근본이 되는 것은 바람인데, 바람 자체에 소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온갖 형태의 구멍에 접함으로써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地籟란 무수한 구멍이 내는 소리를 말하고 人籟란 피리 같은 악기소리를 말하는데, 天籟란 갖가지로 다른 것을 불어서 저마다 특유한 소리를 스스로 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고있다. 만물이내는 내는 여러 가지 소리는 그들이 스스로 택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天籟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 너무도 간단하고 含蓄性이 있는 말로 맺고 있기 때문에 매우 難解하다.

  앞에서, 보통 바람소리라 말하는 것은, 실은 구멍이 내는 소리이며, 바람 그 자체에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怒號나 悲鳴과도 같은 여러 가지 바람소리는 실은 구멍 그 자체의 형태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며, 구멍 스스로가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바람이 없는 데서는 구멍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즉 지상의 요란한 소리는 소리 없는 바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소리도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극 無나 다름없는 바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근원에는 無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의 근원에 있는 無, 雜多한 現象의 근본에 있는 그 무엇, 主宰者 ・ 造物主 등의 사상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다.

  큰 나무의 구멍들이 그 형태에 따라서 갖가지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千差萬別의 반응을 나타낸다. 莊子는 우선 人間煩惱의 여러 가지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구멍도 바람이 없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도 그 背後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天籟의 바람이 무수한 구멍에 저마다의 소리를 네게 하듯이, 인간의 감정이 일어나는 배후에도 무엇인가의 존재가 있음이 예상된다. 그것은 宇宙의 主宰者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主宰者는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인간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안 된다. 이 主宰者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 齊物論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그 이전에 解明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主宰者자, 天이며 道이며 自然이며 運命이며 絶對的인 하나라는 것은 다음에 밝혀진다.

  萬物齊同의 論理를 펼치고자 하는 莊子는 먼저 인생의 현실을 파헤친다. 인생을 똑바로 반성하면 할수록 그것은 가엾고도 슬픈 것이다.

  萬物齊同의 논리를 펼치기에 앞서 莊子는 常識的인 논리를 강조한다. 당시는 惠施를 비롯한 詭辯學者들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莊子도 그 영향을 다소 받은 듯하지만, 그러나 莊子 자신의 의논은 어디까지나 엄정한 논리 위에 서 있었던 것이며, 詭辯學派의 논리와 혼동되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莊子의 시대에는 儒家와 墨家를 비롯한 諸子百家가 競合하여, 진리의 所在가 가려질 정도였다. 그러한 議論 대립을 초월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莊子 哲學의 出發點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莊子의 궁극적 목적은 萬物齊同의 이치를 밝히는 데에 있다.

  差別이란 人爲的인것이고 人爲를 초월한 자연의 처지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하늘에 비춘다. 따라서 聖人은 이와 같은 상대 차별의 처지에 서지 않는다.

  여기서 비로소 萬物齊同의 이치를 말한다. 그 論理가 매우 까다로운 것은, 그 내용의 性質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莊子가 惠施 등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莊子는 公孫龍子의 <指物論>과 <白馬論>을 비판했다.  詭辯論者들은 애써 個體와 普遍의 관계를 다루면서 그 취급 방법을 그르쳤기 때문에 지식의 혼란만을 가져왔다. 사물을 보는데는 먼저 普遍的인 처지, 萬物齊同의 입장에 서서 個體의 세계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말이나 실제가 다 아무런 변함이 없는데도 喜怒의 정이 작용함은 자기 자신의 천박한 是非心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것은 원숭이들의 사고를 빙자한 朝三暮四라고 한다. 원숭의 먹이를 아침에 3개주고 저녁에 4개주거나, 아침에 4개주고 저녁에 3개를 주어도 변함이 없는 것인데 원숭이들은 먼저 4게를 주는 쪽을 좋아한다는 데서 出典이 되어 못된 술법으로 사람을 속이는 말로 통용된 것이다.

 莊子는 道에 대한 見解를 세 가지 들고 있다. 따라서 萬物齊同의 내용도 三段階로 나누인다.

  1. 道는 無이므로 차별이 없다.

  2. 사물은 존재하나, 사물과 사물을 구별하는 境界가 없는 것이므로 萬物은 일체이다.

  3. 사물의 존재 그 자체에는 구별이 있지만, 그러나 사물의 가치는 모두가 같다. 價値上으로 보아 萬物은 같다. 이 세 가지 見解는 이 책의 도처에서 보이는데, 우선 昭氏의 거문고에 대한 議論은 1에 관한 것이다. 道는 無이며, 無限이며, 無限定한 것이다. 뜯지 않는 琴에는 無限한 音이 갖추어져 있다. 이 琴에 손을 대어 일정한 音을 내게 하면 그 無限한 것이 限定을 받아 有限한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은 無限한 道를 무너뜨리는 것이라 한다. 晉의 陶淵明이 絃이 없는 琴 소리를 즐겼다고 한 것은 이 無限의 도를 즐긴 것이리라.

  人生을 現實이라 볼 때에 죽음은 現實性이 없다고 보는 것이 常識이다. 그러나 萬物齊同의 처지에서 보면 삶과 죽음이 다 같다. 당연한 결과로서 人生의 現實性도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여기서 人生을 꿈으로 여기는 思想이 생기는 것이다.

  엷은 그림자는 그림자를 따르고, 그림자는 形體를 따르며, 形體는 때와 변화와 운명에 따른다. 萬物齊同의 境地에서 보면, 一體가 서로 依存하고 絶對的인 것이 없다. 오직 최후에 남는 것은 때의 변화이며, 운명의 흐름뿐이다.

  언젠가 나는 꿈속에 나비가 되어 마음껏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莊周라는것도 몰랐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떠보니, 나는 틀림없는 莊周였다. 도대체 莊周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莊周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莊周와 나비는 구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별할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사물의 변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胡蝶夢>이라는 말의 출전이 되는 것으로, 佛書나 詩文에 많이 引用되고 있다.


讀後感

제1 逍遙遊

  宿題를 하기 위해 책장 깊은 구석에서 뽀얀 먼지에 쌓인 莊子를 꺼내 읽어본다. 가끔 참고부분을 찾아보던 것과는 달리 정독을 해 본다. 함부로 지껄여왔던 古談의 근거가 다른데 있음을 깨닫게 한다. 고인들의 우주에 대한 선견지명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예리했음을 입증하는 듯 했다.

  逍遙遊란 정처 없이 떠돌며 노니는 것이며, 여기서는 九萬里 天空을 나는 大鵬처럼 아무것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의 경지에서 노니는 莊子의 心境을 敍述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군자의 심경이기 전에, 莊子는 지구 성층권의 위성궤도와 우주를 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한여름 밤에 앞마당 모닥불 연기를 씌우면서 모든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古談이 생각났다.

  (아마도 장자의 첫 구절을 인용한 듯 하다) 옛날에 양 날개를 펴면 삼천리가 넘고 이 날개를 아래위로 저으면 삼만리를 날아간다는 대붕이 있었는데,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구경하고 돌아 올 작정으로 사흘 밤낮을 깃털에 기름을 묻혀 닦고, 9천리를 한번에 뛰어 올라 대양을 건너기 시작했단다.

  하루종일 날개 짓을 하여 끝이 없는 대양을 넘어 가다가 해가 저물어 부득이 망망대해에 쌍둥이처럼 떠있는 큰 섬 하나에 내려앉아 밤을 지새고 이른 새벽에 다시 떠났다.

  또 하루를 날아 바다를 건넜으나 끝이 없었고 또 해가 저물어 저 멀리 가마득히 보이는 작은 두 섬 한쪽에 내려앉아 밤을 쉬기로 했는데, 갑자기 섬이 움직이며 대붕을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뉘기에 어제는 내 왼쪽 뿔에서 잠을 자고 인사도 없이 떠나드니, 오늘 또 내 오른쪽 뿔에서 잠을 자려 하는고?” 하는 것이었다. 대붕이 놀라 되묻기를 “어른께서는 뉘 신데 저를 도와 주십니까?” 라고 물었단다.

 “나는 數 億汲을 살아온 새우일세! 심심하여 바다 끝이나 보려고 산책을 나왔는데 아직 찾지를 못했네... 어린 자네에게는 부질없는 일 같으니 집으로 돌아가 근신이나 하게! 했단다.” 무릇 군자는 대망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도, 대망일수록 허세와 이기심을 위한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숙제를 하는 지금의 나는 齊諧가 志怪로 莊子의 逍遙遊를 설명한 것은 지구의 成層圈을 이야기 한 것이라면, 凡人인 부친께서는 齊諧의 志怪을 빌어 그 보다 더 큰 莊子의 宇宙를 설명하여주신 것임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第二 齊物論      

  萬物齊同의 眞理를 읽으면서 人間의 自由意志가 宇宙속으로부터 왔음을 알게 하는 것 같다. 특히 현대의 유전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종의 구분을 무시하는 혼돈상태에서 멸종의 위기를 찾을 수 있는 철학이 바로 莊子가 될 수도 있다는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인간의 사고도 萬物齊同의 원리에 입각하여 파악한다면, 신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표현의 일부를 형상화하거나 느낌의 일부를 인간들의 작은 是非心에서 한정하여 강조한 것이며, 이마져 쉽고 편리한 방법만을 고집하는 이기적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십대의 사고, 중・장년의 사고, 노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나, 이를 다르게 판단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현대적 이념이라는 진보와 보수, 개혁과 안정, 퇴보와 혁명 등도 학자들이, 위정자들이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을 빌려 是非心으로 판단한 것이 得勢하여 萬物齊同의 眞理를 벗어남으로서 현대사회의 계층별, 세대별, 분야별로 분열과 배반과 혼동을 낳은 것이며, ‘强者唯一存續’의 人間世界를 만들어 가고 있는 지금의 現象을 莊子는 예전에 看破하고 예언한 것 같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