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요약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3년 이수지  

 

목    차


         1. 백법일지(白凡逸誌)의 사상(思想)

              1. 1. 독립국가 사상

              1. 2. 교육 사상

              1. 3. 정치 사상

              1. 4. 미래국가관

         2. 백범의 생애

              2. 1. 소년 백범

              2. 2. 장년 백범

              2. 3. 장,노년 백범

         3. 임정시대상황과 나의 생각

              3. 1. 임정시대와 지금의 정부

              3. 2. 공산주의의 불변

              3. 3. 내가 바라는 미래의 조국

         4. 맺음

             參考文獻

             白凡逸誌 金    九  著

             都 珍 淳  註解  圖書出版 돌베개 2002.




1. 백범일지(白凡逸誌)의 사상(思想)


    감히 백범일지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 표현한다면 “개혁을 위한 무궁한 도전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이러한 ‘무궁한 도전’이 고유한 민족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의지적인 공동의 신념과 청렴한 희생이 수반될 때만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입증하는 듯 하다. 백범일지(白凡逸誌)를 탐독하고 그의 생애를 요약․재구성하여 나름대로 평범한 자전적 기록중의 사실들을 백범선생의 주장이라고 여겨 백범일지의 사상이라는 제목을 서문으로 사용하였다.


  1. 1. 독립국가 사상


         백범일지의 독립국가 사상은 민족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창하고 있다.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세워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현실의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민주주의이며 자주독립국가라고 하였다.

  모든 종교사상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민족주의를 진리의 범주에서 버리려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였으며, 철학․정치․경제의 학설과 종교마저도 영원한 민족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 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힘을 기르는 낙을 삼아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는 명제를 기억하여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박제상의 말이 있다. “내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고 한 것은 독립한 제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원한 민족혈통을 부정하여 생겨난 불행의 연속이 중동의 사태이다. 종교사상을 빌미로 민족을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독립국가의 이웃을 인정 할 줄 모르는 잘못된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다.


  1. 2. 교육 사상

         백범일지의 교육사상은 홍익인간이라는 우리의 건국이념을 살려 우리민족이 세계사의 주도적 민족이 되는 것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하였다. 문화의 힘은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으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닌 문화적 원천을 발굴하는 교육이다. 교육으로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정신을 배양하는 높고 새로운 독창적 문화를 창조하고 이룩하는 것이 교육 사상이다.


  1. 3. 정치 사상


        백범일지의 정치 사상은 자유 민주주의 이다.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자유는 국가가 생기기 전이나, 레닌의 말처럼 국가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으로 이를 법이라 한다. 이러한 국가 속에서 자유와 자유 아님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에 달려있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독재 또는 전제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이를 파쇼라고 한다. 우리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라 할 것이다. 모든 계급독재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 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서 행하여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과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우리나라가 망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요 방식일 뿐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이다.


  1. 4. 미래 국가관


        우리의 적이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안하면 망하고, 나라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우리 국민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 위한 사명을 갖기 위해서는 각자가 이기적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부지런한 가장처럼 남을 배려하며 한없이 주기 위한 자유를 갖는 나라로 만들어, 우리 조상들이 좋아하던 仁厚之德이 충만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옛날 漢土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가 우리민족이 사는데 오고싶다가 하였으며, 우리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말하였으니 세계인류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사모하도록 가꾸어 나아야 한다.


2. 백범의 생애


    백범 김구선생의 생애는 70여 년의 평생동안 파란만장의 극치에서 청렴결백한 의지로 인류의 사고개혁을 위하여 항구적으로 도전하는 삶이었다. 작게는 자신의 인격도야와 입지적 성취로 폄하시킬 수도 있겠으나 본 逸志에서는 선생의 실천적 행동과 의식적 사고는 인류의 궁극적 목표인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지도하는 사랑과 믿음의 아름다움을 남기셨고 불후의 평범함 속의 위대함을 알게 하신 민족지도자의 청렴함을 보여주신 위대한 생애라 믿는다.

  

  2. 1. 소년 백범


       자진하여 천민으로 전락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향학심은 지대하였다. 매사에 철저하여 양반과 상놈의 지나친 불평등 사실을 깨닫고 양반(진사)이 되기 위해 서당에 다니기를 애원하여 결국은 마을에 상놈 아이들끼리 공부하는 서당을 만들어 열두 살 되는 해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부친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어 타지방의 서당을 ‘면비학동’으로 다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는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를 익혔고 한․당시와『대학』통감』을 배웠고, 17세에는 경과(慶科)를 보기도 했으나 낙방하였다. 그 당시에도 학연과 혈연 등의 인맥을 가져야만 등과 할 수 있는 한말의 부정부패의 극치 속에서 실력과 학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차제에 사화개혁을 위한 자학이 필요한 것을 알고 『상서』중의 한 구정을 학습 좌우명으로 하여 내적 수양에 힘쓰게 되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때부터 병서인 『손무자』『오기자』 『삼략』『육도』등을 공부하면서 지도자의 길을 스스로 배우기도 했다.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泰山覆於前 心不妄動)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 (與士卒 同甘苦)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進退如虎)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지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敗) 등을 공부하며 일가아이들을 모아 훈장질을 하면서 병서에 심취하였다.

 18세 되던 해에 동학에 입도 하여 그 이듬해에 양반 상놈의 계급타파를 위한 혁명의 선봉부대장이 되는 동학 접주가 되기도 했었다. 동학이 패퇴하여 흩어지고 간신히 목숨을 구한 소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본명)는 스승 고능선을 만나 충절과 의리를 배우고 미래의 정국을 위하여 봉사 할 수 있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출국을 권유받을 때까지 인격도야와 신학문의 연구에 심취하였다.     


  2. 2. 장년 백범


         한말의 정국은 왜의 만행이 극치를 이룰 때이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매국노의 원성이 더 높은 시기라 모두가 애국하는 일을 위해 초개같은 생병을 버리려는 애국지사가 많았다. 스승의 권고로 북행 견문과 청국을 시찰하기 위하여 부리던 말을 팔아 여비를 준비하여 15살 연상인 김형진과 함께 참빗 장수를 가장하여 유랑을 떠난 것이 질풍 노도 같은 청년기의 유랑이었다. 처음 강계에서 김이언의 의병궐기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단발령이 내려지고 왜의 내정관습이 극에 달하여 국모가 시해된 직후 치하포에서 국모를 살해한 왜인을 죽여 복수를 하였던 청년 백범은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고종황제의 형 집행 보류를 기화로 탈옥하여 이름을 김구(金龜)로 바꾸어 미래 교육의 교육자로서 충심으로 청렴한 봉사활동으로 끊임없는 풍운의 길을 계속하였다. 예견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구국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구국지도자의 소탕작전을 전개한 일본헌병은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애국지사들과 교육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청년 김구도 1911년 36세 당시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기어이 헌병소장에게 체포되어 조작된 누명(보안법위반)으로 기약 없는 15년의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과 인천형무소를 전전하며 청년기를 감옥생활로 허송하게 되었으나 옥중에서도 민족의식개혁을 위한 혁명교육운동을 지속하여 풍운의 역경을 2중으로 겪었다.  


  2. 3. 장․노년 백범


         40세가 되는 1915년 8월 가출옥하여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 학교로 갔다. 그 이듬해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어서도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워 계몽교육을 계속하였다. 장년의 백범은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의 임무와 직무에서도 변함 없는 성실성과 청렴성은 모든 이로 하여금 스스로 자각하여 개혁의지를 갖도록 하였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애국열사와 민족의 일꾼을 만들어 내는 불사조 같은 백범을 왜정은 가만두지를 않았다.

  1919년 2월 독립선언서가 각지방에 배포되자 만세를 부르며 청천벽력과 같은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백범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만들고 정부 청사 문지기를 바랐던 순수한 봉사정신의 애국지사 백범은 최초의 경무국장에서 최후 임정수석의 직분을 완수하며 끝까지 독립운동을 주관하시고 최후의 광복을 얻으셨다.

  임정시 대 내외적으로 곤궁한 여건에서도 국제적 지원과 신뢰를 얻어 결사의 광복 의사들의 순국을 정의롭게 도와 그 이름 빛나게 하신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애국신념은 어느 영웅과 비교 할 수 없는 신성함이 있었다. 기어이 광복을 맞아 민족의 영도자로서 추앙을 받고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 위대함은 오직 청렴한 애국정신으로 민족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3. 임정시대의 상황과 나의 생각


   시련의 임정 때에도 사상과 종교를 앞세워 민족의 이름을 외면한 임정내분은 시련과 멸망을 자초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민족자결을 위하여 외국정부에서 도와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지원자금을 횡령 착복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독립운동의 민족사에 남은 최악의 오점이라 생각된다.

 한말의 삼정문란과 왕정내분으로 국권을 왜에 강점 당한 때부터 임정과 광복후의 정부를 거쳐 현재의 국민의 정부에서도 개혁과 국리민복을 위하여 투입된 공적자금이나 국민의 혈 세를 부정 부패관리들에 의해 횡령 또는 유용하여 국민을 핍박하고서도 그 책임을 변명과 국민에게 전가하고 있는 사실을 명료하게 지적해 주는 것 같다.


  3. 1. 임정과 현 정부의 비교


         대한민국 원년(1919)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해방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단순하던 우리의 임시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져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주주의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는 공산혁명을 주창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내부에 모략과 파벌양상의 괴이한 현상들은 지금우리의 정국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국무회의에서 여운형․안공근․한형권 3인을 뽑아 러시아에 대표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여비를 갹출하던 중, 금전이 입수됨을 알고 이동휘가 심복인 한형권을 먼저 파견하여 소련의 ‘레린’으로부터 지원 받은 운동자금을 공모 횡령하고 후에 공산당 운영자금으로 한 사실 등은 지금의 우리나라의 정당자금의 투명하지 못한 운영양태와 정당들의 내분은 임정당시의 7당 분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3. 2. 변하지 않는 공산주의 사상


         임정당시의 공산당의 불신과 모략, 이기적 흑백 분리는 마치 영원한 진리처럼 조금도 변하기 않고 지금도 그 잔상이 민족사상을 괴롭히고 있다. 임정의 한인 공산당은 오직 자신들의 사상과 자기들의 편익만을 생각하여 임정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광복운동의 신뢰성을 잃게 하더니, <레린>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자 공산당도 독립․민족운동을 당시(黨是)로 정하고 좌우합작의 ‘유일독립당촉성회’를 성립 시켰다.

  지금 남북의 형상을 이 당시로 되돌려 보았을 때 북한은 신뢰성과 편익성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들의 진리를 지금도 예전처럼 주장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인의 공산당이 스스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지금 우리의 마음은 검은색이 분해되어 무지개 7색으로 바뀌는 맑은 어두운 하늘을 보려는 느낌과 같다.


  3. 3. 내가 바라는 미래의 조국


       백범일지에서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선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우리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이 상태에서 현재 진행중인 데탕트에 허물어지거나 나태해지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백범일지의 미래를 위한 예견을 그대로 믿고싶다.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백범선생의 생애에서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정치사상을 행동으로 보여준 역사적 사실’을 좁은 나의 소견으로 지적하고 지나친 ‘허상의 명예’를 위하여 합리적 이치를 다소나마 경시하신 단점이 있다고 보아 일부는 “자가당착”을 부른 불운한 생의 종말을 얻은 결과가 되었다고 미련스럽게 생각해 본다.

  외세에 의하여 광복을 얻었으나 남북이 이념으로 갈라져 꼭두각시 두 정부가 생겨났고,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들의 항구적 신뢰성의 결여”를 어느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여기시던 선생께서 오직 하나의 민족이란 연약한 핑계를 앞 세워 ‘삼팔선을 베고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들을 포용하시겠다는 그 가식적 위대함은 스스로 민족의 전도를 위한 청렴한 봉사를 포기하신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지금의 어린 마음에도 이해 할 수 없는 회한으로 남는다.


4. 맺음


   예나 지금이나 영도자의 길은 험난한 것임을 보았다. 그 험난함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목적이 순수하고 대상을 위한 청렴한 희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훌륭한 자식이 생겨나는 것은 어버이의 진실한 희생이 있어야 하고, 어버이를 믿고 감사하는 자식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위대한 영도자의 탄생은 한 국민이나 한 민족의 희생적 신뢰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만 그 신뢰는 영도자 스스로 국민과 민족을 위하여 진실하고 청렴한 봉사를 할 때에만 얻어지는 선물이라는 것도 절실하게 보았다.

  평범함 속에서 위대함이 있다는 백범의 의미를 믿는다. 오늘날의 우리지도자가 우리의 신뢰를 모두에게로부터 얻지 못하고 개별적 한정의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마도 대상의 범주를 말과 행동으로 정함이 일치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영도자들의 위대한 삶이란 진실하고 청렴한 봉사를 했던 대상이 한 민족이나 한 국민 또는 전 인류가 되었을 때 사후에 봉사의 결과로 얻은 행복의 크기를 그들로 하여금 인식된 정도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어느 국가의 원수나 제왕이 모든 국민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청렴하게 산화하여 봉사하지 못하고 자신의 족속과 개인의 명예와 영달만을 위한 생애가 위대한 삶으로 추앙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실천적 행동으로 위대한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는 일이 개혁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  


參考文獻

白凡逸誌 金    九  著

都 珍 淳  註解  圖書出版 돌베개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