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新編三國遺事卷第二 紀異第2-2


1. 新羅三國統一後 滅亡까지

文武王 法敏

   王初卽位辛酉(661)에 泗沘南海에 身長73尺 足長6尺 陰長3尺 或은 身長18尺 封乾2年丁卯 女子屍體가 있었다. 總章戊辰에 王이 唐軍과 會合하여 高句麗를 滅하고 唐帥李勣은 高藏王을 잡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唐高宗은 “네가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군사를 해치려는 것은 어떤 어쩐 까닭이냐?”하며 仁問을 가두고 薛邦을 大將삼아 50萬鍊兵으로 신라를 치려하였다.

  角干 金天尊은 明郞法師가 龍宮에서 秘法을 받아왔다고 하면서 왕에게 狼山 남쪽에 神遊林이 있는바 그곳에 四天王寺를 짓고 道場을 개설하면 될 것이라고 하여 사천왕사를 지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禮部侍郞 樂鵬龜를 보내어 사천왕사를 시찰하게 하였으나 신라는 그에게 황금1천냥의 뇌물로 매수하여 신라가 천왕사를 세워 이곳에서 황제의 장수를 빌더라고 속이게 하였고 당나라는 사신의 말을 따라서 望德寺라고 하였다.

萬波息笛

  제31대 神文大王의 이름은 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 원년 신사 7월7일에 즉위하여 영명한 선대부왕인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해변에 감은사를 지었다. 이듬해 壬午年 5월 朔日 파진찬 朴夙淸이 동해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로 떠와서 파도가 노는 대로 왔다갔다하였다고 왕께 아뢰었다. 왕이 天文官吏 金春質더러 점을 쳐 보라고하니 그는 선대임금이 지금 바다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은 33천의 한 분으로 인간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고 두분 성인은 덕행이 같은지라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리시려는 것 같사오니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보시면 큰 보물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배를 타고 거북머리같이 생긴 떠다니는 산으로 들어가 보니 용이 검정 옥띠를 가져와 바치는지라 왕이 영접하여 묻기를 이산과 대나무가 갈라졌다 맞붙는 까닭을 물으니 용은 대나무는 마주 합한 연후에 소리가 나는 것이므로 젓대(笛吹)를 만들어 부시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 하였다.

  왕은 젓대를 만들어 月城의 天尊고방에 간직하였는데, 이 젓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오고, 장마엔 비가 개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잦아졌음으로 젓대(萬波息笛)라 하여 국보로 일컬었다.

孝昭王시대의 竹旨郞

 제32대 孝昭王 시대 竹曼郞득의 花郞무리 가운데 得烏谷 급간이 風流黃卷에 이름을 등록하였고 竹曼郞은 得烏谷을 비롯한 모든 화랑을 소중히 생각하며 부하들을 귀하여 여겨 보살펴 주는 지도자의 표본이 되었다. 이 竹曼郞의 영혼이 삭주 도독사 述宗公의 아들로 輪生하여 竹旨郞이 란 이름으로 副帥가 되어 諛臣公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으로 得烏谷은 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다.

聖德王

 제33대 聖德旺 神龍2年 丙午에 흉년이 들어 丁未年 正月朔日부터 7월 30일까지 救民給租하였는데 모두 30만5백석이었다. 왕은 태종을 위하여 봉덕사를 창건하고 이레동안 仁王道場을 배설하였으며 죄수들을 대사 하였다. 이 왕대부터 처음으로 侍中이라는 관직을 두었다.

水路夫人

  聖德王 시대 純貞公이 江陵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태수의 절세미인인 수로부인이 天涯石壁에 핀 진달래꽃을 꺾어주기를 바랐으나 아무도 올라갈 사람이 없었는데 새끼 밴 암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다 주면서 노래까지 지어 주었다.

<獻花歌> “붉은 바윗가에서 손에 잡은 어미소 놓으시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면 꽃을 꺾어 드리오리다.”

  또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던 판에 해룡이 부인을 채 가지고 바다로 들어갔다. 또 다시 그 노인이 나타나 백성들을 시켜 노래를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 내놔라. 남의 아내 훔쳐간 그 죄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먹겠다”

孝成王

  開元10年 壬戌10月에 毛火郡에 關門을 지었다. 지금의 경주동남쪽으로 일본을 방비하는 울타리로 주위가 6,792보 5자, 역군이 39,262명이 동원되었고 공사감독은 元眞 角干이었다.

  開元21년 癸酉 당나라가 북쪽 오랑캐를 치려고 신라에 請兵을 위한 사신 604명이 왔다갔다.

景德王․忠談․表訓스님

왕은 2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3월 삼짇날 歸正門樓에서 忠談스님을 만나 대사의 耆婆郞을 찬미하는 詞腦歌가 그 뜻이 고상한가를 물었을 때 그렇다고 하였다. 왕이 백성들이 편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으라고 하니 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임금은 아비여 신하는 자애로운 어미여 백성은 어린아이라 할지 백성이 사랑하는 이 압내다.

윤회의 차축을 괴고 있는 갓난이 이들을 먹여서 편안히 하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할지 나라를 보존할 길 아노라. 아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 하오리다.”

耆婆郞을 찬미하는 노래에는

“우러러보니 뚜렷한 저 달은 흰 구름 좇아서 떠가지는 않거니 물이 파란 나룻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고나. 일옷내 벼랑에 낭이여 지녀야 할 마음의 갓을 좇으려 하노라.

아야, 잣가지 높아서 서리를 모르는 꽃 한이여.”

 왕의 생식기는 길이가 여덟 치로,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여 沙梁부인으로 봉하였다. 다음 왕비는 滿月夫人이니 시호는 景垂태후요, 依忠 角干의 딸이다. 왕이 表訓스님에게 아들이 생기기를 간청하여 나라가 위태해 지더라도 딸보다는 딸 같은 아들을 얻고 태자가 여덟살이 되어 왕이 죽고 태자가 등극하니 이가 혜공대왕으로 되었다. 태후가 조정을 관여하였으나 나라가 어지럽고 선덕과 金良相없에게 살해되고 표훈이 죽은 후로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惠恭王

  大歷 초기에 땅이꺼져 연못이되고 天狗별이 떨어지고  今浦縣에있는 논5경이 쌀낟으로 이삭이 되었다. 범이 궁성 안으로 들어오고 角干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모여드는 것은 安國兵法하권에 전국에 큰 난리가 난다고 하여 왕은 죄수들에게 대사를 내리고 자기 반성과 몸조심을 하였다. 7월에 대공 각간의 반란이 일어났다. 서울과 다섯 도의 주군을 아울러 96각간이 서로 싸워 큰 난리가 일어나 대공 각간의 집은 망하고 그 집의 재산과 보물이며 비단 등을 대궐로 실어 들렸다. 표훈대사의 예언과 같았다.

元聖大王

  대왕이 해몽으로 임금이 되었고 사람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운명을 잘 알게 되었음으로 身空詞腦歌라는 노래를 지은 것이 있다.

神武大王과 閻長과 弓巴

 제45대 神武大王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의협스러운 인물 궁파(장보고)에게 말하기를 나의 원수를 처치 해준다면 임금이 된 뒤 너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겠다고 약속하였고, 궁파는 이를 승낙하고 군사를 일으켜 협력하여 서울을 침공함으로써 성공하였다. 그러나 왕은 약속을 어기고 궁파가 왕의 배신을 원망하며 반란을 꾀하였다. 왕은 장군 염장을 보내어 궁파를 암살하였다.

48代 景文大王

 왕의 이름은 膺廉이요, 나이 열여덟 살에 國仙이 되었다. 나이 스무살 때에 憲安大王이 낭을 불러 행실이 바른 세 사람의 이야기를 물었다. 낭이 말하기를 남의 윗 지위에 있으면서 겸손하한 사람이 첫째요 큰부자로서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둘째요 근본이 세도양반이나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 셋째라 하였다.

處容郞과 望海寺

  재49대 憲康大王 시대에 서울로부터 동해어구에 이르기까지  초가집 한 채 없이 총총 늘어서고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아 풍요로웠다. 이때 왕이 開雲浦(울주)에 나가서 놀다 돌아오는 길에 용의 장난으로 안개가 짙어 길을 잃었다. 왕이 용을 위해 근방에 절을 세우라고 했을 때 안개가 걷혔다고 하여 개운포라는 이름을 지었다.

  동해용의 아들 일곱 중 하나가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왕의 정치를 보좌케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고 하였다. 왕이 미 부인을 맞게 하여 마음을 안착시키고 급간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병귀신이 탐을 내어 사람으로 변하여 밤이면 그 집에 가서 몰래 데리고 잤다. 처용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리 속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이때 귀신이 처용의 앞에 나타나 “내가 당신의 아내를 탐내어 상관하였으나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게 생각한 나머지 당신의 얼굴만 그려 붙여 둔 것을 보아도 문안에 들지 않겠소” 하였다. 이 노래가 처용가이며 이 춤이 처용무이다.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걸 어쩌리”

  이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이거나 춤을 추어 나쁜 귀신을 쫓고 복을 맞아들이는 풍습이 생겼다.

眞聖女王과 居陀知

  제51대 진성여왕이 정치를 한지 몇 해 동안 유모 鳧好夫人과 男便 魏弘 잡간 등 신하들이 세도를 부려 정치가 어지럽고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불교주문인 陁羅尼로 은어를 만들어 망국의 징조를 걱정하며 원망하였다.

 “남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 사바하”

 왕은 당시의 文人 王居人을 잡아 가두었고, 그는 시를 지어 하늘에 고하니, 옥에다가 벼락을 쳐서 그가 욕을 면하게 해주었다.

 “燕 태자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鄒衍이 원한을 품자 여름에도 서리왔네. 오늘에 이내 신세 옛일 그대로건만, 하늘도 무심하지 아무 조짐 보이잖네.”

  왕의 막내아들 良貝公이 사신으로 당나라로 가면서 풍랑이 심하여 鵠島에 닿아 걱정을 하는데 이 섬의  귀신 못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여 제전을 차렸더니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한사람을 남겨 두라 하였다. 군사 중에 居陀知란 자를 남기고 떠났다. 혼자 남은 거타지 앞에 “나는 서해바다 물귀신 海若인데 매양 해돋을 무렵이면 젊은 중(沙彌) 한 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부부와 자식 손자들이 모두 물위로 떠오르게 되고 그 젊은 중은 우리 자손들의 간과 창자를 뽑아다 먹어버리고 지금은 우리부부와 딸 하나가 남았으니 내일 아침에 이놈을 활로 쏘아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동녘이 밝을 때 그 젊은 중이 와서 늙은 용의간을 앗아내려고 하는 것을 거타가 활을 쏘아 맞추니 중은 늙은 여우로 화하여 죽었다. 노인은 그 딸을 한가지 꽃으로 만들어 그의 품속에 간직하도록 하고 두 마리 용을 시켜 거타지의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를 무사히 다녀가도록 하였다.

孝恭王

제52대 효공왕 때 광화 15년 임신 봉성사 밖 문 동서 스물한칸집에 까지가 집을 지었고 또 선덕왕이 즉위한지 4년 을해에 靈廟寺안 행랑채에 까치집 서른 네 개와 까마귀집 마흔 개를 지었다. 3월에 두벌 서리가 내렸고 6월에는 斬浦의 민물이 바닷물과 사흘동안이나 서로 싸웠다.

景明王

제54대 경명왕 시대 정명5년 戊寅 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짖으므로 사흘동안 불경을 설법하여 푸닥거리를 하였더니 반나절만에 또 짖었다.

  7년 庚辰 2월 黃龍寺 탑 그림자가 한 달 동안이나 今毛 사지의 집 뜰 복판에 거꾸로 서 비추었다. 또 10월에 사천왕사 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에 그린 개가 뛰어나와 마당으로 달리다가 벽 속으로  들어갔다.     

景哀王

제55대 景哀王이 즉위한 동광2년 甲申2월 19일 황룡사에서 백좌설경을 베풀고 참선 중3백명에세 음식대접이 있었는데 왕이 친히 향불을 피우고 치성을 드렸으니 백좌설경은 禪과 敎가 함께 설법좌석을 차린 시초로 된다고 한다.

金傅大王

제56대 김부대왕의 시호는 敬順이다. 천성2년 丁亥 11월 견훤이  서울을 습격하여 왕의 자결을 강요하고 왕비와 처첩들을 강간케 하였다. 왕의 일가 동생인 金傅를 세워 왕을 삼았다. 청태2년 을미 10월 신라는 국토를 고려 태조에게 바치기로 논의하였다.


2. 駕洛國記

  천지개벽 후에 나라 이름이 없었고 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 등 아홉 간이 있었으니 이들이 추장이 되어 백성들을 통솔하였으며, 호수는 무릇 100호에 7만5천명이었다. 後漢 世祖 光武帝 建武18년 壬寅3월 禊浴날 이곳 北龜旨에서 무엇이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음으로 2~3백명 되는 무리가 모였더니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거기 누가 있느냐?" 하였다. 아홉 간 들이 ‘우리들이 있습니다’하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일꼬?”하여 “구지 외다”고 대답하였다.

 “하느님이나에 명하여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 한 줌씩을 쥐고 노래를 불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밀어라 만약 아니 내 놓으면 불에 구워 먹겠다. 하면서 춤을 추면 이것이 대왕을 마중하여 즐겨 뛰노는 것으로 될 것이다.”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여섯 개가 다음날 사내아이로 변하여 나날이 장성하여 10여 주야를 지나 키가 9자나 되도록 훌륭히 자라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 혹은 首陵이라 하고 나라를 大駕洛, 伽倻國이라고도 일컬었다. 즉 여섯 가야가 탄생한 나라중의 하나이다.

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이요 어머니는 허황후이니 건안4년 기묘 3월13일 즉위하여 39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嘉平5년 癸酉 9월 17일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니 그는 태자 麻品을 낳았다.

麻品王

  嘉平5년 癸酉에 즉위 하여 3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永平 원년 辛亥1월 29일에 죽었다. 왕비는 종장감 조광의 손녀 好仇이니 태자 거즐미(居叱彌)를 낳았다.

居叱彌王

  일명은 금물이요 성은 김씨 영평원년에 즉위하여 5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永和2년 丙午7월8일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 아간의 손녀 阿志니 왕자 伊品을 낳았다.

伊尸品王

  성은 김씨 永和 2년 즉위하여 6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義熙 3년 丁未 4월 10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 克忠의 딸 정신이니 왕자 坐知를 낳았다.

坐志王

  일명 金叱이니 義熙3년에 즉위하여 하인 계집에게 장가를 들어 그 아내의 친정패거리들로 벼슬을 시켰기 때문에 나라 안팍이 소란하였다. 할 수없이 하녀를 荷山島로 귀양 보내고 1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영초 2년 신유 5월 12일에 죽으니 왕비는 도령 대아간의 딸 福壽로서 왕자 吹希를 낳았다.

吹希王

  김즐왕이라고도 이르니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원가28년 신묘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進思 각간의 딸 仁德이니 왕자 銍知를 낳았다.

銍知王

  김질왕이라고도 부르니 元嘉28년 즉위하여 이듬해에 시조왕과 허황옥황후를 위하여 그가 수로왕과 합궁하던 곳에 그의 명복을 빌고자 절을 세워 왕후사라 부르고 전토 10결을 바쳐 여기 충당하게 하였다. 그는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永明 10年 壬申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金相 사간의 딸 邦媛이니 왕자 鉗知를 낳았다.

鉗知王

  金鉗王이라고도 이르니 永明10년 즉위 하여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正光2년 辛丑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出에忠 각간의 딸 淑이니 왕자 仇衡을 낳았다.

仇衡王

  성은 김씨니 正光2년에 즉위하여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保定2년 壬午 9월에 신라 진흥왕에게 항복하였다. 왕비는 分叱 수이즐의 딸 桂花이니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이는 세종 각간이요, 둘째는 茂刀 각간이요 셋째는 茂得 각간이다. 開皇錄에는 양나라 中大通 4년 壬子에 신라에 항복하였으니 490년이 되고, 나라를 바친 것은 保定 2년 壬午인즉 30년이 더하여 520년이 된다.


3. 讀後感

  (1. 新羅三國統一後 滅亡까지)

  民族의 隆盛沒落이나 帝國의 興亡盛衰도 計略으로 이루어진 그 功課는 大小와 輕重을 不問하고 새로운 計略으로 滅亡을 당한다는 哲理를 三國遺事는 悽慘하리만치 絶叫하는 듯 하다.

  三國을 統一한 다음해 唐高宗은 50萬 鍊兵으로 統一新羅를 再侵하도록 만든 것은 新羅가 당나라를 이용하여 三國을 統一하고 唐의 勢力을 逐出하려는 計略을 看破했다는 史實을 文武王의 法敏에서 名哲하게 指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第31代 神文王이후부터 신라가 멸망 할 때까지 依他心과 無責任한 君主의 슬픈 過誤를 民俗的 隱語의 口傳을 徹底하게 傳達하여 佛敎의 聖職자로서 佛敎의 邪敎化를 痛烈하게 批判하는 意志를 엿볼 수도 있다. 萬波息笛은 이를 立證하는 紀錄이라 할 것이다.

  窮乏한 民生의 救濟事業을 하면서도 이를 빌미로 勞動力을 搾取하는 君主의 덕행이나 地方官의 豪奢는 民心의 離反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忠談․表訓 두 스님의 安民歌는 이를 表徵한다.

  第40代 哀莊王代이들어 民心이 天心이라는 俗世의 痛哭이 氣象異變까지 일으킨다는 奇怪의 天氣는 오유월에 눈과 서리가 내리는 形局을 赤裸裸하게 表現하고 있다. 第45代 神武大王이후에는 君主가 지방의 豪族을 計略으로 懷柔하여 利用한연후에 이들을 排斥하는 背信의 爲政行爲는 閻長과 弓巴(장보고)의 紀錄과 憲康王代의 處容郞과 望海寺에서 그 克治를 말해주는 것 같다.

 歷史는 反芻한다는 眞理를 不正하지못한다. 어쩌면 數千年이 지난 지금도 나라를 다스리는 統治者들의 爲政行爲가 이토록 달라짐이 없이 反復되고 因果應報의 試鍊을 當하고서도 反省하지못하는 理由를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古典을 耽讀하여 되새겨보는 價値를 알게 하는 것 같다.


(2. 駕洛國記)

  이것은 假說的 見解에서 表現하는 讀後感이다. 中文學科에서 中國語를 耽讀하고 語源을 공부하다보니 駕洛國은 當初부터 우랄알타이계통의 蒙古族이 아닌 漢人의 根據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가없다. 原住民의 部族長들의 이름이 中國語源으로 따져보면 너와 나, 그 사람들, 다른 동리의 사람 등과 같이 중국말로 이름지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신라는 가락국의 모체에서 독립하여 뒤늦게 신라를 건국하게된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신라와 가락국의 건국연대가 모두 중국의 연대기로 명시되어있음을 알 수 가있다.

  현대에 들어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상도의 방언이 모두가 중국어에서 나온 吏讀語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고 이것을 사실로 입증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 한마디를 지적한다면 지금도 사용하는 방언 중에서 “니캉 내캉” 이라는 말이 “너와 내가 서로” 라는 말로서 현대 중국어의 “你跟 那跟” 등의 발음과 의미가 너무나 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무수한 경상도 사투리의 어원은 신라의 향가와 가야의 언어 등에서 나온, 즉 이두문자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방언이 심각하도록 많고 방언에 따라 생활 습관과 인성, 그리고 음식의 맛과 형태마저 경기호남지역사람들과 경상도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되게 하는 이유는 蒙古族과 漢族과 韓族의 區別을 가르쳐 주는 듯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