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가

                                             방송대경영학과1년 원점자


                       목     차

 

       1. 향가(鄕歌)와 통일신라시대의 문학……… 3

         1) 향가와 고전문학………………………… 3

         2) 향가와 민속학…………………………… 3

       2. 고전문학과 민속신앙……………………… 4

         1) 제망매가(祭亡妹歌)의 문학적 측면……4

         2) 처용가(處容歌)의 민속학적 측면………5

       3. 향가(鄕歌)와 현대 시문학(時文學)……… 7

        <참고문헌>……………………………………7



1. 향가(鄕歌)와 통일신라시대의 문학

   중반기의 통일신라시대에 서민의 생활이 풍요와 낭만이 있는 듯이 유지된 것은 평온과 안일을 상징하는 불교문화의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중산계층의 부정과 나태와 불륜은 그 시대를 타락한 사회로 전락하게 하였고, 서민과 소외계층의 비판은 식자들에 의하여 형식을 갖춘 향가(토속적 노래)로 현대의 대중가요처럼 유행하게된 것이다.

  

   1) 향가와 고전문학       

      향가는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민간의 노래 즉,<우리나라 노래>란 뜻이었다고 삼국유사, 균여전 및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형식은 4구체, 8구체, 10구체 등이 있다.

  향가는 한자를 빌어서 순수한 우리말을 표현한 것으로 이두(吏讀)와는 완전히 다르다. 노래의 각 수의 가사전체를 漢字로 기록하면서도 순수한 우리말을 표현하여 고유한 우리문학의 경지를 이룬 것이 주목할 점이다.

  이러한 노래가 삼국시대의 유행가처럼 그 수효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존하는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25수의 향가가 전해 질 뿐이다. 이 중 <균여전>에 수록된 향가는 초기의 ‘균여대사’ 作으로 불교 예찬가 이며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는 서동요,혜성가,풍요,원왕생가,모죽지랑가,헌화가,원가,도솔가,제망매가,안민가,천수대비가,우적가,처용가 등이다.

  일찍이 일본인 오꾸라(小創)에 의하여 향가 25수 전반에 걸친 주해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그 뒤 양주동 박사에 의하여 더 낳은 해독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2) 향가와 민속학

       한민족의 생활특수성에 비추어 민속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상사상(對象事象)을 열거 해 보면 첫째로 귀신,점복,풍수,무격(巫覡),굿,고사,장승,서낭당,솟대(蘇塗) 등의 민간신앙류 이며, 둘째가 복장식(服裝飾),금침(衾枕),혜물(鞋物),관립(冠笠),가구,농기구 등의 물체이며, 셋째가 혼상(婚喪),제례(祭禮) 등의 의식과 사회제도, 넷째가 윷놀이,승부사(勝負事)등의 민중오락이고, 다섯째가 신화,전설,민담(民譚),민요,동요,속가(俗歌),수수께끼,속담,방언,은어(隱語) 등 민간언어와 문예이며, 마지막으로 집단적 공동체로 운영되는 부락행사,노동,계,제의(祭儀) 등과 간은 연중행사이다.

  이러한 민속학적 대상을 비교할 때, 향가는 많은 부분에서 이들 대상의 사상(事象)을 표현하고 그 행위를 관장하기 위한 방식과 행위규율을 암시하고 있다.

  

2. 고전문학과 민속신앙

   우리의 고전문학은 민속신앙을 바탕으로 발달되어왔고 전래된 과정도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모든 근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전문학의 발달은 어느 나라의 경우라도 그들의 토속적 신앙에서 발생되었고, 우리의 고전문학도 이러한 맥락을 벗어 날 수 없다. 민속신앙심의 전파를 위하여 노래가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이를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문자이기 때문이다. 


   1) 제망매가(祭亡妹歌)의 문학적 측면

      ‘월명 스님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하여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갑자기 광풍이 불어 지전(紙錢 ; 망자의 노자로 쓰게 한다는 형식상의 종이 돈)이 날려 서쪽방향으로 사라졌다’ 라고 기록하여, 이것을 보고 망자가 응답을 할 정도의 심후한 감성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노래가 제망매가이다.

  우리의 글자가 없던 당시에 이두(吏讀)도 아닌 한자로(일부분은 중국어법이 포함되어 있지만) 순수한 우리말의 표현을 시도하여 지금도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을 표현한 시문은 문학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신편삼국유사’에 수록된 현대어와 원형의 漢字 詩를 대비한다.

      生死路隱               생사 길이란

      此矣有阿米次肹伊遣     여기 있으려나 있을 수 없어 

      吾隱去內如辭尼都       나는 간다는 말씀도

      毛如云遣去內尼叱古     이르지 못하고 가버리는가

      於內秋察早隱風未       어느 가을날 이른 바람에

      此矣彼矣浮浪落尸葉如   이리저리 떨어진 나뭇잎처럼

      一等隱枝良出古         한 가지에서 떠나선

      去奴隱處毛冬乎丁       가는 곳 모르는 구나

      阿也彌陀刹良逢乎吾     아야 미타찰에서 만날 것이니

      都修良待是古如         내 도 닦아 기다리리라

   이 작품은 신라 경덕왕(8세기)때의 숭려인 월명사가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며 부른 추모의 노래로 일명 ‘위망매영제가(爲亡妹營齊歌)’라고도 한다.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하고있으며 서정성이 뛰어나고 비유와 상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공포감, 인간운명에 대한 허무와 무상함, 生과 死에 대한 느낌을 시적 경지에서 수준 높게 제시하고 있다.

  1행에서 4행까지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허무한 삶과 남매의 깊은 정을 표현하였고, 5행에서 8행은 혈육의 관계를 부모로부터 떨어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비유한 고도의 비유법이 돋보인다. 마지막 9, 10행의 ‘낙구’에서는 이승의 고뇌를 불교적 신앙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불교의 숭고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신라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탁월하게 표현한 서정성을 나타내고 있다.

 

   2) 처용가(處容歌)의 민속학적 측면

      우리의 전통적 민속신앙은 악(잡귀)과 선(토속적 신)의 투쟁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민속신앙이 민속학의 모든 대상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유형물의 제작과 설치 및 조작까지도 민속신앙의 감응과 묵인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속신앙이 일상생활의 궁극적 목표까지 지배하게되고, 문학과 예술 및 산업의 바탕까지 점유하게 된 동기는 지배층의 고질적 병폐인 서민의 착취와 부정부패의 만연 때문이다.

  사실상, 서민생활에 깊이 자리한 민속신앙은 민초의 행복을 앗아가는 잡귀(악)를 지배층으로 간주하였고, 불멸의 이 악귀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전능한 토속신앙(선)을 빌려 지도층의 사회개혁을 상향적으로 이루어보려는 시도가 내포되어 있으며, 지배층의 일부 비판 세력의 의식이 포함되어 나타난 것이 처용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비판적 이념이 현대에서 방송이나 보도가 금지되듯이, 연산군(연산11년)시대에 이르러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없애고 처용을 풍두(豐頭)라 하여 처용무와 처용가가 악부에서 삭제되기까지 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가는 부패한 지배층의 개혁을 호소하는 서민의 노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도 처용무와 처용의 탈과 부적은 악귀를 퇴치하는 무격으로 존속되어오고 있으며, 현대적 감각으로 부패한 지배층의 개혁을 상향적으로 이루어 보자는 계몽적 ‘퍼포먼스’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東京明期月良          서울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加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아내)이지만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디 나의 것이지마는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 작품은 8구체의 향가로 고려와 조선에 걸쳐 儀式舞로 계승된 巫歌이며, 신라 제49대 헌강왕(9세기)때 처용이 그의 아내를 범하는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 부른 노래이다.

   처용은 동해용왕의 아들로 경주에 들어가 예쁜 아내를 얻고 급간의 벼슬을 하고있었다. 어느 날 밤 그의 아내가 역신과 함께 동침하는 것을 본 처용은 이에 노여워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러한 처용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한 역신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 이후 처용의 화상은 역신을 내모는 벽사진경(辟邪進慶;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드림)의 기능을 하는 門神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노래의 끝 부분에서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라고 한 것은 체념이 아니라 초월적 관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성의 개방을 인정하는 결단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처용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첫째,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은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둘째,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셋째, 신라 시대에도 서역과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으나,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다수론 이다.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 고 하는 것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무격사회(巫覡社會)의 풍습이며, 또한 惡神이라도 즐겁게 해서 보낸다는 무속의 풍속과도 상통하는 점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이를 통해 한국인의 여유에 찬(부정부패에 무기력한?)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는 면도 있다.

  

3. 향가(鄕歌)와 현대 시문학(時 文學)

   사고의 개혁과 고질화된 부패의식의 변화를 바라는 민초의 노래가 참담한 시련을 받으면서도 비굴함 없는 저항을 지속하고 있다. 그 노래가 통곡으로 바뀌어 되돌아올 때 문화는 탈바꿈을 하고 새롭게 성장한다.

  이것이 곱게 자라지 못하고 변절되면 천둥과 폭우를 동반한 벼락을 맞고 쓰러진다. 그 때  떨어진 때묻지 않은 작은 씨알이 새로운 태양을 기다려 발아되어 자라는 것이 향가이며 존재의 특성이기도 하다.

  향가의 노래가 통곡으로 변했을 때 천년의 사직은 종말을 고하였고, 한말의 슬픈 가사가 금수강산에 울려 퍼질 때 민초와 선민은 식민사관의 비통함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사직과 조국을 잃게 한 것은 민속신앙의 잡귀들이었고, 시련을 이기고 조국을 되찾은 것은 잡귀를 쫓아내려 했던 향가와 우리의 시가였던 것이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악마와 신은 언제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형상이며, 이들간의 정당한 형평성 유지와 공동의무를 위한 균형이 유지되는 정도에 따라 향가와 시가의 형태와 질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인식이며, 현대문학의 지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完>


<參考文獻>

       윤용식,박태상,조남철,

       방부일,손종흠,장소원  공편저  대학국어,     2002. 한국방송대학

       윤용식 박태상  저     지상강좌,     2002. 한국방송대학

       리상호  옮김   신편삼국유사, 1998. 신서원

       刊行委員會  『韓國古典詩歌作品論』1. 1992. 集文堂

       刊行委員會編 『鄕歌文學硏究』           1993. 一志社

       金承瓚 編著  『鄕歌文學論』               1986. 새문사

       유흥열  감수 국사백과사전,            1970. 동아문화사

       양주동  조선고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