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興寺 凌波閣記


  海東에 三神山이 있다고 전해오니 두류산이 그중의 하나다. 두류산은 영, 호남 사이에 있는데 이곳에 한절이 있어 그 이름이 신흥사다. 절간이 있는 깊숙한 골짜기가 이른바 花開洞天인데 이 입구가 매우 좁아 사람이 마치 항아리 속을 드나드는 것 같다.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한 골짜기에는 푸른 학이 산다하여 청학동이라 부르고, 남쪽을 바라보면 강 건너에 몇 개의 봉우리를 거느린 산이 있어 백운산이라 하는데 거기서는 늘 흰 구름이 피어 솟는다.

  화개동천이 깊은 곳에 너 댓 집의 작은 마을이 있다. 꽃나무며 대나무 숲이 마을 언저리에 흩어져 있고,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을 사람들의 차림새는 매우 소박하고 모발도 예스럽다. 이들은 땅을 골라 씨 뿌려 거두는 일만 알뿐, 만나고 찾아오는 이는 늙은 중이 있을 뿐이라 마을은 절의 들머리가 되어있다.


  신흥사에서 남향으로 수십 걸음 내려가면 동쪽과 서쪽의 두 냇물이 만나 하나의 큰 내를 이루는데, 맑은 물이 부딪히고 곤두박질로 소리를 내면서 뒤집힐 때마다 흰 물보라가 구름처럼 튄다. 참으로 천하의 奇觀이라 할만하다. 냇가 양언저리는 수천 개의 흡사 소와 양의 뿔 같은 바위들이 쭈뼛쭈뼛한데 이 모습은 태초에 하늘이 이토록 신령스럽게 숨겨 놓은 것이리라.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 비 나리면 사람들이 다닐 수 없어 불편함이 많았다.

  명종16년 여름에 신흥사 주지 옥륜이 같이 수도하는 祖演스님으로 하여금 이 바윗덩이를 다듬어 긴 돌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다섯 칸의 누각을 지어 단청을 곱게 하도록 하였다.

  다리는 紅流橋라 이름 짓고 누각은 凌波閣이라 불렀다. 승려들은 여기서 선의 경지를 찾게 되고 시인들은 시흥을 짜내고, 도사들은 뼈를 깎는 수련을 하지 않고도 바람을 이끌며 날렵하게 다닐 수 있다. 玉崙과 祖演등은 이 그윽한 공간에 마음을 맡기고, 흐르는 구름에 몸을 숨기며, 지팡이 집고, 한가하게 휘파람 불기도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며, 혹은 누어서 늙음의 절박함도 잊은 채 오히려 즐거움에 취한다. 또 누각에 오르면 몸이 하늘로 떠서 별들이 만져줄 것을 바라는 듯 한 신비로움을 경험하고, 눈길이 천리에 이르매 하늘에 오른 듯 한 황홀함을 느낀다.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놀은 등왕각(신선이 사는 궁전)의 운치요, 아득한 산봉우리들은 봉황대(봉황이 노니는 상상의 선경)의 풍치라. 풀꽃 곱게 피어 맑은 물 언덕을 덮었으니 황학루의 정경이 여기요, 낙화유수는 무릉도원의 景槪로다. 가을단풍 화사로우니 赤壁(중국 황하유역에 위치한 명소)의 경치인들 이와 다르리오. 귀한 벗 맞고 보내매 虎溪는 농부들, 낚시질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바람 쏘이는 사람들, 풍월을 읊는 사람들,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달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이 누각에 올라와서 제각기 즐거움을 누리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즉 이 누각이 사람들의 흥치를 돕는 것 얕지 아니하고, 또 비바람과 눈과 빙판을 만나도 건너는 자가 옷을 걷을 수고가 없으니 쉽게 건너게 해준 공이 크다. 다리와 누각을 이루어 숱한 즐거움이 이렇게  한꺼번에 갖추어졌으니 어찌 어진자만이 이를 즐길 수 있다고 할 것인가?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태초에 하늘이 신령한 곳을 숨겨 놓은 것을 지금 玉崙과 祖演스님이 구름을 헤치고 山門을 열어 드디어 산과 골짜기와 시내와 절간을 인간 세상에 들어나게 만들어 이름을 숨기기 어렵게 한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재물을 옳게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이 누각을 천간 만간으로 늘려 천하 사람들을 덮어 줄까.


                                            명종 19년(1564)

                                                                                          休  靜 씀


  西山은 이 記文을 통하여 하늘이 숨겨놓은 신령스러운 곳이라며 花開洞天의 경관을 자랑했다. 記文을 쓴 西山은 별도로 자신의 감흥을 읊어 한수의 시를 남기니 이른바 신흥사 능파각 홍류교 시다. (원문을 생략한다)


     다락에 걸린 구름 물결 따라 흐르고,

     산승은 오늘도 무지개를 밟고 섰네.

     사람의 운명이 어지럽기 그 몇 번 이련가,

     세월이 백성을 저버려 늙는 줄 모르네.

     봄 저문 골짜기에 꽃비 휘날릴 제

     달 밝은 하늘아래 다락은 비어 있소.

     물소리 솔바람은 천년의 음악인데

     만고의 누리에서 한바탕 웃어보네.


  30년 만에 찾아본 고향  

  

  淸虛堂에서 집필을 마무리한 三家龜鑑은 儒 佛 道 三敎思想의 講要를 진술하여 종교간의 부질없는 대립을 지양하고 서로 유통하면서 커다란 목표인 ‘하나’에 도달하는 방안이 제시된 西山자신의 종교관이 강하게 담겨있는 저술이었다. 그는 세 종교가 명칭은 비록 다르나 道의 진원과 목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西山은 1564년에 이 책의 序文을 쓰고, 목조판각을 조각하여 인쇄하고자 원고를 들고 산청군 단성면에 소재한 단속사로 찾아갔다. 단속사에는 목판조각과 인쇄에 능한 그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해에 걸쳐 판본이 완성되고, 이제 곧 인쇄에 들어가려는 참에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생 成汝信이 책의 내용이 그의 뜻에 거슬린다하며 절의 인부들을 시켜 판각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트집인즉, 불교, 도교, 유고의 교리를 논하면서 유가를 맨 뒤에 둔 것은 곧 유생을 가볍게 여긴 때문이라며『…불도 따위가 외람되게 유를 논하느냐』고 거세게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成유생은 우윤 成斗年의 아들로 南溟 曺植의 제자였다. 느닷없이 폭력을 당한 西山은 크게 실망했다.

  이때는 불교를 중흥시킨 문정황후 죽고 불교계의 큰 기둥이었던 普雨가 요승으로 몰려 제주도에서 장살당한 뒤였다. 유학생들의 끈질긴 주청으로 명종 임금은 다시 억불정책을 쓰게 되니 西山은 맥이 빠졌다. 일찍이 西山은 유학의 근본도 알고 싶어 산청 덕산동의 曺植을 찾아 가끔 내왕하였고, 李滉, 楊士彦, 蘇世讓등과도 교류하여 유불을 가리지 않고 친교를 맺어왔었다. 그가 曺植의 친필 한 폭을 받고 보낸 서찰이 있다.

  『…江亭에서 한번 이별한 뒤에 반딧불이 나는 것을 다섯 번 보았으니 진실로 목마르게 그리운 회포를 금할 수 없습니다. …친필 短章한폭을 받자오매 자획이 굳세고 의사가 맑아서 뒷사람의 마음과 눈을 열어줄만하여 더욱 감사합니다.』

  또 퇴계 李滉의 글씨 한 폭을 전해 얻고 무척 고마워 한 글도 있었다.

 『…하루도 간절하게 생각지 않음이 없었는데 홀연 친필 한 폭을 받자와 머리털 속에 明珠를 얻은 듯 하여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禪房의 궤 속에 넣어두고 길이길이 완미 하겠습니다….』


  힘들여 쓴 책이 발간직전에 망가지게 되니 그 아픔은 오죽했으랴마는 밖으로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큰 실망을 안겨준 지리산이 그의 꿈을 펼치는데 마땅한 소요처가 안 될 것 같아 마침내 화개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흔 여섯의 나이에 20년간 정들었던 삼신동을 떠나려니 허리에 흰 구름을 두른 첩첩산봉우리들이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때 그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시가 전한다.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청학의 둥지에 학은 아니 돌아오네.

    잘있거라 홍류교아래 흐르는 물이여. 

    너는 바다로 가고, 나는 산으로 가려네.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고자 花開洞天을 나선 西山은 모처럼 거처까지 마련하고 살려고 했던 터를 잃은 비탄스러움 때문이었는지 어릴 때 떠나왔던 고향이 그리웠다. 비록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출가한 몸이나 어릴 때 이미 부모를 모두 잃고 아무런 마음 걸리는 인연이 있을 것 없으니, 그 고향을 한번쯤 찾아 향수에 젖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평안남도 청천강변의 安州는 묘향산에 들어가기 전에 들릴 수 있었다. 고향 옛 마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봄날이 저물어가는 석양 무렵이었다. 옛 집터에서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한 노파의 손을 붙잡고 자기가 어릴 때 부르던 雲鶴 소년이었음을 밝히며 빛바랜 장삼 깃을 여미니 그 노파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이날 西山은 歸鄕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 그의 심정을 토로하며 비로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실로 철이 들고 처음 느끼는 설움이었다.


   집 떠난 지 30년에 고향이라 찾아드니

   알던 사람 없어지고 눈 익은 집 다 헐었네.

   푸른 산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저무는데

   두견새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네.


   아이들 떼 지어 문틈으로 엿보고

   이웃집 늙은이는 누구냐고 묻는 구나

   아이 때 부른 이름 이르자 서로우니

   하늘은 바다련듯 달은 벌써 삼경일세.


  西山은 묘향산에 다시 은거하며 때로는 금강산으로 찾아 저술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리산에서 실패한 三家龜鑑도 새로 집필하여 완성했다. 이 세상이 어지러우면 초연히 현실에 때묻지 않는 사람은 무고를 당하기 십상이다. 진주의 선비 崔永慶을 괜히 鄭汝立의 난에 가담했다고 잡아 죽이는 세태라 西山도 산중에서 미치광이 땡 중의 무고를 당해 역시 鄭汝立과 관련이 있다하여 투옥되는 촌극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 선조는 그의 무고함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비범함을 살펴 상까지 내리며 풀어 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임진란이 터지자 선조임금은 의주 행재소에서 다급한 김에 묘향산으로 사람을 보내 西山을 불러 구원을 청했던 것이다. 일흔 살의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西山을 반갑게 맞은 임금은『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그대가 힘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하니 西山은 서슴없이『승려로써 늘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 할 자는 신의 도움을 기원하고 나머지는 소승이 통솔하여 싸움에 나아가 충성을 다 하겠나이다.』하고 물러나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들이 구국전선에 앞장서도록 했던 것이다. 승군의 지휘자가 된 西山은 문도1500여명을 이끌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때 선조임금은 順安으로 그를 불러 팔도선교도총섭이라는 최고 승직을 내렸다. 승군은 그 수와 전투력이 날로 늘어 한양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몸이 너무 늙어 막중한 군직을 감내하기 어려워 사명당에게 지휘권을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그에게 극일대도서사라는 불교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이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려 나라를 구한 공로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1604년(선조37) 묘향산 원적암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최후설법을 마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세수85세이며 화개동천에서 불문에 발을 들여 놓은 지 67년인 그가 눈을 감은 날은 正月스무사흘날이었다.

  진충보국하는 정신으로 승도들의 결속을 다짐했고, 배불정책으로 침체되었던 조선불교가 되살아날 수 있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정치적인 가치관까지 바꾸어 놓은 큰 업적을 남긴 西山은 이렇게 하여 그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위대한 삶이 바로 花開三神洞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