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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남 남서부 지역의 동학혁명
1) 우리지역의 동학군 활동 경남 남서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도 전라도 지역과 같은 시기인 4월(음)에 기포하여 진주 덕산에 도소를 설치하고 혁명 활동을 벌였다. 이지역의 혁명운동은 대체로 세 단계의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은 덕산이며 4월 白道弘 대접주와 孫殷錫이 기포했다. 6월(음)경에 이르러 전라도 동학도와 승전 소식에 자극받아 朴在華, 金昌奎, 白周應, 禹鼎鎭, 朴運基, 朴奎一, 全熙淳 접주 등이 일어나 사실상 진주 지역을 장악했다. 두 번째는 9월에 순천, 광양의 영호 대접주 김인배의 지원으로 하동부 공격에 성공하자 남해, 곤양, 고성, 진주 등에서도 이들의 지원을 받아 기포하여 경남 남서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세 번째는 10월에 항일 투쟁을 선언하고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항일 투쟁의 전통을 가진 이곳 민중들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동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엄청난 항일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듣고 분노하여 동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엄청난 항일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공격하던 동학군은 安心里(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高城山(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신촌마을), 하동 湯鹿置(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안심리)나루 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로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배의 쓰라린 막을 내려야 했다. 咸安에서도 李 在馨 등의 독자적으로 기포했으나 관군의 역습으로 곧 해산하고 말았다.
동학이 이 지역에 포덕된 것은 18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성에 사는 成漢瑞가 大伸師 水雲 崔濟愚를 찾아가 직접 입도한 후 포교하여 接을 이루면서 비롯됐다. 고성 북쪽에서는 진주시와 함안군이 있고, 서쪽에는 사천시가, 동쪽에는 창원시, 남쪽에는 통영시가 인접해 있다. 고성에서 퍼지기 시작한 동학은 점차 이들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어 상당한 세력을 확보 해 나갔다.
그러나, 1871년에 이르러 寧海 교조 伸寃운동이 일어나자 관의 엄청난 탄압을 받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후 20년이 지난 1891년에 다시 일어났으며, 1893년에는 지식인들도 많이 들어왔다. 이 해 3월에 열린 보은 집회에서는 하동 접에서 50명, 진주 접에서 60명이 참가 했다.
이로부터 많은 민중이 몰려들어 1894년 초에는 약 2천 명 정도에 이르렀다. [천도교서]나 [천도교 창건사]와 여타 기록들은 종합해 보면 大接主급이 40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① [천도교서]에는 진주의 孫殷錫, 朴在華, 金昌奎, 곤양에 金成龍, 남해에 鄭龍泰, 余章協 등이 접주로 활동했다. ② [河東郡史]에는 사천의 尹致洙, 단성에 林末龍, 하동에 禹鼎鎭(후에 靑巖으로 이주함), 朴在華, 金昌奎, 白周憲 등이 首腦로 활동했다 한다. ③ [명치편년사]에는 진주의 동학당 수령을 金尙慶이라 했으며 [일본공사관 기록]에는 진주의 金用基, 金相鼎을 거창의 李翼宇, 함안의 李在馨을 추가했다. ④ 이 밖에 진주의 朴雲基, 朴奎一, 全憙淳, 金商奎(김상경, 김상정은 동일 인물로 보인다), 사천의 朴致模, 고성의 崔祥寬, 곤양의 金學斗 , 李光 등이 접주로 활동했다. 다음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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