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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를 조명해 보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보면서
1. 高城山은 어떤 곳인가
예로부터 하동 옥종은 선비의 고장이요, 애국충신의 고장이라 불리어 왔다. 그리고 이 지역은 조그마한 면인데 비해 많은 문화재가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을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나라를 지키려다 장렬하게 산화하신 선열들의 나라사랑 전신을 알려 산교육의 장으로 활용키 위해서다.
제가 옥종중학교에 부임한 날은 1975년 4월 18일 이었다. 이 고장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를 알기위해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곤 했는데, 그 과제를 검토하면서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앞뒤도 없이 조시해 온 ‘고수레 당산’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은 또한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자극하였다. 이때부터 수업이 끝나는 시간엔 지역 유지님의 의견 수렵과 신촌노인 몇 분을 모시고 고수레 당산(톡골)을 오르내리며 이산에 관한 내력을 조사하게 되었다.
고성산은 일명 고시랑(주문을 외우며 중얼거리는 소리)당산, 또는 고수레(제를 지낸 뒤 음식을 흩으며 지껄이는 말)당산이라고 불렀는데, 이산은 저 멀리 소백산맥의 영봉 지리산 줄기로 하동군 옥종면 부방리(산13-1, 임야 92.349m2) 신촌(톡골)과 대곡리에 걸쳐 있는 해발 185.3m의 고지로 지역인 들은 ‘고시랑 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동쪽 산정에는 ‘봉화터’와 동학 접주들이 모여 회의 전에 청수를 모셨던 자연석 ‘청수대’와 곁에 둘러앉았던 돌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남쪽은 사천시 곤명면이고, 북쪽은 진주시 수곡면에 위치한 곳으로 지표로부터 완전 독립되어 사방의 경계가 용이한 요새지였다. 무릅 밑에 다다르는 잔솔이 드문드문 나 있고, 비옥한 썩 돌로 된 산의 자연 석주위엔 인공 석으로 석루를 높이 쌓았으며, 이 지역 소먹이 청소년들이 장난삼아 지렛대로 돌 구르기를 하고 있었기에 웬만한 자연석은 산 밑 기슭에 굴러 모여 있었고, 분묘가 많은 공동산으로 사방 크고 작은 무덤이 산재해 있었다. 이곳이 동학혁명 때 천추의 한을 남긴 한전지로 알려진 ‘고성산 동학 혁명군 위령탑’이 서 있는 곳이다.
이곳의 내력을 알아보면, 1864년(포덕5년) 3월 10일 천도교 1세 조교 수운대신사께서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 장대에서 참형 당하신 후 제2세 조교 해월신사의 지도아래 동학교도들은 영해 교조 신원 운동을 비롯한 공주 장사와 전주 삼례 집회,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그리고 보은 취회 등을 통하여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좌도가 아닌 정도이며 천도임” 을 여러 차례 주장 하였으나 조정은 이를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동학도들에 대한 탄압과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는 더욱 극심하여 민중은 도탄에 빠져 살길을 찾지 못했으며 국가의 운명은 위기일발의 패망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탐관오리의 원흉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행패와 수탈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동학교도들은 고부접주 전봉준을 선두로 군아를 습격하고 만석 보를 파괴하였으며 드디어 3월 21일에는 부안 백산에서 동학 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의 횃불을 들게 된 것이다.
당시 관군은 노도와 같이 달려드는 동학군 앞에 도망하기에 바빴고 5월 한 달 동안에 호남일대는 거의 동학혁명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5월 31일 전주성을 무혈점령하게 되자 6월 1일에는 동학 혁명군과 조정 사이에 전주화약(和約)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호남 중심의 53개 군현에 동학 집강소를 설치하고 12개 항의 폐정 개혁 요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무능한 조정의 간신배들은 청, 일 양국 군대를 불러들이게 되었으므로 동학군은 침략자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항일 민족 구국전쟁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해 음력 9월 18일, 해월신사의 기포 명령으로 보국안민, 척왜양창의 기치를 높이 들고 총궐기한 동학혁명은 경기, 충청, 강원, 경남, 황해, 평안도 일부까지 확산되면서 연 인원 3백만이 참전하여 다음 해인 을미년 1월까지 피비린내 나는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왜군의 현대무기 앞에 천추의 한을 남긴 채 30만의 고귀한 인명이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 이곳 고성산에 갑오동학 때의 희생당하신 순도 선열들의 합동위령제를 올리는 것은, 첫째, 102년 전 혁명당시 제2세 교조이신 해월선사의 총 기포 령을 천명으로 받들고 진주, 곤양, 남해, 하동, 사천, 단성, 함안, 의령 등 각지의 혁명군 수만 명이 참전하여 치열한 격전을 벌린 경상도 남, 서부지역 동학혁명군의 용감한 항일 구국 투쟁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데 있으며, 둘째, 이곳 고성산에 집결하였던 수천 명의 동학군은 관군의 참전 없이 왜군을 상대로 항전하다가 그들의 신식 무기 앞에 무참히 전멸당한 185명 선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이들 선열들의 무참한 희생은 두 말할 것 없이 불의와 부정, 그리고 잔인한 학대를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으며 오직 동학사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는 혁명의 길이 바로 천명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학혁명군 접주로는 진주의 손은석, 박재화, 김장규, 백주옹, 김용기, 김상정, 곤양의 김성룡 남해의 정용태, 여장협, 사천의 윤치수, 함안의 이재형, 단성의 임말용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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