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自然環境의 復元 옛 人類의 文化生活을 復元하려는 考古學硏究에 있어서 그 文化를 올바로 把握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生活舞臺였던 그 당시의 自然環境을 復元해 보고, 그 基底위에서 여러 文化要素의 作用을 綜合的으로 考察解釋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를 硏究對象으로 하고 있는 地球科學은 考古學의 隣接 내지 關聯學問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 分野의 硏究는 지금까지 海水面의 變動과 堆積狀況 등의 地層구조를 分析하는 地形的環境側面과 氣候와 生態를 究明하는 生活環境의 復元 側面에서 주로 進行되어 왔다. 本項에서는 牧島里貝塚을 중심으로 發達한 蟾津江 下流의 先史文化를 밝혀내기 위해서 기왕의 이 方面의 國內外 硏究成果들을 토대로 당시의 自然環境, 그 중에서도 遺蹟一圓의 局地環境을 把握하는데에 注力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愼重을 期해야 할 바는 이 分野의 硏究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미흠한 단계이므로 蓄積된 硏究資料가 적고, 따라서 이 遺蹟의 局地環境을 復元하는데에 까지 直接的으로 適用할 수 있는 資料가 充分치 않다는 事實이다. 이런 까닭에 本稿에서 이를 克服하려는 慾心으로 無理하게 異論을 展開하는 失手가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本稿에서 檢討 考察할 時期는 牧島里 등 이 지역 貝塚들이 新石器遺蹟인 것을 감안하여 8,000B.P(1950년 基準年前, Before Present)~3,000B.P로 한다. 이 地域에서 당시의 自然條件들이, 牧島里를 중심으로 한 蟾津江下流의 貝塚文化가 勃興하는데 어떠한 立地環境으로 作用하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海水面變動과 더불어 沖積世(完新世)동안에 河川의 土沙運搬으로 말미암은 堆積과, 海濱을 緣해서 生成된 充積現象이 地形形成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生活環境으로서의 氣候와 植生 및 其他의 生態에 대해서도 이어서 綜合的으로 一括 考察해야 한다. 이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이 地域의 沖積層을 直接 試錐(Boring)하여 採取한 資料를 土臺로 硏究하는 것이지만 本稿에서는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多幸이 隣近 蟾津江 河口의 개펄地帶(Tidal flat)에 대한 地層資料가 있어서 이것을 基本資料로 삼고, 餘他地域의 間接資料를 援用하여 牧島里一帶의 沖積地帶에 대한 堆積相과 地形構造를 類推해 보기로 한다.
먼저 河口 개펄地帶(Tidal flat)의 沖積地層을 보면 堆積順으로 基底礫層→下部粘土層→中部沙層→中部粘土層→上部沙層으로 構成되어 있다.<그림2> 다소 不安定한 2싸이클(Cycle)의 堆積相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 點은 浦項이나 金海 등 우리나라 東南海岸의 다른 沖積平野에서도 一般的으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沖積世 동안 큰 幅의 海水面 變動이 두 차례 이상 일어났었다는 證據이다.
다음 堆積形成의 過程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基底礫層은 最終氷河期 以前의 洪績世 동안에 生成된 陸成河岸段丘이고, 下部粘土層은 最終氷河期를 벗어나 氣溫이 回復되면서 빠른 速度로 海進하던 10,000B.P前後에 海水中에서 堆積된 海性層이다.
中部沙層은 9,000B.P를 중심으로 海水面이 上昇勢에서 한때 安定도는 後退한 時期에 河水에 의해 運搬된 모래가 앝은 海水中에서 堆積된 層이다. 中部粘土層은 氣溫回復과 더불어 海水面 上昇이 빠른 速度로 進行되던 때에 깊은 海水中에서 堆積된 海成層이다. 8,000~6,000B.P의 海進極大期<註39 參照>에 해당되는 層으로서 堆積樣相만으로 考察하면 가장 높은 海水面을 維持한 時期처럼 보여 진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는 洪績世 동안에 생긴 깊은 河谷이 미쳐 堆積物로 埋沒되기 前이어서 內陸 깊숙이까지도 깊은 低谷이 形成되고 있어 海水面의 上昇幅보다도 相對的으로 海進幅이 컸던 時期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上部沙層은 6,000B.P以後 現在에 이르도록 해면이 거의 安定된 狀態에서 堆積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層이 海棲貝殼을 包含하고 있는 事實과 現在의 개펄지형으로 미루어 보아 河水에 의해 運搬된 모래가 얕은 海水中에서 堆積되었다고 판단되며, 河口의 內陸平野에서는 이 層이 계속 발달하여 陸地化되면서 漸次 뚜렷한 陸成層으로 變해 갔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層 中間에 바다쪽의 中部粘土層에 連해서 中部粘土層보다도 위에 한 層의 沙層을 끼고 粘土層이 얇게 挾在되어 오다가 下部粘土層이 消滅될 즈음의 陸地쪽 地點에 이르러 消滅된다. 浦項平野에서는 대체로 이 層의 直上部로 보이는 層位에서 C14 3,700B.P의 測定値가 나오고 있는바 이를 勘案한다면 이 層은 5,000B.P頃의 極暖期에 海水面의 上昇으로 因해 多少 깊어진 海水中에서 堆積된 層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留意해야 할 바는 지금까지의 硏究結果로 미루어 後氷期 以後 이 時期가 氣溫이 가장 높았고, 따라서 最高位의 水面을 維持하던 時期로 認定되는데도 堆積構造上에는 海進幅이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점에 대한 설명은 上述한 바 中部粘土層의 反對現象 즉, 깊은 河谷은 이미 前代(7,000~6,000B.P>에 大部分 埋積되어버린 위에 氣候가 어느 때 보다도 高溫多濕해지므로써 洪水가 잦아지고 따라서 河水의 土沙運搬活動 또한 活潑해져 河水의 堆積營力이 海水面의 上昇速度와 거의 同一한 水準에 肉薄하고 있었기 때문에 海進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에서 緣由하였으리라고 解釋할 수 있다.
貝塚遺蹟이 分布하고 있는 牧島里 一帶의 沖積地域地層構造는 河口地域의 延長일 것이므로, 基本的으로 上述한 바의 개펄지대(Tidal flat)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樣相은 洛東江의 下流地域調査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이며, 蟾津江 下流에서 現在 進行中인 河床骨材採取作業時에 나타나는 樣相에서도 一部 確認된다. 以上의 情況과 現在 이 一帶의 地形 등을 綜合하여 檢討해 볼 때 牧島里 一圓地域의 沖積地層構造는<그림3>과 같을 것으로 推測된다.
基底礫層위에 河口개펄지대의 下部沙層에 해당되는 下部沙層이 있고, 그 위로 또 同地域의 中部粘土層에 對比되는 점토, Silt層 이 있고, 그것은 다시 上部沙層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런데 이곳은 河口의 개펄지대가 아니고 河口內陸에 있는 江 下流의 充積平野地域임을 勘案할 때 浦項平野나 洛東江下流의 充積平野地域에서 보이는 例와 같이 上部沙層의 경우는 원래는 海成層이었는데 점차 陸地化하면서 後代에 이르러 完全히 陸成層으로 變해 갔을 터이다.<註31 참조> 또 河岸이 山麓과 接한 地域에서는 여러 支川에서 流入된 또 다른 沙層이 堆積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多少 無理한 推想일지 모르나 이 같은 地層構造를 토대로 後氷期以後 韓半島에서 일어난 기후 및 植生의 變化와 海水面의 變動 등을 關聯지어 생각해 볼 때 이 地域에서 時代別 地形과 生活環境은 다음과 같이 推定될 수 있을 것 같다.
*6,500~6,000B.P 이 時期는 粘土層의 堆積이 끝나가는 무렵이다. 아직 谷底(現 河谷底邊)에 沖積平地를 形成시킬 만큼 堆積이 充分치는 못했고, 海水面 高度가 現 海水面 高度에서 막 上位로 移行되기 시작하던 때<註39>인 까닭에 이 一圓 대부분은 水深10m內外의 內海였다. 마치 海兩屈曲이 甚한 오늘날의 南海岸 一帶의 典型的인 地形과도 比肩된다. 더욱이 現河口의 兩岸에 對置하고 있는 頭牛山(河東 金南 高浦)과 望德山(光陽 津月 望德)의 末麓이 내해를 안고 있는 關門과 같이 마주치고 있어 굴, 고동 등 淺海成 貝類와 魚類의 棲息處로서는 더 없이 좋은 環境이었다.
氣候는 대체로 따뜻했다. 植生은 참나무科의 오리나무, 졸참나무 등을 主宗으로 한 溫暖帶性 闊葉樹가 茂盛했을 터이며<註38>, 이 무렵 牧島里는 連陸되어 있지 않고 內海中의 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海溢 등 外海의 災害를 받을 念慮가 거의 없는 곳으로 漁撈와 狩獵을 基盤經濟로 하는 集團들이 살아가기에는 아주 適合한 環境이었을 터이다.
*6.000~5,000B.P 이 時期는 上部沙層이 가장 활발히 堆積되어 가던 때이다. 즉, 기후가 가장 高溫多濕하였던 때<註38>이기 때문에 流水量(河水)이 많았던 만큼, 河水에 의해 上流로부터 流入되는 土沙量 역시 많아서 現 充積平野의 陸地化된 上部沙層(上位)이 거의 造成될 정도로 堆積活動이 盛했던 時期이다.
現在 이 地域中 高度가 높은 곳이 해발 5~6m이므로 당시의 地表高度를 現在보다도 1.5~2m 정도 낮았다고 假定한다면 당시의 海面高度가 現在보다 4m 정도 높았던 것으로 추정<註39>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計算하면 당시의 充積帶地 高度와 水面의 高度는 거의 一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一部 높은 地域에는 低濕地가 形成되었을 터이고, 潮水差를 감안한다면 낮은 地域들은 干潮時에는 海面위로, 들어가는 개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같은 地形의 變化는 前時代 보다도 貝類의 棲息環境은 좋아지나 魚類의 棲息環境은 다소 弱化되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上述한 바와 같이 아귀(現河口)의 兩岸에 突出해 있는 丘端이 마치 도크(dock)의 匣門처럼 목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海溢 등 外海로부터 높은 파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조용한 內海를 이루고 있어서 漁撈나 貝類採集에는 더 없이 좋은 環境이었을 것이다.
한편 植生은 低濕地帶에서는 갈대나 수초, 버드나무 등 汀樹木들이 茂盛하였을 것이고, 높은 물 또는 산지에서는 오리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과를 中心으로 한 溫暖帶性 廣葉闊葉樹가 主宗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註38> 당시의 先史人들은 이같은 周邊環境으로부터 魚貝類와 樹木果實(도토리 등) 그리고 山麓의 짐승 등 豊富한 食糧資源을 確保할 수 있었으리라 類推된다. 이 時期의 牧島里는 아직도 干潮時에는 渡河할 수 있을 정도의 개천(橫川江의 分流)을 낀 섬으로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4,000B.P 前後 이 時期는 溫暖했던 海水面의 極上期를 지나 다시 다소 寒冷한 氣候로 바뀜으로써 海水面의 高度 또한 急激히 떨어져 지금보다 약 3m 정도 낮은 수준에 이른 시기이다.<註38,39> 이 같은 큰 幅의 海面低下는 海岸線의 顯著한 後退를 가져오게 되고, 이로 因하여 그간에 많은 堆積物을 쌓아온, 前代에 水面下의 低地였던 개펄지대가 완전히 수면위로 들어나서 高位의 河岸臺地로 變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牧島里는 이 時期에는 東山里와의 사이에 작은 개울이 있는 정도로 連陸되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한편 前代보다 寒冷한 氣候 때문에 降雨量이 줄어들고, 이로 因해 堆積營力이 弱化되었다. 이에 더해 海水面이 낮아지는 만큼 河床勾配가 甚해짐으로 말미암아 河川流俗이 加速化 되면서 河床侵蝕이 일어나 江水面과 河岸高度의 差를 深化시켰다. 이 때문에 上流로부터 흘러든 土沙가 河岸部位에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河口로 流出되어 現存하는바 개펄지대(Tidal flat)의 형성을 더욱 促進시켰을 것이다.
이 같은 環境(氣候 地形)의 變化는 畢竟 生態界에도 엄청난 變革을 招來하였을 것은 쉬이 짐작된다. 즉, 海水種魚貝類에서 淡水種魚貝類로 바꿔 놓았을 뿐더러, 貝類棲息의 種的 量的 減少를 顯著히 가져왔을 터이다. 한편 陸上의 植生에 있어서도 低地帶 汀樹木들은 消滅되게 되고, 乾地性 樹木인 오리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科의 闊葉樹森林으로 代替되었을 것이며, 高地에서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소나무科의 針葉樹들이 나타나 繁盛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註38> 이 같은 自然環境의 變化는 곧 生活環境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즉, 종전의 漁撈條件이 惡化되고, 새로이 農耕이나 狩獵 採集의 條件을 好轉시켜서 마침내 이 地域 住民들로 하여금 經濟生活에 적지 않은 變化를 가져오게끔 作用하였을 터이다.
*3,000B.P 前後 이 時期에는 따뜻한 氣溫으로 다시 回復되고, 海水面도 거의 現在의 水準으로 돌아왔거나 다소 上回하는 線에 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이다.<註38 39> 前時代에 높은 河岸平野였던 地帶가 水面의 上昇으로 因하여 相對的으로 低位로 내려않게 되었다. 이리하여 낮아진 곳의 一部가(特히 錢島里 江岸쪽 地帶) 다시 低濕地 내지 滿潮時에는 바닷물이 차는 개펄로 되는 逆變化 일어났을 것이다.
環境上의 이 같은 變化로 말미암아 前代와는 반대로 海水種 魚貝類가 다시 盛해지는 쪽으로 生態界에도 變化가 뒤 따랐을 터이고, 植生現象 또한 低濕地에서 汀樹木들이 다시 나타나는 다소 뒤바뀌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註38> 그러나 이즈음부터 乾地의 林相은 針葉樹林種(소나무科)이 漸盛하여 마침내 闊葉樹들과 對等한 水準에까지 이르는 樣相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 前의 植生變化와는 다소 양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