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추억 하나

운영위원 이 한 균 (33세손 전서공)

'콩서리를 해다가 모닥불에 구워 먹고'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정감이 가는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그리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서리의 종류는 다양하겠지만 어릴적 자라난 곳이 어촌이기 때문에 더욱 더 많은 서리를 체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구마, 닭, 생선 심지어는 어장을 터는 해적 행위 같은 서리까지 하였으니 아무리 서리가 여럿이 모여 주인 몰래 훔쳐 먹는 장난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을의 양지 바른 곳에 제법 커다란 고구마 밭이 있었는데 고구마가 제대로 크지도 않은 여름 방학 때였다. 어두운 밤에 고구마를 찾는라고 고구마 너쿨을 뿌리째 뒤집오 놓았으니 주인은 억장이 무너져 고구마 농사 다 망쳐놓았다고 탄식을 하니 할머니들이 모여 밭을 바러보고 어림짐작으로 윗집 뉘집 새끼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혀를 차며 나무라는 소리를 엿들어 보면 우리 일행의 이름은 하나도 오르내리지 않고 고향에서 열심히 일하는 멍청이 같은 친구들의 이름만 들먹거리니 웃음이 절로 나왔던 때가 있었다.

 우리들은 거의가 외지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었기에 공부만 하는 착한 학생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빛깔 좋은 개살구라더니 학생이라는 허울을 쓰고 나쁜 짓을 하였으니 고향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가사를 돌보던 친구들에게 누명의 굴레를 씌워 욕을 얻어먹게 하였던 것이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돌이킬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내가 자란 고향 마을에서 면 소재지까지는 20여리가 되었는데, 용무가 있어서 면사무소를 다녀오려면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 거의 태반이었다. 한번은 K라는 후배와 함께 면사무소에 들렸다가 술이 기분 좋게 취해서 저녁 늦게야 귀가하게 되었는데, 5리 정도 떨어진 옆 마을까지 왔을 때에는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을 즈음이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던중 후배 놈이 갑자기 덕산아 너희 집 닭 2마리 내가 잡아 먹었노라고 하면서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별안간 튀어나온 그 목소리에 나도 깜짝 놀랐으나 때는 이미 늦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되었다. 2년이나 지나간 숨은 이야기를 술기운 때문에 토해 버렸으니 까맣게 잊고 잇던 닭 주인 덕삼이는 잠에서 깨어나 우리 일행을 뒤를 따라와서는 K의 집을 확인하고 뒤돌아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나타나서 철배 아들 니놈아 닭값 내어 놓으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떠들어 대니 K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싶은 심정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덕산은 닭 값의 2~3배를 요구하면서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도리 없이 요구대로 순순히 변상하여 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닭서리를 함께한 친구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달밤에 야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쪼개어 팔아 닭값을 치러주었으니 나무 서리를 하여 닭 서리 값을 변상하여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서리중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생선 서리가 우리들에게는 극치라고 할 수 있겠다.
  Y라는 친구는 자기 집 어장인 돌주북이라는 어장(소규모의 정치망)을 털게 하였는데, 도다리, 뽈락, 넙치, 장어, 놀래미, 게르치 등 수많은 종류의 생선들이 큰 생선상자에 듬뿍 차고도 남았다. 회, 구이, 매운탕 등을 만들어서 며칠을 두고 먹었으니 철부지었다고나 할까?

  또 다른 B라는 친구는 자기 옆집에 대구잡이 어업으로 성공한 제법 부유한 집이었는데 마루 대창 문쪽에 말린 생선이 삼태기에 가득 채워져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B와 내가 한조가 되어 거사(?)를 치르게 되었는데 목적지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그집 사립문 밖 골목에서 나는 망을 보며 보조 역할을 하고 B가 집안으로 살금 살금 들어가 마당을 거쳐 마루 위로 올라서는 순간 마루 한족 귀퉁이에서 삐거덕하는 소리가 나니 주인이 대창 문을 열면서 '너 이놈 누구냐'하면서 소리를 버럭질렀다.

  B는 기절 초풍을 하고 뒤돌아 나오는데 B의 부친께서 뉘 집 새끼냐 저 도둑놈의 새끼 잡으라는 고함소리가 덩달아 튀어 나오니 두 놈은 '걸음아 날 살려다오'라면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쿵쿵거리는 발거음 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어우러져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소리가 캄캄한 골목을 진동시키며 요란서러움을 더해 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아들인 줄 모르고 저 도둑놈의 새끼 잡으로고 외친 그 우렁찬 고함소리가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귀를 쟁쟁하게 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B는 자라서 경찰관이 되어 고성경찰서에서 20년을 근무하였는데, 어느날 버스로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고성 버스정류소에서 B를 만나 나를 붙드는 바람에 고성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술잔을 빚치며 밤을 지새우며 추억담을 논하면서 그날의 이야기로 얼마나 배꼽을 째며 웃었는지 지금도 그때의 진한 우정어린 정담을 잊을 수가 없다.

  젊은 날의 무모한 패기, 두려워 할 줄 몰랐던 용맹, 순간순간에 발휘하였던 기지 등으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그리움만 더 해진다. 그때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리워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외쳐보지만 허공에서 메아리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