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기일을 맞아

   나의 아버지는 산청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나 72세까지 사시다 가겼다. 어릴 적 한문서당에 다니고 있었는데, 일제 강점 후 1900년대 초 단성보통학교를 개설하고 학생 모집을 하면서 강제로 입학을 권하자, 나의 할아버지께서 '내 자식은 왜놈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런데도 계속 일본 경찰과 면서기가 찾아와 괴롭히므로, 이를 피해 산청군 관내가 아닌, 진양군 관내로 이사를 하면서까지 입학을 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로 하여 가산이 기울게 되었으며, 난의 아버지는 서당에서 한문만 읽고 신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훗날 면서기 하나도 못하게 되었다. 당신의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고 농사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정잡이가 되어 가족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용단을 내려 살길 찾아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벌이를 위해 10년 장정으로 갔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그 후 가족을 솔권하게 됨으로서 나도 초등 5학년 때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직전인 1945년초에 나는 고국으로 돌아와 사법학교에 다니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그 후 아버지와 가족도 환국하고,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는 운명적으로 불운한 편이었다. 만약 그 때 서당에 다니다가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더라면 앞날이 풀렸을 터인데, 조부님의 완강한 방침 때문에 그리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생시에 거기 대한 불만의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훗날 숙부님께서 '너의 아버지는 서당에서도 출중하여 수석자리를 유지하였다'고 하시고, '당시 서당에 함께 다녔던 최○○는 학교로 갔기 때문에 훗날 출세하여 경상남도 과장까지 지 낼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애석하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나는 아버지의 운명과 관련하여 나의 운명을 생각해 존 적이 있다. 만약 아버지께서 그때 일본에 가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충학교(당시는 5년제)에라도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때는 한 면에서 한두 사람밖에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대였다. 그렇게 볼 때 아버지께서 일본에 가시기로 몸부림을 친 것은 나의 운명을 열어 준 계기가 된 용단을 내리신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를 하고 싶다.

  아버지께서는 해방 후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할아버지께서 남긴 글을 모아 우산집을 발간하셨으니 이는 효심의 발로였다. 그리고 이 문집은 훗일 내가 한문학 교수에게 위탁하여 국역본으로 간행함으로써 후손들에게도 읽힐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해방 후 우리집 사랑방을 서당으로 개설, 동내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한문을 그르치기도 하셨다. 회갑 때까지 시골에 사시다가 그 후 내가 부산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부산에 오신 후에도 취이이시던 한문 책 읽기와 글쓰기(한시, 산문)를 계속하셨으며, 노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어머님과 함께 부산의 마하사와 선암사에 열심히 다니셨다.

   돌아가시기 전엔 자신의 문집까지 만들어 청서를 해 놓으셨다. 그런데 너무도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이 자식에게 문집 원고를 만들어 두었다는 말씀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다. 그랬는데 작고하신 후에 시골의 재종숙부님께서 아버님 원고를 가지고 오심으로써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한때 한 달 정도 재종숙부님 댁에 머물고 계식적에 서 두셨던 것이다.

   물론 그때 당신께서도 마지막 가실 적에 자식에게 알리고 가려고 마음먹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에게 부담이 될가봐 말씀을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고혈암 증세로 갑자기 말문을 닫으시는 바람에 유언도 못하시고 가신 것이다. 그나마 재종 숙부님께서 그 문집 원고를 나에게 갖다 주셨기에 훗날 이것을 한문, 국역 병합본으로 발간할 수 있게 하였으니 다행이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지극히 온유하셨기에 동네에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통했다. 나는 소견이 든 후에 이러한 성격이 관단성과 용기가 없어보여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었는데 결국 나도 별 수 없이 빼닮고 말았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흉보며 닮는다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회고해 보면 아버님 가신 지 어언 37년. 노늘 아버님 기일을 맞아 제사상에 지장과 함게 두 분의 사진을 앞에 두고 보니 마치 곁에 모신 듯 생시의 여러 가지 일들이 회상된다. 특히 아버님께서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 아버지의 '내 자식에게 왜놈 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신교육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됨으로써, 훗날 살길이 열리지 않아 당신께서 가시밭 인생길을 걸어야 했으니 속마음이야 어떠하였겠는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당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자식에게는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으니, 그 고마운 은혜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님! 오늘 37회 기일을 맞아 소찬을 차렸습니다. 흠향하시고 지하에서나마 고이 잠드시옵소서. (2008. 7. 『에세이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