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었기에
-83회 생일 맞아 아내에게 띄우는 편지-

   여보! 오늘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아이들이 각기 제 자식들을 데리고 와 한자리에 모이고 보니, 우리 직계 가족이 모두 18명임을 확인하게 되는구려. 이렇게 3대에 걸친 가족이 오붓하게 모인 장면을 보니, 이것이 우리 둘이 일구어 내 자식 농사의 결실이요. 자산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군요. 이러첨 대를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게 바로 인생의 모습이요. 행복이 아닌가 싶구려.

   이 시점에서 나는 당신을 만나 한 배를 타고 인생항로를 운항한 결과로 소중한 자산을 이룬 보람을 느끼고,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당신에게 편지를 띄우고 싶은 심정이 되어 몇 자 적어 보내오.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된다'는 말이 있지마는, 우리 두 사람이 인연으로 만나 한배를 타고 인생 항로에 진입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간 파란곡절도 많았지요. 처음 만날 무렵이야,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 때였소. 때마침 고향에 계시던 부모님을 부산으로 모시게 되고보니 더 힘겨웠지요. 당신은 먀느리 노릇하랴, 아내 노릇하랴, 또한 부모노릇하랴, 1인 3역을 해야 했었지요.

   더욱이 당신은 보통 여자들의 주부 역할, 부모역할 외에 직장 역할까지 해야 하였으니, 그 고충이 오죽하였으리오. 하물며 7대 종손부로 들어와 4대 벙제사까지 지내야 했는데, 내 조부모님께서 상처를 하셔 조모님이 두분이라 연간 9번의 제삿날을 챙겨야 하였으므로 얼마나 신경이 쓰였겠는가. 그럼에도 당신은 불편불만 아니하고 이를 거뜬히 극복하고 오늘을 있게 하였으니 고맙기 그지없소.

  그런데, 내가 오늘에 와서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후회되는 일이 한 두 가자가 아님을 솔직히 고백하오. 첫째로 당신이 가정주부와 직장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아울러 하는데 대하여 그 고충을 누구보다도 이해해 주어야 할 남편인 내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따독거려 주지 못하였던 것이 후회스럽소. 솔직히 말해서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비록 당신이 작장에 나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은 부모님께서 돌보아 주시고, 또 입주하는 가정부가 있어 밥짓고 부엌일 하는 것은 도맡아 하고 있으니, 무슨 그렇게 힘든 일이야 있겠느냐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 당연한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소.

   그러고 보니, 당시엔 내가 그만큼 철부지요, 권위주의적인 남편이었음을 반성하게 되오. 지금에 와서 나의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당신에게 사과를 하는 바이오. 이해를 바라오.

   또한 내가 서부경남의 대표적인 무뚝뚝한 성격의 남자로 태어났기에 속으로는 고맙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후회스럽고 마안하오. 뿐만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내가 정년퇴임하기 전까지는 거의 해 본 기억이 없으니, 이 또한 미안하오. 당신이 나에게"거짓말이라도 좋고, 연습이라도 좋으니… "하는 주문까지 하였는데 내가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횟수가 열 손가락을 꽂을 수 있을까 말가 하니 나의 고지식한 성격 고치기란 그렇게도 어려웠는가 보오.

   이처럼 나는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아내의 고충을 헤아려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고,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로 아내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 그렇게도 인색하였으니, 되돌아보면 참으로 당신에게 미안하였소. 그럼에도 그러한 내가 주제넘게도 학교에 나가 학생들에게는 '인간오륜'을 들먹거리고 사랑을 운운 하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소.

   내가 당신에게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일이 이뿐이겠소. 그런 일이 많기로 반면에 그만큼 고맙게 생각하는 일도 한없이 많다오. 무엇보다도 아이들 바로 키우기에 온 정열을 쏟아 준 일이 고맙고, 나의 부모님을, 단지 남편을 낳아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을 붙이고 친부모처럼 여겨 정성껏 모셔 주었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소.

   내 아버지께서는 72세로 먼저 가셨지만, 그 간에 시아버지를 편하게 모시려고 정성을 다해 준 그대가 고맙고, 더욱이 92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가신 내 어머니를 당신 말대로, 일찍 돌아가신 당신 친정 부모님께 못다한 정을 시부모에게 쏟고 싶은 심정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셔 주었던 것이 고마웠소. 하물려 어머니께서 88세 때 치매 증세가 일아고부터 전혀 얼뚱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촉잡거나 귀찮아 여기지 않고 넓은 이해심으로 슬기롭게 극복해 준 일이 참으로 고마웠소.

  또 어머니께서는 말년의 돌아가시기 직전 무렵, 기력이 쇠하시어 용변조차 자력으로 보시지 못해 고통을 겪으실 적에, 당신이 손가락에 올리브유를 발라 손수 변을 후벼내기까지 하면서 용변을 보게 해 드렸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 고마운 정을 내 어찌 잊으리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이기에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거늘, 당신이 나를 대신해 어머니 고통을 덜어 주셨으니, 이 은혜에 대하여는 뼈가 시리도록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소. 이때의 고마움을 생각하면, 당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해와도 감수해야 하겠는데,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의 수양이 아직 모자라는 탓인가 보오.

   다행이 이러한 당신의 정성이 음으로 양으로 통하였는지, 자식들이 모두 부모 섬기는 효심이 그런대로 서운하지는 않은 듯하니, 이것이 다 당신의 정성 덕분이라 생각되어 고맙다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과 '자식은 부모 뒤꼭지 보고 자란다'는 말이 생각나오. 이제 내 나이 80하고도 꼬투리가 셋이나 달렸으니 평균수명을 훨씬 넘게 살았으며, 당신 또한 평균 수명을 채웠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소. 오래 살 욕심은 접어두고, 여생을 그저 마음 편하고 건강하게 살다 가도록 합시다 구려. 성격 차이로 마찰이 생길 경우엔 서로간의 이해심으로 극복해 나갑시다. 이해심이 곧 사랑 아니겠소.

  돌이켜보면, 우리가 평생 반려자로 만나 살아온 인생항로가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여러 차례 풍랑을 맞기는 하였지만, 인생 귀착지를 앞두고 결산을 해볼 때, 그런대로 보람스러운 수확을 남기고 가는 듯도 하지 않소. 4남매를 낳아 하나도 꺽이지 않고 키워내 각기 짝을 지어 가정을 이루어 저마다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가지가 벌어져 둘씩의 손자가 태어났으니, 자식 양육의 면에서나, 종족 보존의 면에서나 우리역할은 하지 않았나 생각되어 흐뭇하고 그대가 고맙기도 하오.

   그대가 있었기에 나에게 길동무가 되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주었으며, 그대가 있었기에 내가 힘을 얻어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며, 그대가 있었기에 우리 후세를 얻을 수 있었고, 그대가 있었기에 내가 생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소. 고로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행복하였소. 그간 아껴두었던 말 한꺼번에 보내오.

"여보 당신 고맙소. 사랑하오." (3008. 5. 『수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