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운명은 있는 것인가?

밤 10시쯤 선고(先考)의 제사를 지내려는데 큰사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아가 애기를 낳았는데 하혈이 심하여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는 날벼락이었다. 자초지종을 되물으니, 아침부터 산기가 있어 병원으로 가서 낮 11시에 애기를 잘 낳았으나, 하혈이 멈추지 않아 기진한 채 의식을 오나전히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담당의사는 기다려 보라는 말만 하고 희망적인 언질은 주지 않고 있으니 답답하다고 하였다.

사위의 목소리가 절망감에 찬 울먹이는 음성이었으므로,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순간적으로 네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팔십평생에 자식을 앞세워야 하는, 이런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앞을 가렸다.

급히 서둘러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사위와의 통화를 두차례 계속했는데, 여잔히 의사는 '기다려 보라'는 말만 되풀이하니, 의식 회복의 가망성은 희박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 내외는 큰딸이 입원해 있는 서울 연새의료원으로 가기 위해 먼동이 트기가 바쁘게 부산역으로 달려가 KTX 첫차에 몸을 실었다. 차중에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내 딸은 스물네 살에 결혼, 이내 곧 첫딸을 낳았다. 그러나 부부교사로 맞벌이이를 하다 보니 애기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우 힘들어 했다.

아파트 옆집 아줌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퇴근 했다. 당시는 유아 양육시설도 거의 없는 시절이었다. 성살가상으로 잔병치레가 잦아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는 양육할 자신이 없어 큰아이 학교 입학후에 낳겠다는 결심으로 줄곧 피임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가지려 마음 먹었을 적엔 임신이 되지 않았다. 수년동안 부부가 산부인과병원을 찾아 상담치료를 받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포기를 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마흔 두 살에 듯밖에 자연 임신이 되어 방학 때 사장배를 내밀고 친정에 다니러 왔기에 반가워서 축하를 해 주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 떨어졌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만감이 교차되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달려가던 중 사위로부터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정아가 이제 의식이 조금 살아났습니다." 하는 것이다. 아직 말문은 열지 못했어도 고개는 끄덕거린다고 하였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내가 다시 살아난 만큼이나 기뻤다. 기차를 재촉하여 병원에 당도해 보니 다행히 딸이 눈을 뜨고 있지 않은가.

그간 수혈을 열 병 가까이 계속한 효과가 비로소 나타났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피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는 순간이었다. 산모가 42세나 되는 노산이었기에 지혈이 되지 낞고 난산을 겪게 된 결과였다.

조금 뒤 의식을 회복한 산모가 전해 주는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영구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딸이 출산을 마친 후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데, 간호사 두명의 대화소리가 귀에 생생히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한 간호사가 "이제 안되겠다. 죽었다"고 하니까, 다른 간호사가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는 말을 주고 받더라는 것이다. 산모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야 하겠는데, 기력이 탕진되어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어찌어찌하여 겨우 몸이 움직여지더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실감케 해주는 순간이 아니던가. 내 달은 그야말로 완전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운명에 대하여 깊은 상념에 잠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이 정말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혹자는 날 적부터 운명을 타고 난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운명이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게 아니고, 각자가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하루 세 번 끼니도 이어가기 어려운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본인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하여 갑부가 된 사람이 허더히 있는가 하면, 남부럽지 않은 부자 부모를 만났으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빼앗긴 사람도 있으니 어느쪽 말이 옳다 해야 할 지. 그런데 내딸의 이번 경우를 보면, '운명은 역시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아니가질 수가 없다. 운명이 있었기에 그래도 감호사의 입에서 '한 번만 더 해 보자'.는 자비심어린 말이 나오지 않았겠느냐?

여기서 나는 사람 목숨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는 병원 의사나 간호사들의 책임이 참으로 부겁고도 큰 것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때 만약 한 간호사의 '이제 죽었다. 안 되겠다.'는 말대로, 완전 포기하고 말았더라면, 내 딸은 영락없이 저승사자의 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참으로 아찔하기만 하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사이요, 손바닥 뒤집기와도 것이 아닌가.

사람의 운명은 '있는 것이다'와 '없는 것이다'를 가지고 2분법적으로 단정 지우기 어렵다. 각자가 개척해 나가는 면도 있고, 타고나는 면도 있다는 양면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운병과 비명은 이를 혼합함으로써 우리 인생에서 희비쌍곡선을 연출하는 것 같다. 그런 연출이 오히려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도 생각된다.(2008. 3. 『수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