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량 스님 살아 숨쉬는 내고향 생비량

내가 태어난 곳은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 실매동이다. '비행기 보기는 쉬워도 자동차 보기는 힘들다.'고 할 정도로 교통이 불편한 첩첩산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이곳은 산을 등지고 내를 안은 배산임수의 좋은 자리이니, 집현산의 정기를 타고 양천강을 젖줄 삼은 길게 형성된 생비량은 가히 명당자리라 할 만하다.

고향을 자신의 선택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생비량에서 태어난 것을 운 좋게 생각하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거기엔 생비량의 유래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신라로 추정되는 옛날, 집현산, 황매산, 자굴산 세 산이 어우러진 곳이 比良이라는 스님이 사찰을 지어 주민들에게 착하게 살아갈 것을 교화의 목표로 삼아 앞장서서 선도를 하였다. 세월이 흘러 비량 스님께서 입적하시게 되매, 신도들이 모여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겠습니까?"하며 통곡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주민들은 비량스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염원을 담아 이곳 지명을 '比良"위에 '生'자를 붙여 '生比良'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량 스님은 항상 베풀면서 살아갈 것을 강조하셨다. 덕화에 힘썼으므로 주민들로부터 도승으로서 숭아을 받았었다. '베풀면서 살아라.'는 그 정신은 그 후에도 계속 생비량인의 정신으로 이어져 왔을 것으로 믿어진다. '남을 위하고 베풀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정신인가. 생비량 땅에는 10900년전 비량 스님의 '베풀면서 산다'는 보시 정신이 씨앗이 되어 면면히 흐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복 받을 지명인가. 그래서 나는 이같은 유래가 서리어 있는 생비량에서 생명을 부여받아 잔뼈가 굵어지게 된 것을 타고난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잠시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당시에 한 마을에 하나의 시계도 갖기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산에 해 돋는 것을 시계 삼아 하루를 시작했다. 학교에 가는 길은 10리 길이었지만, 이웃집 드나들 듯 예사였다. 집현산을 끼고, 양천강을 따라 걷는 통학로 중간 지점에 도깨비보라는 별명이 붙은 장란보가 있었는데, 그안에는 잉어가 떼지어 삻았다.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게 있다. 하영감인가 하는 영감님이 작은 배를 타고 다니며 막대기 창을 던져 잉어를 잡았다. 그 신기한 기술에 감탄을 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내 두뇌 컴퓨터에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릴적에 산 좋고 물맑은 산청에서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고, 더욱이 비량스님이 살아 숨쉬는 생비량에서 생을 점지 받은 것이 선택된 사람에게의 영광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지명에는 물이 고와서 麗水, 큰 재가 있다고 한재마을, 書齋가 있었다고 서재골 등, 저마다 유래가 붙어 있는 지명은 더러 있다. 그런데 네 고향 생비량처럼 긴 줄거리로 된 유래가 담긴 지명은 그리 흔치 않다. 더욱이 그 줄거리가 단순하지도 않으며, 야하거나 시시껄렁한 것이 아니고, 깊은 의미와 교훈까지 깃든 이야기이고 보니 얼마나 자랑 스러운가.

여기서 지명과 관계된 농담 하나를 섞어 본다. 옛날 어느 마을 한 집에 오누이가 살았는데, 남동생이 인물이 잘 생긴 누나를 두고 연정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그길로 동생은 상사병이 깊어 이로 인해 목을 매고 말았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누나는 "그런줄 알았더라면 한번 대어나 줄걸"하고 후뢰를 하였는데, 그로부터 마을 이름이 '댓내(대어나)마을'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성장과정에서 자연환경과 인적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학설이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명산 밑에 인물 났다는 사레가 곳곳에 많으며, 현대에도 판검사가 많이 나는 고장이나 집안에 역시 고위관리가 나는 경우를 왕왕이 볼 수 있다. 우리 산청의 경우에도 생초면에 고시 합격자가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자연환경과 인적환경이 사람의 인격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로까지 직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2000년 5월 5일 비량 스님께서 환생을 하여 돌아오셨다. 생비량면 도전리 양천강변 고수부지 한 양지바른 곳에 '생비량 유래비 건립 준공식' 날 빗돌로 화신되어 나타나셨다. 수백 명 면민의 박수와 국회의원, 군수 등, 내빈들의 축사 속에 존경스런 그 모습을 보이셨다. 그리하여 생비량 유리비는 집현산 자락, 양천강 중류 도전공원 한곳에 언제나 생비량인의 정신적 지주로서 우뚝 서 있다. 나는 1년에 몇 번은 유래비를 찾는 기회를 갖는데, 비석 앞에 서면 살아 숨쉬는 비량 스임을 대하는 듯하고, '베풀면서 살아라'는 스님의 말씀이 들이는 둣하다.

이처럼 나는 자연환경 면에서 넓게는 지라산과 경호강, 좁게는 집현산과 양천강 등, 빼어난 산수의 환경을 마시고 살았으며, 또 정신적으로는 비량 스님과 같은 덕망 높은 도승의 '베풀면서 살아간다.'는 고귀한 정신의 맥을 이어받았으니 그 영향이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생비량의 유래가 전설로 흘러 전해지고 있는 땅에서 緣이 당하 탄생하여 이곳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비록 객지에 거부하면서도 생비량을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복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베풀면서 살아가고 깊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2007. 5.『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