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향기의 공헌

   6월 초순, 선적지 순례에 나서 수안보 온천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 식전 산책을 나섰다. 농부가 일하고 있는 밭두렁 길을 걸어가는데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이엇이 무슨 냄새지요?"하고 일하는 이에게 물었더니, "과부 바람나게 하는 밤꽃 냄새도 모릅니까?" 하고 손으로 산쪽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옛날부터 저 밤꽃 냄새가 독수공방 여인네들을 미치게하고 특히 40대 수절과부가 발정을 하여 팔자를 고쳐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덧붙인다.

   저만치 떨어진 곳의 산비탈을 온통 덮을 정도로 하얀 밤꽃이 한창 피어있는 곳으로 향기에 이끌려 갔다. 나무마다 하얀 꽃술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뭉게구름을 연상케 한다. 그 뭉게구름 속으로 들어서니 진동하는 향기가 코를 찌를 정도가 아니라 비뚤어 놓는 것 같다.

   나무 중에서 향기가 짙기로 유명한 것은 천리향과 만리향(금목서)으로 알고 있는데, 자극이 강하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능가하는 듯하다. 밭주인이 전해주는 과부 바람나게 하는 밤꽃 이야기, 그 전에도 밤꽃 냄새가 여인네의 마음을 흥분케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은 있었는데, 오늘처럼 실감나는 이야기는 처음이다.

   밤꽃 냄새가 어떠하기에 여인네들을 그처럼 흥분케 하는 것일까? 밤꽃 향기를 들여 마시면서 심호흡을 해 보았다. 어디서 만마본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남정네의  정액(精液)냄새 그것이다. 약간 비린내가 섞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선 비린내 같은 싫증을 느끼게 하는 냄새는 아니고, 어릴 적 어머니께서 콩죽을 끓이기 위해 맷돌에서 콩을 갈아낼때 풍기던 생콩 비린내를 연상케 하였다. 겨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냄새가 아니고 강한 자극력과 흡인력을 가진 냄새였다.

  독수공방을 지키는 여인이 밤꽃 향기를 접하면 견딜 수 없는 욕정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정네의 정액 냄새와 꼭 같은 이 냄새에 남성인 나조차도 자극을 받는데 하물며 남정네의 정을 못내 그리면서도 욕정을 잠재우고 독수공방을 지키고 살아가는 여성에게 있어서랴.

   여기서 잠시 밤꽃 향기의 공과(功過)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시싶어진다. 지난 봉건사회에서는 여성은 한번 출가하면 낭군이 먼저 죽더라도 '양반'이란 체면과 '수절'이란 족쇄에 묶이어 한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여성의 인권은 무시되었다.

   그러한 때 밤나무꽃은 남정네의 정액과 꼭같은 냄새를 풍겨 줌으로써 가련한 여인네로 하여금 발정을 시켜 새 살길을 찾을 발심(發心)을 하게 하였으니 수절의 미덕은 훼손시켰지만,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는 면에서 여권 신장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200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