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구(望九) 봉우리에 서서

   인생길을 한창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망구(望九 : 81세의 별칭) 봉우리에 서게 되었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언덕에 올라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본다. 제법 먼 노정을 달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앞으로 올라야 할 수순 봉우리를 처다보니 더 아득하기만 하다. 지끔까지 여덟 고개를 차례로 넘을 적에는 앳된 기운이 있었고, 젊은 패기가 있었으며, 씩씩한 뚝심이 있었기에 무난히 넘어왔지만, 이젠 앳됨도, 패기도, 뚝심도 다 잃어 버린 상태에서 무엇에 의지해 저 봉우리까지 오를 수 있을까.

   문득 졸수(卒壽)를 넘고 가신 내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께서는 아흔두 살 향수를 누리고 가셨으니 백수봉우리를 바라보고 가셨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고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하신다. "나는 네가 알다시피, 중년 시절까지 위장병에, 신경통에 얼마나 시달렸더냐? 그래도 부처님께 의지하여 살다보니, 만에는 큰 고통 없이 살아올 수 있었지 않았더냐?"하신다.

   내 아버지는 72세, 어머니는 92세에 가셨는데, 나는 그중간인 82세쯤 살다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한데 벌써 그 나이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78.5세라니 나는 지금 덤의 인생을 살고 있는게 아닌가?

  인명은 재천이거늘 욕심을 부리랴. 늙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다만 추하게 늙고 싶지 않다. 황혼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며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늙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부러워할 수 있게 늙고 싶다. 법정스님께서는'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다. 나도 마음 비우고 여생길을 걸어가려 한다. 그런데 '좋은 글 몇 편은 남기고 가야지' 하는 욕심이 문득 앞을 가리니, 이는 내가 아직 노욕을 버리지 못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200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