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장손 외 1 편
이 병 수 (33세손 전서공)
팔순을 코앞에 두고 친손자를 보고 보니, 예순에 능참봉한 기분이다. 6년 전 첫 친손녀를 보고, 이번에 비로소 친손자를 얻었으니, 나에게는 長孫이 된다. 외손들만 지녔다가, 처음 친손녀를 보았을 적의 기쁨도 컸었지만, 이번 친손자의 탄생은 더 큰 생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
외손과 친손은 다 같은 나의 핏줄인 손자다. 더둑 친손녀와 친손자는 똑같이 내 자식의 소생이니 핏줄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외손자보다는 친손자에게 더 관심이 가고, 친손녀보다는 친손자에게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결국 나의 옹졸함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소견 좁고 생각이 트이지 못한 소치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의 쏠림이 그렇게 움직이니 어쩌랴. 처지를 바꾸어 내 외손자의 할아버지 되는 사돈들의 심정을 살펴보더라도 역시 자기 친손자를 더 애중히 여기는 것은 인지 상정이라 볼 때, 과히 욕심꾸러기는 아니란 생각도 든다.
다음으로 친손녀와 친손자, 이는 정말 똑같은 존재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 특히 노년층 일수록 친손녀보다는 친손자를 소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전통적 남아 선호 사상 때문이라 하겠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져 젊은 층에서 남녀 구별을 별로 하지 않게 됬다고 하지만, 그래도 초등 학교에는 남자가 많아 여자 짝지구하기가 어려우니, 앞으로 남녀 성비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야기될 전망이다.
내가 6년전 친 소녀를 처음 얻었을 때 , 내 자식의 첫 핏줄이라 생각하니, 벌어졋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첫 친손자를 선사받았을 적에는 더 큰 기쁨을 감출수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다 보니, '너도 별수 없이 남아 선호 사상에 사로잡힌 졸잘부이구나.'하는 핀잔을 면키 어렵다 할 것이다. 나는 그 핀잔을 달게 받을 수밖에 없음을 자인한다.
나에게 남아 선호 사상이 더 깊게 자리잡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외아들인 내가 처음으로 공주 셋을 줄줄이사탕으로 낳다가 보니, '이번에도 설마 도령이 나오겠지.'하고 학수 고대하였던 부모님의 서운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 때마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더해져갔다.
불심이 남달랐던 어머니께서는 부처님께 매달려 손자를 얻게 해다라고 일구월심 빌었을 뿐아니라, 어느 해는 비구니처럼 등에 바랑을 짊어지고 몇 동네를 돌면서 2백 집인가를 방문, 탁발을 해 모은 곡식을 절에 시주를 올리고 손자를 점지해 주십사고 '3일 기도'를 드리기까지 하셨으니, 나의 송구스러움이 어디다 비하랴.
그러한 오머님의 정성끝에 건져올림 내 아들이 고맙고 금쪽같은 존재였기에 항상 부모님께 감사하고 보답하는 심정으로 바르게 잘 키우려고 애썼다. 그렇게 키운 나의 아이들이기에 결혼 얼마후 첫 딸을 낳아 우리내외에게 안겨준 순간은 고마움과 흐뭇함의 합창이었다.
그런데 여섯 살이 되도록 동생 기별이 없어 몹시 기다리던 차, 어느 날 터를 팔았다는 소식에 날 듯 반가웠고, 이번에는 손자를 낳아주니, 며느리가 더욱 기특하고, 안아 주고 싶도록 고맙다. 철학관과 의논하여 泫錫이라고 이름지었다. 빛나는 주석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그리하여 요즘 우리내외는 매주 2~3회씩 손자 면회하러가는 거로 커다란 낙으로 삼고 있다.
이제 1백일이 가까워진지라, 내가 '현석이 까꿍'하면 뱅긋이 웃는 모습으로 화답해주니 눈에라도 넣고 싶어진다. 사랑스러움과 천진스러움이 여방 흐르고 있다. 저의애비, 에미를 빼어 닮았지만, 이마가 튀어 나오고 훤하게 벗어진 머리는 나를 좀 닮았고, 입과 코언저리는 돌아가신 제 증조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케 하니, "씨도둑질 못한다"는 속담이 떠오르기도 한다. 제발 저 천진성을 고이 간직하고, 지혜롭고, 씩씩하게 자라, 우리가문을 잘 이어주고, 사회를 위해서도 크게 봉사하는 사람이 도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우러난다.
신문을 보니,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아이를 안낳으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키우기가 귀찮고 돈이 많이 들어서라고 하니 얼마나 경망스러운가. 더욱이 최근 왜곡된 '웰빙' 풍조가 들어와서 '엔조이 하기 위해 있는 내 인생을 아이 때문에 희생할 수 없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극에 달한 이기주의를 보는 듯하여 씁씁하다.
자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 오늘이 있는지를 알면,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을 희생할 수 없다'는 망발은 아니할 터인데……. 자기 부모는 나를 위해 희생했더라도 나는 자식에게 희생할 수 없다는 말이니, 그러고도 이 세상에 존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람이나 동물이 자식을 낳고 새끼를 그르는 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어찌 사람과 동물 뿐이랴. 나무같은 식물도 후계 생명을 타생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종족 보존의 본능인 동시에 의무가 아니겠는가? 모든 생명체의 한 살이(一生)는 고락을 함께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니, 우리 부모세대들은 자식을 교육시키려고 소도 팔고 땅도 팔고, 먹고 싶은 것도 배불리 채우지 못하면서 갖은 고생을 마다않고 감내하지 않았던가?
그런 가운데서 자란 자식이 정작 가지차례에 와서는 나는 귀찮은 것은 싫고, 즐거운 열매만 따먹겠다고 하는 것은 배은 망덕한 이기주의자요, 행락 주의자이며, 동 식물 이하의 존재가 아닌가. 그 뿐인가. 실리적으로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대 ㄷ르이 언제까지나 '월빙 생활'만 누리다가 가지는 못할 것인즉, 당장 늙고 병이 들었을 때는 누가 그대들을 먹여주고 간호해 줄 것인가?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키우기가 힘들다고 아이 낳기를 외면한다면, 젊은 사람의 씨가 마르고 말 것이니, 농사는 누가짓고, 옷은 누가 만들며, 자동차는 누가 생산할 것인가? 인류의 멸종을 가져올 발상을 왜 하는지.
인간은 과거라는 유산을 조상에게서 물려 받아 현재를 열심히 가꾸어서, 더욱 나은 세상을 미래 세대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있다고 할 진대, 아이를 낳는 것은 종족 보존의 본능이란 의미를 넘어 의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34년전에 나의 대를 이을 장남이 태어났고, 그가 6년전에 손녀를, 이번에 또한 장손을 안겨주었으니, 책임을 다한 듯도 해 이 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엄숙하고 의미있고, 보람있는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흐뭇한 감정에 젖어 있다.(고문. 한국민인협회 회원)
(2) 時祀에 참례하고
오늘은 나의 9대조이신 菊軒公의 시사날이다. 그리고 5대조 이상의 시사도 함께 지내게 된다. 아침 7시에 부산을 출발하였음에도 교통체증으로 11시가 넘어서야 도착되었다. 원래는 묘소에서 지내왔으나, 수년 전부터 재실에서 모아 지내기로 문중 합의가 되어 그렇게 하고 있다.
선조의 뼈가 묻혀 있는 묘지에서 지냄이 더 뜻이 있다고 하겟으나, 제물 운반이나 교통뷸편등을 감안하여 근래에 각 문중마다가 묘소의 벌초는 추석전에 하고, 시사는 재실에서 지내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시대 변천에 따른 일종의 현대화 움직임으로 보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나도 이에 찬성을 하였다.
당일 제관으로 참석한 소문중 일족은 약30명,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국헌공 후손이 150세대(그 중 20세대는 주소불명)인데 비하면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살아가기 바쁜 시대에, 그나마 선조의 묘사일을 기억하고 찾아 준 것만 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제물 차리기는 물론, 제사후의 일족들의 점심식사 준비를 돕기위해 부녀처럼 일족이 10명 정도가 참례하였으니 더 고마운 일이다. 만약 묘소에서 지냈더라면, 이처럼 일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식을 하는 오붓한 분위 기 조성은 못됐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때, 재실에서 지내는 이점이 이런 데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조 제사도 모시고, 우리 일족간의 치목도 도모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가.
시사(祭)는 원래 유교에서 父, 祖, 曾祖, 高祖까지는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5대조 이상은 묘소에서 지내기로 된 풍습인바, 時祀 또는 묘사, 묘제라고도 불리운다. 그런데 30년 전 제례 간소화 바람이 불어 '가정의례준칙'이 생겨 제사는 조부모까지만 지내기로 정해짐에 따라 증조, 고조도 시사를 지내는 문중이 생겨났다.
제사는 무엇 때문에 지내는 것일까? 만약에 나의 선조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내어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선조는 얼마나 고마우신 존재인가. 나는 이날 선조의 연혼 앞에서 나를 있게 해 주신 데 대해 먼저 감사를 드리며, 조상님에게 부끄럼 없는 후손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저승에서의 조상님의 명복을 빌면서 소찬을 차려놓고 의식을 올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일족들에게도 거런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자고 제의 하였다.
오늘날 급격한 시대 변천으로 물질만능의 풍조에 밀려 정신문화가 경시됨으로써 도덕성이 허물어지고 있어 우려의 소리가 높다. 우리나라 효사상은 인도 詩聖 타고르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대가족제도와 효정신의 실천국 코리아가 세계를 밝히는 등불이 되리라"고 할 만큼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미풍이었는데, 이것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유교에서의 三綱五倫에는 물론 현시대에서 실천하기에 맞지 않는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임금이 없어졌음으로 君臣有義란 한 덕목만을 제외하면 나머지 부자간에 친함이 있어야 하고, 부부간에 구별이 있어야하며,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 사이에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네 항목은 그대로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세상에 부모없는 자식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진대,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부모를 낳아준 조부모 또한 나의 뿌리가 아니가? 나무에 뿌리가 있어 줄기와 잎이 돋아나듯이, 사람에게도 선조란 뿌리가 있었기에 자손된 우리가 태어난 것이라면, 우리는 곧 가지요 잎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조상 섬기고 제사지내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효정신에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시사에 참예한 일족들에게 "나무의 뿌리를 가꾸면 줄기가 튼튼해지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듯,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선조에게 정성들여 제사를 지내면 자손이 번창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이치가 아닌가? 하고 "앞으로 우리는 자기 부모 모시기와 선조 제사지내기에 정성을 다해 나가자"고 하였는데 이것이 젊은 일족들에게 얼마나 먹혀 들어갈런지는 알 수 없다.
최근에 와서 우리사회에서 각 문중마다 시사(묘사)를 지내는 품습이 점차 살아나고 있음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다만, 산소에까지 직접가지 않고 묘소가 너무 먼곳은 각 묘소의 영혼을 재실에다 촌혼하여 차례로 지내는 일들을 볼 수 있다는데, 이는 오히려 시대 상황에 잘 적응하는 바람직한 현대화 조치란 생각이 든다. 문제는 조상을 섬기는 숭조정신에 있다고 할 것인즉, 낡은 형식보다는 정성을 더 중시하여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논어에 '효행은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효자 중에 빗나간 인간 없다'는 말도 있다. 나는 이 날 산청 묵곡리 入鄕祖이신 국헌 할아버지와 5대조 이상의 몇 조부모님의 시사를 성경재에서 모시고 나니, 흐뭇하고 보람도 느꼈기에 나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내년에도 빠지지 않고 꼭 참례해야지'하는 마음으로.
(고문.<한국문인협회 회원><월간 수필문학등단><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수필집:초상회그리기 등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