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계절의 봄은 오건만
이 병 수 (33세손 전서공)
동태처럼 얼어 붙었던 계곡물이 녹아 내리고, 성급한 개나리는 벌써 노랑 벼슬을 달기 시작하였다. 며칠 전 금정산에 올랐더니 이른 봄맞이를 나온 등산객들로 제법 붐볐다. 우리가 오른 산비탈에는 유난히 진달래가 많았다. 겨울 동안에 枯死했다 싶었던 진달래가 줄기에 봄기운을 빨아올리고 통통한 꽃봉오리마저 부풀려 초록을 토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봄의 향기와 더불어 春信에 접하는 듯 하고, IMF로 인한 우리의 위축감마저 가시게 하여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준다.
또 어제는 모처럼 고향을 찾았더니 동구 밖 시냇가에 버들강아지 실가지 끝에까지 봄기운을 밀어 올려 연초록 피부색으로 단장하고 있었으며, 길 한켠 모종답 모판에서도 봄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나지막하게 덮인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니 씻나락이 파릇파릇 새싹을 튀우고 있지 않은가. 얼마 후엔 저 연약한 생명들이 벼모종이 되어 내고장 온 논에 들어서서 열병식을 전개하고, 가을에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온통 황금 들판을 이루어 농민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 눈곱만한 떡잎들이 그지없이 귀엽고 애정을 느끼게 하였다.
집으로 돌어와 거실 화분 속의 난초를 유심히 보니, 이 또한 한결 생기가 나고, 옆에서 새촉까지 뾰초롬이 돋아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지금 이땅에는 산에도, 들에도 집안에서도 온통 계절의 봄소식이 전해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시작의 의미와 희망을 안겨주는 서광이요, 신호탄인 듯 싶기도 하다.
거런데 한편으론, 우리 앞에 전개되는 사회현실을 돌아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정치는 실종되고 정잰만이 활개를 치고 있다. '국회 529호실 사건'으로 갈라진 여 야의 정치판은 좀체로 봉합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극과 극을 치닿고 있다. 얼마전에 IMF경제 환란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지만, 야당의 참여 없이 일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경꾼으로 밀려나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심정은 착잡하고도 안타깝기만 한다.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IMF환란이었기에 그 원인은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 야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청문회가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타협의 산물이거늘, 국회에서 논쟁을 벌여야 할 의원들이 어찌하여 가두로 뛰쳐나가야만 하는 것인지? 또 여당은 어떻게 해서라도 야당을 대화의 광장으로 끌어들여 서러가 손을 맞잡고 국정을 논의할 아량을 베풀지 못하는 것인지? 저말 답답하고 이젠 구경꾼 노릇하기도 질릴 지경이다.
오늘날 우리 정치의 금선 관제는 '경제살리기'와 '국민화합'이라 할 것이니, 이런 우선 과제 해결을 위해 지역 감정을 초월하여 나라 살리기에 뜻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IMF사태는 결국 우리가 정치를 잘못한 데서 기인된 것이므로, 그 책임은 모든 정치인 들에게 있다고 할 것이며, 궁극적인 책임은 대통평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한 것이 국민들이고 보면 국민들에게도 응분의 책임이 잇다고 해야 할 것인즉, 우리 모두가 책임을 느끼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국민 가운데 IMF사태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보고 싶다. 나도 IMF원인제공자 중 한 사람임을 자인한다. 해외관광붐이 항창일때 나도 일본에 3회, 대만에 2회, 미국 유럽에 각1회 등 해외관광을 함으로써 '외화보유고 축내기'에 일조를 하였으니 공범자가 아니고 이엇이랴.
청문회에서 증인을 다그치고 있는 여당의원들도 야당시절 노사분규 때 노동자 편에서서 표를 의식하고 임금상승을 부추김으로써 기업경영을 악화시켜, 외채를 늘이게 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 결코 큰 소리만 칠 입장은 아니리라. '易地思之'란 말도 있지 않은가.
이제 이 땅엔 방방곡곡에 만물이 새움트고 생동하는 계절의 봄, 희망의 새봄이 분명 돌아오고 있건만, 정쟁과 지역감정을 녹여 주는 국민화합의 먼은 언제 어려는지?
사람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하는법, 자연의 봄을 맞은 우리 정치판도 이젠 '정치 해빙제' 약을 복용해서라도, 자연이 얼어 붙은 계곡물을 녹였듯이, 경색된 정국을 녹여 하루 속히 온 국민이 갈망하는 정치적 화합을 맞을수 있도록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이 봄에 가져 본다.(부산종친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