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 불태우는 고향이 보고 싶다.
李 基 秀 (35세 전서공)
내가 세상에 태어나 자란 곳은 산이 남과 북으로 놓여 있고, 서쪽으로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이 맑게 흐르던 동네이다. 행정 구역으로 표현하자면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가 내 고향이다.
마을은 상촌과 하촌으로 구분되어 상촌에는 沈氏 집안들이 많이 살았고, 하촌에는 우리 일가 李氏 집안이 대부분이었다. 상 하촌 마을에 약 200호 정도 모여 살았으니 상당히 큰 마을 이었다.
우리 마을에는 세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대마무 숲이 많았고, 밤나무가 많았으며, 명주 길쌈이 상당히 성하였다. 그래서인지 어른들께서는 묵실(묵곡의 토속 명칭)은 댄나무에서 1,000석, 밤나무에서 1,000석, 명주베를 짜서 1,000석, 하여 1년에 3,000석을 거두는 마을로 불린다는 애기를 자주 들었다.
대나무가 많은 이유는 마을이 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겨울이면 강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어왔으므로, 바람과 먼지를 막기위한 방풍림으로 조성되어져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부분의 시골 마을이 그러했듯이 한 마을 안에 대여섯 집, 아니면 많아도 열집 내외가 모여 동네 안에서 또 작은 동네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처럼 이루어진 작은 동네들은 반드시 대나무 숲속에 둘러 싸여 있었다. 겨울에 눈이 내릴 땐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총소리 처럼 통탕거려 깜짝 깜짝 놀라기도 했다.
또, 고목길 위로 무성한 대나무들이 내린 눈의 무게에 휘어 얽혀 긴 터널을 이루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이것을 「기차굴」이라고 부르며 그 속에서 눈썰매를 타며 추운 줄을 모르고 놀면서 자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같이 놀던 동무들 중에 기차굴을 실제로 본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우리들은 우리들은 눈 덮인 대나무굴을 기차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요즈음도 가끔 그때 같이 눈놀이 한던 동무들이 보고 싶어서 무심코 고개를 묵실 쪽으로 돌릴 때가 있다.
우리 마을에서 학교로 가는 가는 길은 밤나무 숲을 지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밤나무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 까먹으며 집으로 왔고, 집집마다 알밤을 모으는 단지가 하나씩 마련되어 있어 누가 가장 밤을 많이 주워 모으는가 하는 경쟁이 절로 생기기도 하였다.
명주 길쌈을 많이 하게된 것은 아마도 우리 마을이 강변이어서 마을 전체가 평평한 들판었고, 토질에 모래 성분이 많아 뽕나무가 잘 자라는 관계로 성행한 게 아니었을까 한다. 아무튼 집집마다 베틀이 한 대 정도는 다 있었고, 겨울 밤에는 베짜는 베틀 소리가 골목마다 가득히 울려 퍼지곤 했으니까.
명주 길쌈이란 정말로 많은 정성과 섬세한 손길이 가야 하는 일이었는데,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낮에는 들에나가 농사일을 하시고, 밤에는 늦게까지 베틀에 앉아 북을 만지느라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으시고 일하시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이러한 마을 환경속에서 자라면서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내게 잊혀지지 않고 언제나 뇌리에 남아 있는 그리운 일이 있는데, 바로 정월 대보름날 달집을 지어 놓고 불태우던 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날처럼 온 동네가 한 덩어리가 되어 협동하고 양보하고 풍요한 하루를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때 보름날이 되면 아침에 보름밥을 먹고 -그날은 소에게도 밥을 먹이기도 했다- 조리를 들고 이웃집 보름 밥을 얻어 서로 나누어먹기도 했다. 점심이 끝나면 곧바로 달집 짓는 행사가 준비되는 것이다. 꽹과리를 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 동네 복판에 젊은이와 꼬마들이 우루루 몰려나와서는 자가에게 배당될 역할을 기다리는 것이다.
대체로 20세 이상 되는 젊은 청년들은 달집지을 자재를 거출하고 우리 꼬마들은 거출된 자재들을 달집 지을 장소로 운반하는 작업을 맡았다. 대나무 숲을 가진 집은 대나무 5~10개정도를 내어주고 대밭이 없는 집은 짚이나 소나무 가지, 새끼줄 등 자기네 형편에 맞게 협조하는 것이 상례였다. 골목 골목 마다 대나무를 끌어 날랐던 일은 정말 즐거운 추억이다. 자재가 다 모이면 가운데에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달집을 짓기 시작해서 달 뜨기 한시간 정도 전에 달집을 완성 하였었다. 달집 맨 끝에는 2~3개의 연을 달아 놓았는데, 그 의미는 지금 내가 정확히 기록 할 수 없어 아쉽다.
달집이 완성되고 나면 달이 뜰 때까지 장고와 꽹과리로 달집 주변을 빙빙 돌며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농악놀이를 한다. 흥겨운 잔치 가운데 동네 어른들 몇 분이 그날 달집에 첫 불을 붙일 소임을 정하는 일이 있는데, 대개는 그 해에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소원이 있는 집 안주인이 소임으로 결정 되었다. 아들을 보고 싶은 집이나 전 해에 액을 당했던 집 등이 소임으로 정해지곤 했는데, 소임을 맡게 된 집은 그것이 크다란 경사였으며, 달집 앞에 집에서 빚은 술 한동이와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해서 달집을 지은 사람들에게 정성껏 나누어 주며 감사해 마지 않았다. 달집에는 달이 들어가는 문이라 하여, 달뜨는 방향에 큼직한 문을 내어 두는데, 우리 꼬마들이 그 안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어른들에게 쫓겨 나곤 했었다.
달이 뜰 무렵이 되면 앞산 꼭대기에 개인적으로 올라가 별집을 지어 불태우는 사람도 있었다. 별집에서 연기가 나고 잠시후 동산에 둥근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 불붙일 소임이 지극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고 불을 붙인다. 그러면 모두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달집이 완전히 잘 타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달집이 한창 타들어 가면서 대나무 터지는 소리가 귀청을 울리면 얼마나 신이 나던지 우리는 불타는 달집 주변을 손뼉을 치면서 빙빙 돌았다. 강열하게 타오르는 불빛으로 온 동네가 훤히 밝아지는 듯 했다.
달집을 지어 불태우던 그 날은 온 마을 전체가 한 마음으로 뭉쳐져 있었고, 무엇이든 나누는 미덕이 있는 날이었다. 모두가 양보하는 하루였으며,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자비로운 모습이 가득한 하루였다. 비단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이웃 마을도 그러했으며 지역사회가 그러했고 우리 나라 전체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태평스럽고 복 받는 인간사회가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 고향을 그렇게도 풍요롭게 하던 그 풍속이 사라져 버렸다. 소위 산업화된 생활방식의 변화 때문이리라. 오늘날 경제적 여건이 많이 좋아진 것은 틀림없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그때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쩐지 고개가 저어진다. 그래서인가. 달집 불태우는 정월보름이 있는 고향이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