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문원>
목욕탕에서 당한 봉변
이 병 규 (33세 전서공파)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지하수 100%의 목욕탕이 있다. 20년 가까이 살면서 그 목욕탕이 오늘날까지 매일 단골로 다니는데, 주인 아주머니의 다정한 인사말도, 같은 시간대 손님들의 낯 익은 얼굴들도, 다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다.
그 동안 이 집을 팔고 이사갈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20년을 눌러 살아온 이 동네, 어쩌면 죽는 날까지 30년이 훨씬 넘도록 살게 될지도 모른다.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고, 근정산을 오르는 서봉 약수터 가는 등산로가 있으며, 5분이 채 안 걸리는 전철역과 시장이 있는 이 좋은 조건들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물좋은 목욕탕을 매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늦잠을 자고 눈을 반만 뜬 채 목욕탕에 도착하여 냉 온수 욕을 하고 나면 그 상쾌한 기분은 비길 데가 없다. 더구나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과 목욕비 세일, 면도기 선물 등 따뜻한 마음 씀슴이도 좋다. 들리는 소문으로 암ㅎ은 봉사활동도, 불우한 이웃돕기도 한다니 이런 선심을 지닌 주인이 운영하는 목욕탕의 단골 손님인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어느날 평소보다 좀 늦은 시간대에 온탕에 앉아서 보니 20대 젊은 친구가 싸우나 실에서 땀에 훔뻑 잦은 채로 나와 냉탕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적을 하려다가 참고 있는데, 이어서 건장한 체구에 이목구비는 반듯하게 생겼어도 이딘가 무법자 폼의 포악해 보이는 50대가 싸우나 실에서 나와 땀에 젖은채 냉탕 욕조에 걸터 앉아 심호홉을 두어번 하더니 바로 냉탕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닌가. 좀 더 젊은 때 성질 같았으면 "야! 야!" 하면서 호통을 쳤을 지도 모르는데 "거 물 한바가지 뒤집어 쓰고 들어 가시죠!" 나름대로 예의 바르게 말 했다.
그러나 눈이 부리부리하고 약간 험상궂은 얼굴이 싫었지만 그래도 꼭 지적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애기를 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그 친구 돌연 의외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 가지고 "뭐? 뭐가 잘못 됐어?" 하면서 오히려 내가 무얼 잘못한 사람처럼 반격을 한다. "왜? 내가 못 할말 했어? 땀 좀 씻고 들어 가란 말이야!" 했더니, "야! 임마! 너나 잘해. 아침부터 재수가 없을라 하니 별놈의 소릴 다 듣겠네" 한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왕 벌린 춤 끝장을 봐야 봐야 할 것처럼 서로 옥신 각신 욕설과 고성이 오고가고 목욕탕이 왁짜지껄 해도 다른 손님들은 쳐다 보고는 있어도, 나서서 그 잘못을 지적하여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참! 오늘 미친개 항테 물렸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나이 들면 보고도 못 본체,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지내라"고 하던데 '괜히 오늘 내가 실수 했나 보군'하면서도 완전히 기분 잡친 하루가 되고 말았다. 하고 싶어도 하고나면 별로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기분 좋은 일이 목욕이라고 했는데... 하루만 기분이 상하게 아니라, 두고 두고 밤잠을 못 이루도록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흔히 대중탕에서 에티켓을 소홀히 넘기기 쉬운데, 위의 경우 외에도 샤워를 틀어놓고 비누칠을 하거나 때를 밀고 있는 사람, 물을 계속 머리에 퍼 붓고 있는 사람, 수건을 물 그릇에 담가둔채 물을 계속 흘러 보내는 물 낭비 형, 탕안에 잠수하여 두손으로 머리털을 끍어 대는 사람, 옆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비누물이 튕기도록 난잡하게 비누칠을 하는사람, 때밀이 기계에 등만 밀라고 써 놓았으나 팔 다리 배까지 들이 대고 미는 사람, 탕 속에 꼭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 애들 데리고 와서 탕안에서 지나치게 장난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어도 애 기 죽이기 싫다고 그대로 두는 일부 젊은 층, 싸우나실에 양말이나 팬티를 말리는 분, 심지어는 싸우나실 벽에 걸어둔 한약 봉다리를 들어내 깔고 앉거나 다리로 짖눌러 땀이 배게하는 중 늙은이도 목격 할 수 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일에 신경 안 쓰고 그냥 넘어 가는 것이 편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사회 생활은 혼자는 불가능 하고 여러 사람이 서로 도와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본이다. 자기만 편리하면 되고, 자기만 기분 좋으면 되고, 다른 사람에 폐를 끼치는 일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사는 사회,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는 결코 민주사회도 아니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인가 남의 그릇된 행동을 문제삼아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생활에 불편할 뿐 아니라 발못하면 봉변 당하기가 일쑤라! 그냥 지나치는 것이 현명하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남의 잘못을 꼬집는 일은 까다롭고 부덕한 소치로 수양이 덜 된 사람이 하는 생활태도인 양 터부시하는 생각은 선진 민주 시민의 양식과는 거리가 먼 극히 이기주의적 발상이다. 정의를 알고도 실천하는 용기를 잃은 것은 정의가 뭔지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어느 날 가족들과 외식할 기회가 있어 동네 J삼계탕 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출가하여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딸이 "아버지 그집에 가지 맙시더. 전에 애 데리고 식당에 왔다고 주인 어쩌씨가 어떻게나 노골적으로 싫어 하던지, 다시는 그집엔 안갈랍니다." 한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S횟집으로 갔는데, 그 집 젊은 주인 아주머니는 삼계탕 집에 안 가는 이유라도 아는 것 처럼 애 엄마와 할머니가 있는데도 어린애를 아예 받아 들쳐 업고 다니면서 주방 일까지 보는게 아닌가? 같은 식당업을 해도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업에 적성이 맞는 사람, 성공할 사람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얼마뒤 공교롭게도 J삼계탕 집앞에서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 그 목욕탕의 그 남자가 삼계탕 한그릇을 건너편 가계로 배달하는 것을 목격할 수 었다. 안타깝게도 몇 달 안가서 그 삼계탕집 샷타문을 대낮에 내려 놓은 것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理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