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화개 탐방(花開探訪)

직전회장 李源珉 (32세 목사공)

酷暑의 기승이 한풀 꺾인 8월말 무렵, 公職에서 물러난 뒤로는 처음으로, 집사람과 함께 화개를 찾아 갔다.

지리산에서 화개천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고, 바위를 타고 흐르는 맑은 물소리, 이름모를 못 새들의 지저귐이 정답다. 어릴 때는 흔히 밨지만, 지금은 보기 드물게 된 고추잠자리가 날고, 옛날의 초가 지붕에서 이젠 밭 두렁으로 내려와 앉아 한가히 졸고 있는 누렁텅이 호박을 보니, 문득 뭔가 잊었던 것을 다시 찾은 듯한 환상에 젖는다.

밤에는 동서집에서, 여러 사람이 어울려, 더덕구이, 은어 튀김에 동동주 몇 잔 들고 나서, 자녁식사로 산나물 비빔밥을 먹었는데,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살찐다고 말리는 집사람의 충고를 무릅쓰고, 수북한 한그릇을 다 비웠다. 그리고 시냇가로 내려가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서, 이슬에 젖어 가며 이 사람 저 사람이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이어 가니 감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졸 듯이 깜박한 사이에, 아침이 훤하게 밝았다. 시내로 내려가서 맑은 물에 세수를 하고나니, 마음속까지 씨은 듯이 상쾌했다. 메기탕으로 아침밥을 들었는데, 또한 별미였다.

이집 누구의 취미인지 壽石 몇 점 놓여 있기에, 어설픈 칭찬을 했더니, 근처의 愛石家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곳에서 수석뿐만 아니라, 蘭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분재도 볼 수 있었으나, 워낙 식견이 짦아서, 장님 코끼리 더듬는 꼴이 됐지만, 다만 우리 차의 시배지인 화개에서, 奇奇妙妙한 수석과, 분재가 어우러진 자리에 앉아 작설차를 마시던 그 순간은, 無我之境이 아니었던가 싶다.

점심은 토종닭 백숙에다 잡곡 닥죽을 들었는데, 도시의 삼계탕 맛에 익숙해 있던 입이 노랄 지결이었다. 오후에 칠불사를 찾아 갔다. 고향의 명찰인데도, 나는 쌍계사며, 불일폭포는 가 봤서도, 칠불사는 처음이다. 집사람은 학생 시절, 그때는 차도가 없어서 칠불사까지 걸어서 가느라고 무척 힘들었다는 회고담을 들어면서, 진입도로가 개설된 오늘은 자동차로 갔다. 절에 당도하여 정말 깜작 놀랐다.

전란으로 불터 버린 후, 수십 년을 그냥 버려졌던 국보급 문화재가 한 훌륭한 스님의 끈질긴 노력에 의하여, 복원됐다는 소문만 드고 그저 심심산중의 조그만 암자러니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웅장하고, 격조높은 위용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일반 기와는 여울에 동파되기 때문에 황동기와 지붕에, 전통 양식으로 아름답게 丹靑한 여러 전각들, 황금빛의 불단에 부처님이 자비로운 웃음을 먹음고 앉아 계신 대웅전이며, 신비의 亞字房, 그밖에 모두 완벽하게 복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에 오시는 信徒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갖출 계획을 세워, 하나 하나 추진하고 있었다.

이 높은 곳에 차도를 개설해 가며 이토록 큰일을 추진하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주지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 반가히 마지하여 주신 주지스님께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직접 안내를 해 주셨다. 그날 마침 부산에서 오신 단체 참배객들과 대웅전 앞에서 마주쳤는데, 그 분들이 주지 스님께 칠불사에 관 설명을 청하였다.

아마도 주지스님이신줄 모르는 둣하기에, 내가 소개를 드렸더니 놀랍고도 반가운 그런 표정으로 나직한 환성이 일었다. 주지 스임께서는 스스럼 없이 그 즉석에서, 주위에 모여든 분들이 알아듣기 쉽게, 한국 불교의 도래사와 불교의 원리, 아울러 칠불사의 유래등을 간추려 말씀하셨는데, 곧 훌륭한 법어였고, 놀라운 포교의 힘을 지닌 스님이시라는 감명을 받았다. 돌아올 때, 칠불차라고 즉석에서 揮毫하신 차 한통을 선물로 주셨는데,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찾아 뵈어서 큰 실례를 하였다.

나선 걸음이라, 새로이 도로가 개설된 老姑壇으로 차를 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늦어서 두 번째 후게소에 이르니, 멀리 산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그곳 사람들의 만류로 정상을 지척에서 바라다만 보면서 다음에 다시 찾아올 구실을 남기고 돌아 왔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화개장터에 도시의 물결이 치고, 섬진강 화개천 연변에 각종 영업시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길손들이 매우 편리하고 즐거운 야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암 전원의 옛 정취를 잃지 않았으면 싶은 杞憂와 아직은 가장 맑다고 자부하는, 저 강물이 영원히 맑게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그 뒤 칠부사에 두어번 가 봤는데, 칠불사의 전각들과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거의 갖추어졌고, 진입로도 확장 포장되어 자동차 통행이 편리하게 되었다.

올봄, 화개의 십리 벚꽃이 활짝 필 무렵, 축제가 열린다기에 구경 갈가 했지만, 전국에서 상춘객이 모여들어, 하동읍에서 화개에 이르는 길에 차량행열이 이어져 정체가 심하다고 하기에 벚꽃 구경은 명년으로 미루고, 다가오는 여름에 은어 맛을 보러 갈까 싶다.(199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