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단풍과 황단품
'단풍'하면 보통 홍단품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로는 붉을 단(丹)자를 써서 '丹楓'이라 하며, 일본에서는 붉을 홍(紅)자를 써서 紅葉(こぅを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청주에서 수필문학 모임이 있어 문학기행으로 청남대를 관람하였는데, 도중에 양쪽 길가에 때마침 은행나무 가로수의 단품이 찬란한 황금빛을 자랑하면서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보고서 단품에 대한 개념이 확연히 바뀌게 되었다.
단풍은 홍단풍만이 단풍이 아니라, 황단풍도 결코 홍단풍에 못지않은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초봄에 개나리 꽃이 노랗게 피어 우리의 눈을 끌기도 하는데, 은행나무 황단풍은 농도면에서는 그에 따르지 못하지마는, 은근한 끈기를 풍기는 면에서는 격이 더 높다고 생각되었다.
청남대로 들어가는 진입로 양편에 도열해 있는 은행나무 잎들은 단품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치 나뭇가지에 금 잎사귀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듯, 온통 황금빛을 화사하게 발하고 있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감에 취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나뭇잎에도 한 살이[一生]가 있다. 봄철의 나뭇잎은 초봄엔 갖태어난 아기 모습마냥 앳되고도 귀여운 연초록을 연출하다가, 초여름에 접어들면서는 짙은 청초록 차림으로 바뀌면서 한창 청춘을 뽐내고 씩씩함과 믿음직스러움을 보여 준다. 그러다가 가을이 다가오면 나뭇잎은 초록의 기세가 꺾이어 풀이 죽고 어쩔 수 없이 황색에게 슬슬 초록을 빼앗기는 상황이 되니, 인간의 노쇠형상과 같다고나 할까. 나뭇잎의 노쇠현상을 우리가 단풍이라 이름지어 준 것이라 하겠다.
나뭇잎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관찰해 보면, 대개 처음에는 약간의 샛노란 빛을 띠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것은 누른 빛의 농도를 더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붉은 빛으로 탈바꿈 하는 것도 있으니, 전자는 황단풍, 후자는 홍단풍으로 갈라서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황단풍보다는 홍단풍을 선호하게 됨으로써, 홍단풍은 1등급으로 대접받고, 황단뭎은 2등급으로 찬밥 대접을 잗게 되었으니, 그 원인은 홍색이 황색보다 정열적인데 있었다 할 것이가?
홍단풍으로 대표격인 것은 무어라 하여도 본단풍 나무 중의 홍단풍 나무라야 할 것이다. 본 단풍나무 중에도 처음엔 푸른잎으로 태어났다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붉은 잎으로 변신하는 것이 있고, 처음부터 붉은 빛에 조금씩 농도를 가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있다.
본단풍 나무를 제외한 일반 나무의 홍단풍 중에서 특히 우리 눈을 끄는 것으로는 옻나무 단풍, 감나무 단풍, 벚꽃나무 단풍 등을 들 수 있으리라.
붉은 농도의 짙은 순서를 매기더라도 그런 순서가 되리라. 등산길에서 단풍 경관을 감상하면서 지나다가 감칠맛 나게 우리 눈을 끄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 보면 옻나무 단풍일 경우를 흔히 겪는다. 그만큼 옻나무 단풍은 정열적인 면에서 단연코 단풍 중의 수장(首長)이라 할 만 하다. 홍단풍을 농도에 따라 줄을 세워 보면, 감나무 잎도 뒤로 밀리면 섧다 할 단풍이다. 감홍시의 빛깔이 장년의 정열을 지닌 적색(赤色)이라고나 할까?
또한, 양지볕 바른 곳에서 자란 벚꽃나무 단풍도 홍단풍 중에 서는 뺄 수 없는 생동감을 주는 단풍이다. 그래서 나는 벚꽃나무는 우리에게 1년에 두차례 꽃을 피워 선사하는 고마운 나무라고 칭찬을 해 주고 싶다. 봄에는 산뜻하고 하얀 벚꽃을 피워 초봄을 장식해 주고, 가을을 맞아서는 잎으로써 또 한번의 빨간 꽃을 피워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지 않는가?
황단풍은 버드나무 도토리나무를 비롯한 잡다한 나무들에서 볼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는 것은 은행나무 단풍이다. 은행나무 줄기가 거느리고 있는 황단풍은 우선 볼륨 면에서 여위지 않고 황금 꽃다발을 안고 다가온 듯 우리에게 품성함을 보여 준다. 눈부시도록 활홀감을 느끼게 한다. 산이나 절간에 서 있는 은행나무 단풍잎도 좋기는 하지마는, 더욱이 길 양편에 가로수로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다풍잎을 보면 한결 더 산뜻하여 우리를 온화한 세상에 초대한다. 뿐만 아니라, 땅에 떨어져서도 좀체 황금빛을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부드러움을 선사해 주니 더욱 고맙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만을 귀히 여기고, 2등 이하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풍조가 팽배하여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때가 많다. 마라톤을 비롯한 각종 경기에서 그러하고, 학교에서 학생의 학업 성적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가정의 자녀 양육에서도 공부 잘 하는 자식만 추켜 주고, 공부 못하는 자식에게는 꾸중만 내려 기를 죽이는 일이 허다하다.
이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1등과 2등의 차이는 한두 발 차이이며,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지 않은가? 1등 못지 않게 2등, 3등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은 풍토가 조성되어야만 건전 사회가 조성되리라 믿어진다.
내가 황단풍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한 것은 비단 청남대 가는 길에서만이 아니었다. 그 후 시사(제) 모시러 가는 길에 진주 합천간의 도로에서도 볼 수 있었고, 일본 홋카이도 관광 길의 산복도로 양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단풍은 결코 홍단풍만이 단풍이 아니고, 황단풍도 단풍의 대열에 손색없이 끼일 수 있는 훌륭한 경관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은행나무의 단풍을 유심히 보라. 그리고 늦가을 차를 타고 산야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지나갈 적에 우리는 결코 붉게 물든 몇 나무만을 두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온산이 누렇게 물든 경치를 보고 탄성을 지르고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단풍관광에 있어, 일부 붉게 물든 단풍나무만을 보고 찬양을 하면서 온사의 누렇게 익어가는 단풍에는 눈이 가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하면, 이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불구자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홍단풍을 설령 일류라고 하더라도, 황단풍은 아류(亞流)에는 속하는 단풍으로 대접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1등, 인류만이 대접받는 세상이 아닌, 아류도 대접 받는 건전한 사회 풍토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