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淸香堂 할아버지

    
죽각12세손 李炳壽    

   올해는 퇴계, 남명 두 선생의 탄신 5백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안동 도산서원과 산청 덕천서원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유학정신을 되살려 무너져 가는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두 선생이 같은 해에 태어나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양대 학파로서 쌍벽을 이루어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우연한 인연이 아니라 할진대, 70평생에 단한번도 상면을 못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이이었다. 그런데 당신같은 동갑내기로서 두 선생 사이에서 양쪽을 넘나들며 교량 역할을 한 선비가 있었으니 그 나의 12대조인 청향당 李源선생이시다.

   여기 데한 기록은 이번에 청향당 탄신 5백주년기념사업회 발간 청향당 선생 실기· 죽각선생문집 국역본에서 밝혀지고 있다. 물론 이는 이미 2백년 전 한문본이 발간되었을 때 알려진 사실이나, 이번 국역본이 나옴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청향당 할아버지는 공교롭게도 퇴계, 남명 선생과 같은 연산군 7년(1501)에 경남 산청 단성면 배양리에서 태어나셨는데, 관향이 합천이고 성철스님의 11대조이기도 하다.

   청향당 할아버지와 남명 선생과의 첫만남은 중종13년(1518) 18세때 겨울, 산사에서 주역을 같이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서로 강학하고 토론하고 왕래하였다.

  청향당 선생께서 퇴계 선생을 만난 것은 3년 후인 중종 16년(1521) 퇴계 선생께서 의령 가례촌의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든 때부터였다. 때마침 1년 전에 청향당께서 같은 가례촌의 의춘이씨 집안의 사위가 되었었기에 두 선생은 처가곳에서 몇 차례 만나는 동안 당장 친구처럼 뜻이 맞아 서로 공경하며 지내다가, 얼마후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청향당 선생은 이렇게 3년 간격으로 남명, 퇴계 양선생을 차례로 사귀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때로는 덕산으로 남명을, 때로는 안동으로 퇴계를 찾아 교유하면서 같은 신유생으로 삼경사동지교로 우정의 꽃을 피웠다.

  기록에 의하면, 청향당은 도산으로 퇴계를 네 번, 퇴계는 배양을 두 번 방문하였었다. 또 청향당은 남명을 여덟 차례, 남명은 청향정사를 수차 방문하여 시를 저어 읊으면서 교우하였으며, 거문과를 들고 산천을 동행하며 낭만을 즐겼다.

   남명 조식 선생은 항상 청향당 선생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와 네가지가 같은 사동 벗이다."라고 하였는데, 나이가 같고, 도가 같고, 마음이 같고, 덕이 같음을 말한 것이었다.
   또 『청향당 실기 문집』에 퇴계 선생과 주고 받은 시 12수가 수록돼 있는데, 구 중에 이런시가 있다.

   세사람의 태어남을 누가 알았으리
   갑년보다 삼년 앞 신유년에 태어났네
   두류산과 배양과는 아득히 멀기도 하지만
   그리워하며 시를 보내는 일 없을 수 있으랴
   (三人初度有誰知…可無相憶遞傳詩)

  청향당 할아버지는 이와 같이 퇴계, 남명 선생과 동갑내기로 양쪽에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할 정도로 훌륭한 학자였으나 아쉽게도 제자를 길러내지 못하였다. 아니, 못한 것이 아니라,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기록에 의하면 청향당께서는 1546년 儒行으로 천거되어 곤양훈도로, 1569년에 함양훈도로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그때 만약 이를 물리치지 아니하고 나아갔더라면, 그 후 훌륭한 제자도 길러냈을 지도 모르고, 또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제자들이 스승을 받들고 이름을 빛나게 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유추해 보건대, 당시엔 당파싸움이 심하여 오늘의 충신이 내일엔 역적으로 몰리고 하는 혼탁한 세상인지라, 벼슬을 하지 않고 야에 묻혀 은둔생활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기에 당신의 신념과 남명 선생의 영향도 받아 취임을 안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만큼 반골기질도 있엇던 것 같고, 한편으로는 청향당께서는 평소 거문고를 들고 다니면서 노닐 정도로 풍류적 낭만적인 선비였다고 하니, 성격상 나라에서 주는 임명직(훈도직도 당시 임명직이었다)에는 아예 흥미가 없었기에 세 번이나 모두 사양하였는지도 모른다.

   5백년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그 경위를 따져보고, 아쉬운 생각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어찌보면 남의 할아버지의 명성 떨침에 대해 시샘하는 소치라고 핀잔을 받을 것 같기도 하여 쑥스럽기조차 하다.

   하기야 동갑내기 세 학자 중에 퇴계, 남명 두 선생은 '탄신 500주년'이라고 안동과 덕산에서 각 나라 안이 떠들썩하게 기념행사를 치른다는 보도가 있는데 비라여, 우리 청향당 할아버지는 문중 후손 1백여 만명이 모여 '문집 국역본 출판 고유제(告由祭)'행사를 조촐하게 치르는데 그치고 있으니 부러운 생각이 든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운명이었던 것을 어찌햐랴. 누군가가 사람의 움명은 조물주의 장난에 죄우된다고 하였지만, 그 종조를 따를 수 없는 것이 사람이 아니겠는가.

   지금에 와서 5백년 전 산대 할아버지를 원망해서 무엇하랴! 오히려 벼슬에 대한 탐욕을 초월한 깨끗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던 할아버지의 높고 깨끗한 유지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여기에서 할아버지의 반골기질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게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청향당의 10세손인 나의 친조부님(휘 : 尙鎬 호:愚山)께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 처음 보통학교(초등학교)를 개설하였을 적에 '나의 자식에게는 왜놈 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함에 따라 나의 부친께서 결국 신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교육만을 받게 함으로써 서당 우등생이었던 부친이 훗날 진로를 열어 자기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이러한 조부님의 반골기질은 당신의 10대조인 청향당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던가도 생각된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스스로를 반성해 볼때 나는 그 반골기질을 많이 유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반골기질로 인해 선친께서 본의아니게 피해를 입게된데 대한 아쉬움이 있어 은연중에 반골기질을 선호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선조의 반골기질에 대한 또 하나의 반골기질을 편 것 아닌가 싶어 불효스런 생각까지 드니 이를 어찌할꼬.(2001. 12'수필문학'에 발표한 것임)

[약력]
월간「수필문학」추천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부회장(현)
재부산청문우회 회장(현)
'부산문학상' '연암수필문학상'등 수살함
수필집「생존신고」등 6권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