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孔子敎運動의 理念과 實踐


  李炳憲이 孔子敎運動을 전개하게 된 것은 먼저 그 자신의 시대와 유교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傳統儒敎가 서영근대질서로의 轉換期에서 많은 弊端을 노출시키고 있는 반면에 西歐文物을 志向하는 新學의 開化論者들로부터 엄혹한 비판을 받고 있는데 대해 儒敎의 本來的 진실성을 재인식하고 현실 속에서 中興시키려는 信念을 발현시킨 것이다. 그는 20세기 初의 근대화초기에서 開化論者들이 儒敎를 反對하던 기본이유를 ①華夷論에 따른 事大主義에 빠져서 外國人을 夷狄禽獸로 배척하는 蹂躝人權과, ②春秋의 尊周 專制를 固守하는 逆抗大勢와, ③天圓地方說에 매달려 있는 誤解眞理와, ④現世政治나 哲學에 한정되는 孔子非宗敎라 규정하여 儒敎를 誤解하는데 있다고 지적하였다.33) 또한 그는 儒敎가 쇠퇴한 原因으로서도 ①敎祖를 崇拜하는 관념과 ②社會共公思想과 ③舟車의 交通에서 西洋人에 못 미쳤고 ④鎖國主義로 東亞가 劣等하게 되었다하여 儒敎社會의 실제적 취약점을 反省하고 있다.34)


  이러한 儒敎가 당면한 問題點을 解決하는 方法으로서 그는 孔子敎의 眞實性과 現實的 機能을 解明하며 改革論을 通하여 孔子敎의 中興을 위한 방법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는 孔子敎가 神道의 宗敎性을 기본성격으로 지닌 것이며 世界進化의 原理와 大同社會의 理性을 내포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普遍的 내지 現實的 眞實이 敎主인 孔子에 의해 倡敎되었더라도 天下의 變化에 適應하여 天下에 傳布하지 못한다면 儒敎가 세상에서 시대적 使命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35) 또한 이러한 保敎의 使命感은 斥邪論的 正統主義에 따른 儒敎만의 尊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信敎自由가 정당한 원칙으로 보장된다는 시대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36) 따라서 李炳憲은 孔子會를 佛敎나 基督敎와 비교하면서 世上을 救濟한다는 共通의 目的을 인정하고, ‘自上而達下’하는 超越性 중심의 佛敎나 基督敎에 비하여 “下學而上達”하는 현실성 존중의 儒敎가 방법적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37) 이러한 多宗敎的 開放世界 속에서 儒敎는 그 理念과 制度에 있어서 合理性 機能性 내지 世界進化의 原理에 따라 競爭을 통해 優越性을 確保하여야 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時期를 ‘儒敎大腹原의 機會’라 하여 孔子敎의 改革的 實踐문제가 지닌 時代的 중요성을 강조하며, 孔子敎의 制度的 내지 理念的 개혁의 실현을 ‘儒敎의 死活問題’로 지적하였다.38) 李炳憲은 당시 中國의 現狀에서 傳統儒敎와 改革儒敎로서의 孔子敎를 鄕校式儒敎와 敎會式儒敎로 區分하여 파악하고 있다.39) 그리고 敎會式儒敎의 주장과 특성으로서 ①獨尊孔子以配上帝, ②孔子爲宗敎家, ③孔子爲大同主義, ④春秋爲三世進化之書, ⑤中國爲一人, 天下爲一家, ⑥維新而闡今文經學, ⑦以孔子降生爲紀元, ⑧康南海 廖平 蔡爾康 王德潛 陳換章 등이 倡導의 조목을 들었다.40) 그것은 李炳憲의 中國 孔子敎運動에 관한 이해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요, 동시에 그의 孔子敎運動이 추구하는 模範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李炳憲은 孔子敎를 傳布하는 방법적 과제로서 ①敎堂을 지어 孔子를 誠心으로 섬기고, ②聖經을 선택하여 飜譯해서 天下에 配布하고, ③敎士를 選定하여 天下에 經典을 講說한다는 3條를 제시하였다. 그가 改革儒敎로서의 孔子敎를 敎會式儒敎라 命名한 것이나 傳布方法으로서 제시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孔子敎운동이 敎團組織을 제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 그의 孔子敎운동이 基督敎의 宗敎組織的 기능을 受容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李炳憲은 孔子敎운동의 具體的 實現을 위하여 中國 孔子會의 支部로서 자신의 고향에 隣近한 山淸郡 丹城面 培養마을에 培山書堂을 건립하여 韓國 最初의 孔子敎會를 세우는 사업을 실행하였다. 그는 1918년 丹城 培山의 親族들과 文廟를 세워 敎祖 孔子만을 모시려는 약속을 하였다.41) 1920년에는 曲阜에서 孔子의 眞像을 模寫하고 今文의 眞經을 講得하기 위해 退溪先生의 後孫 李忠鎬를 代表로 하여 曲阜의 衍聖公府에 보내는 請願書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거 衍聖公 孔德成의 허락하는 回信과 康有爲의 격려하는 回信을 받아 왔다.42) 그리고 1921년 李忠鎬등과 培山書堂儒會를 發起하여「培山書堂設立趣旨書」와「進行事目」을 定하였다. 여기서 培山書堂의 配置制度는 上段에 文廟를 세워 孔子만을 모시고, 中段에 道東祠를 세워 退溪(李滉)先生과 南冥(曺植)先生을 모시며 李炳憲의 家系의 先祖로서 淸香堂(李源)과 松堂(李光坤) 竹閣(李光友)도 함께 配享하고, 下段에는 講堂인 培山書堂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설립계획에 따라 1923年 正月 文廟와 道東祠 건물이 俊工되자 李炳憲은 다시 中國에 들어가 曲阜의 孔子像을 模寫하여 9月 19日 培山書堂의 落成式에 文廟에 奉安하였다. 이때 地方儒林들의 培山書堂의 設立에 대한 聲討가 일어났고 뒤이어 東萊의 安樂書院을 비롯한 地方儒林의 聲討通文이 나와 맹렬한 非難을 받게 되었다.43)


 培山書堂의 制度는 李炳憲의 孔子敎운동에 따른 敎會式 制度이므로 傳統의 書院이나 書堂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먼저 文廟는 成均館과 鄕校의 國家制度에만 허용된 것인데 培山書堂의 文廟는 우리나라 最初의 民立文廟라는 특성을 갖지만 保守儒林에게는 僭越한 행위로 규탄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文廟에는 孔子의 神主만 있고 像本을 設置하지 않았으며 孔子만이 아니라 四聖(顔 曾 思 孟)과 孔門十哲 宋朝六賢등 從享神位가 함께 모셔졌으나, 培山文廟는 孔子의 像이 중심이 되고 孔子만을 配享하여 傳統的 背向制度를 破棄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다음으로 道東祠에 退溪 南冥의 두 先生을 配享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儒林의 公論이 없이 先祖를 先賢의 祠宇에 모시는 것은 不當하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李炳憲은 先祖를 섬기는 마음을 미루어 先賢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입장에 있으며, 個個人이 孔子에 祭享할 수 있다면 先祖를 先賢에 從享하는 것은 家門의 自律性에 맡겨질 수 있는 문제라 할 수 있게 된다.


  培山書堂이 孔子敎會로서 孔子敎운동의 始發이 되었으나 保守儒林들의 排斥으로 挫折되고 말았다. 오늘날까지 培山書堂은 孔子敎운동의 擴散에 아무런 業績을 남기지 못하고 建物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李炳憲의 情熱的인 孔子敎운동이 실패한 것은 時代의 急變 속에 儒敎의 自己保存意志는 改革의 모험을 취하기보다는 抵抗의 保守를 擇하였던 것이다. 制度의 改革과 意識의 改革이 相關的으로 竝行되어야 할 것이라면 李炳憲의 改革論은 孔子敎理念의 擴散이 缺如된 상황에서 强靭한 保守儒林으로부터 排斥당하고 西歐化를 志向하는 近代化의 大勢로부터 疎外된 속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韓國儒敎史를 通하여 孔子敎의 改革理念을 闡明하고 孔子會를 創立한 사실은 지워질 수 없으며, 더구나 오늘날 끊임없이 儒敎의 現代化와 自己改革을 요구받는 현실 속에서는 더욱 새롭게 중요한 意味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33)敬告域內儒林同胞, 海內外志士反對我儒敎者, 「有四大原因, 一曰蹂躝人權, 一曰逆抗大勢, 一曰誤解眞理, 一曰孔子非宗敎家」

34)儒敎復原論 第七章 儒敎傳布,「其爲敎也至大, 開發也甚遲, 然其原因亦有四, 一.崇拜敎祖之觀念不及西人, 一.社會公共之思想不及西人, 一.舟車之交通不及西人, 一.鎖國主義又爲東亞遺傳之劣性」

35)同上, 第三章 儒敎終止, 「道必因人而存, 吾儒之赤幟不立, 則先聖之至公血誠, 無以布白於天下後世 而儒敎之名 將永絶於寰宇之內矣, 夫爲敎主者倡敎, 爲敎徒者保敎, 天下之定理, 人類之本分也」

36)同上, 第八章 儒敎交際, 「今日信敎自由四字, 實從無量劫中來, 經驗已深, 則東西各敎之所當奉行者也」

37)同上, 第二章 儒敎性質,「各因其歷史之根據而入敎……, 西敎自上而達下者也, 儒敎下學而上達者也, 然悶天下後世之迷於道, 而其敎之之心則一也」

38)李炳憲, 辯訂錄(1932刊), 7張,「今日乃儒敎大復原之機會也, 非此先聖之大義, 則對社會之赤化, 而無以定其平衡, 對學界之靑年, 而無以與之指南, 對歐美之學者, 而無以得其感化, 對現世之各敎, 而無以幷行不悖也」

39)同上, 1張,「小生十數年前, 久游中國, 觀察儒敎, 敎之中自分神舊兩派, 有鄕校式儒敎, 是謂舊派, 有敎會式儒敎, 是謂新派」

40)同上, 1~2張, 新舊儒敎對照表 參照

41)眞菴我歷抄, 戊午 正月 11日條

42)李炳憲, 九思齋及培山書堂實錄 參照

43)李炳憲의 培山書堂建立에 따른 非難內容과 解明은 培山文廟及道東祠奉安後遭變日誌 및 辯訂錄에서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