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眞菴 李炳憲의 孔子敎思想


  1. 孔子敎思想의 形成과 康有爲의 影響


   眞菴 李炳憲(1870~19400은 20세기 初葉에 儒敎傳統의 社會體制가 崩壞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유교를 宗敎的 組織으로 再建立하기 위한 孔子敎運動을 展開하고 孔子敎 理念的 體系化를 추구하는데 일생의 심혈을 기울였던 孔子敎運動을 전개하고 孔子敎의 理念的 體系化를 추구하는데 일생의 심혈을 기울였던 宗敎思想家요 宗敎運動家라 할 수 있다. 그가 韓國近代思想史에서 차지한 위치와 성격을 특징 지워 본다면, 첫째 그는 康有爲의 孔子敎思想과 今文學을 철저하게 受容하여 康有爲의 思想體系를 韓國近代史에 提示한 인물이요, 둘째 그의 孔子敎運動과 理念的 認識은 儒敎를 宗敎的 組織으로서 파악하며 구성함으로써 儒敎의 宗敎化를 관철한 인물이요, 셋째 그의 孔子敎運動은 당시의 보수적 儒林들에 거부당하고 배척받으면서 日帝下 朝鮮社會의 儒敎傳統을 改革하여 새로운 儒敎組織化 시도하였던 改革主義者라는 점이다.


 李炳憲도 그의 思想的 形成過程에서 靑年期에는 朱子學의 正統性을 信奉하는 保守的學風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27세때 朝鮮朝末期 嶺南地方 西南部에서 활동한 性理學의 巨儒인 寒洲 李震相(1818~1885)의 高弟 俛宇 郭鍾錫(1846~1919)의 門下에서 性理說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4세(1903년)때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電車와 鐵道등 근대적 시설을 직접 보면서 傳統的 道學의 한계를 切感하고 時局의 變化에 대응하는 방법에 고민하였다. 이때 그의 思想的 轉換에 契機를 만들어 준 것은 淸末 戊戌政變 및 淸日戰爭의 事情과 康有爲의 改革說을 듣고 아울러「泰西新史」등 서양에 관한 서적을 읽으면서 世界의 情勢와 근대문물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 사실이다.6) 그는 새로운 시대변화에 대응하면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유교의 革新的 再認識을 자신의 과제로 구체화시켜 갔다. 그리고 이를 더욱 확고하게 정립하기 위하여 5차례나 중국에 건너가서 康有爲의 門下에 나아가 각별한 지도를 받았고, 또한 衍聖公府를 出入하면서 자신의 孔子敎思想을 體系化하며 孔子敎運動의 방법을 구체화하는데 본격적으로 沒頭하였다.7)


 李炳憲의 生涯를 통해 보면 孔子敎思想의 形成過程은 3期로 나누어질 수 있다. 곧 第1期는 1903부터 44세때(1913)까지 문헌을 통해 康有爲의 영향속에 孔子敎의 性格을 認識하던 시기이고, 第2期는 45세(1914)4月 康有爲를 처음 만난 때부터 56세때(1925) 다섯번째 마지막으로 만난 때까지 孔子敎思想의 체계화를 우루고 孔敎會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며, 第3期는 57세(1926)이후 晩年에 今文經學mf 연구하여 정리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第1期에서 그의 孔子敎思想을 정리한 것은 第1次 訪中時 1914년 3월 북경에서 저술한「宗敎哲學合一論」이다. 여기서 이미 孔子敎에 대한 기본윤곽이 잡혀있음을 볼 수 있다. 곧 그는 西歐에서는 哲學과 宗敎가 眞知와 迷信으로 분별되지만 東方에서는 宗敎(儒敎)가 迷信을 벗어나므로 哲學과 宗敎를 合一시키고 있다고 규정한다. 또한 기독교에서도 馬丁路得(Martin Luther), 康德(Kant), 達爾文(Darwin)을 거치면서 哲理가 날로 밝아지고 迷信이 날로 엷어져 세계는 반드시 宗敎와 哲學이 合一될 것이라 지적하였다. 나아가 그는 孔子를 地球上의 獨一無二한 宗敎家가 될 것이라 보고, 孔敎는 全世界 大同의 敎가 될 것이며, 孔子는 哲學과 合一하는 宗敎家라 言明하고 있다.8) 여기서 그는 西洋思想에서 宗敎와 哲學이 分立된 것을 파악하고 孔子의 儒敎 속에 兩者를 綜合하면서 미래에 世界를 統合할 宗敎로서 儒敎의 역할에 대한 信念과 공자의 위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第2期에서 李炳憲이 香港의 本宅으로 康有爲를 처음 訪問하였을 때 康有爲는 民族精神을 維持하는 방법으로 宗敎의 중요성을 力說하였고 儒敎를 國家의 생명으로 삼아 救敎를 통한 救國을 敎示하였다.9) 民族意識을 儒敎와 결합하여 해석하려는 試圖는「歷史敎理錯綜談」(1921)「吾族當奉儒敎論」(1921)등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그는 易의「帝出乎震」을 이끌어 包犧가 震方에서 나왔다 하고, 孟子의「舜, …東夷之人也」등에 근거하여 舜도 東夷族으로 보며, 女眞의 金과 淸이 中原을 占有했던 사실을 들어, 朝鮮族이 儒敎文明의 原流를 이루었으며 中原을 지배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중장하기까지 하였다.10) 이러한 주장의 客觀性과 說得力은 論外로 하더라도 亡國民으로 民族矜持를 高揚시키고 民族精神과 儒敎를 결합시키려는 意志를 의미 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訪問때 康有爲는「春秋筆削微言大義考」를 제시하면서 春秋學을 講論하였고, 두 번째 1916년 杭州로 訪問하였을 때 康有爲는「中庸注」와「禮運注」를 주어 그의 大同說과 孔子敎의 근본이념을 傳授하였으며 朝鮮에서의 儒敎改革을 위한 方法을 토론하였다. 李炳憲은 당시 朝鮮總督府의 宗敎令이 儒敎를 宗敎團體에서 削除한 사실에 抗議하는 長書를 總督府에 제출하기도 하면서 儒敎의 宗敎的 本原性을 체계적으로 解明하는「儒敎復原論」(1919)을 저술하였다. 세 번째 1920년 상해로 康有爲를 訪問했을 때 康有爲는「儒敎復原論」을 評하면서 今文學의 기초가 빈약함을 충고하였고,11) 「新學僞經考」를 주어 연구하게 하였으며, 「論語注」「春秋筆削大義微言考」「大同書」도 줄 것을 약속하면서 今文學에 관한 토론을 深化시켰다. 또한 李炳憲도 이러한 敎示속에서 今文學연구에 專念하게 되었다.12)

 

 1923년 네 번째 중국에 들어가 靑島로 康有爲를 방문했을 때「孔子改制考」를 받고 여러 날 동안 孔子의 創敎와 託古改制의 뜻에 관해 토론하였다. 이때 孔子改制說을 李炳憲이 確信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3) 그러나 李炳憲은 康有爲의 今文學을 충실히 받아들여 今文經學의 文獻을 수집하고 연구하는데 盡力하였으며, 1924년 日本에도 가서 東京의 日本諸國圖書館도 出入하고「孔經大義考」(1924)를 저술하였다.


 第3期에서는 今文學을 연구하여 纂輯하는데 專力하여 1926년「詩經附注三家說考」를 저술하여 康有爲에게 보내 격려를 받았으며,14) 잇달아「書經傳注今文說考」(1926)「禮經今文說考」(1927)「易經今文考」(1928)를 자술하였다. 그리고 66세(1935)부터 70세(1939)까지의 最晩年에는 易經의 연구에 몰두하여 10餘次의 易課에 箚記를 남기고 있다. 易經의 연구는 곧 그의 孔子敎思想이 經傳上에서 歸結處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李炳憲은 儒敎를 宗敎로서 組織하면서 康有爲의 孔子敎思想을 受用하였고, 또한 康有爲의 직접지도를 받으며 今文學의 經學的 체계를 자신의 孔子敎思想의 기초로 確立 시키고 있다. 이러한 李炳憲의 思想은 비록 擴散되지는 못하였지만 韓國近代史上史속에서 康有爲의 正統的 繼承者로서 확고한 위치와 意義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註)

6)이무렵 李炳憲은 上海에서 발행되는 萬國公報 [林樂知(Young J. Allen)창간]를 購讀하였고, 西洋上古哲學史, 萬國宗敎志, 哲學要領 등 서양의 哲學과 宗敎에 관한 저술도 읽었다.

7)李炳憲은 1914年(2月~5月), 1916(6月~10月), 1920年(3月~4月) 1923年(2月~9月) 1925年(2月~7月)의 다섯 차례 中國을 訪問하였다.

8)李炳憲, 宗敎哲學合一論,「西歐之言宗敎者, 與哲學而爲二, 東方之言宗敎者, 與哲學而合一, 究其所以分, 則以其有眞知迷信之別耳」「基督敎之行, 普及於全球, 而馬丁路得出, 則已改頭換面矣, 康德達爾文出, 則又生-敵國矣, 故曰二十世紀以後, 則哲理日明而迷信日簿, 各國宗敎家漸失中堅之檗壘, 而宗敎哲學必合于一矣, 夫然後孔子方爲地球上獨一無二之宗敎家, 而孔敎乃爲全世界大同敎矣, 何以故, 孔子者哲學合一之宗敎家也」

9)李炳憲, 眞菴我曆抄, 甲寅 4月 下旬條,「國家之命脈在於民族之精神, 團結民族維持精神之方, 則惟一無二之宗敎也, 中麗兩國之宗敎, 則儒敎是也, 以儒敎爲自國之生命, 救敎爲救國之前提, 則已亡之國庶乎其有望也」

10)歷史敎理錯綜談의<吾族四入中原論>에서는 ①包犧氏-爲天下文明之祖-朝鮮氏族發展之嚆矢, ②舜-爲世界共和之元祖-朝鮮氏族文明之代表, ③金太祖 太宗-朝鮮氏族武功發達之明驗, ④淸太祖 太宗-朝鮮氏族聲明文物發揚之極度라 해명하고 있으며,「吾族當奉儒敎論」에서도 ①儒敎爲自國出産之數, ②儒敎爲天下唯一無二至善無對之敎, ③儒敎爲國粹所寓之敎, ④儒敎可統諸敎, 而又能合哲學科學, ⑤儒敎適合於今日, 又當爲世界最終優勝之敎의 5條를 제시하고 있다.

11)眞菴我歷抄, 庚申 3月 15日條, 「(先生)又曰, 大作復原論, 極發揮聖學, 可尙可尙, 然書中之語, 多爲僞古文所亂, 不可不知, 不明今古文, 則公洋口說不明, 則孔子三世太平大同之義不出, 而無以應今之變而容納之, 是推孔子納于絶流斷港, 無以通今世也, 古本原之學, 必通今文乃可」

12)同上, 壬戌年條,「自去年以來, 除却閒出入, 專用心於今文經學及東方歷史, 務欲䟽通於現時大勢」

13)同上, 癸亥 6月 9日條, 「於六經皆孔子自作之說, 終始不服, 先生曰, 於孔子創敎改制託古之義, 疑則全疑, 信則全信, 是則全是, 非則全非, 君則半信半疑, 全不成道理」

14)同上 丙寅 9月條.「南海先生 回書曰, 天地在孔敎之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