闕里衍聖公府秘書廳會議事項

癸亥三月二十日高麗李炳憲來到闕里呈培山儒會公函于衍聖公府二十四日自衍聖公府開秘書廳會議據招待員陶貳銓報告則李炳憲來意有三主旨


一.朝鮮域內 耆儒 李忠鎬 柳建佑 曺庸相 等 爲現世新儒敎發展也 地欲增進世界文化而於域內古丹城郡培養里創立文廟以模奉 大成殿內


聖像之意致書再懇已爲積年懸案今宜辦出事

一. 培山乃李氏先祖淸香堂李先生(源)生長之地李先生與東方先正退溪李文純公(滉)南冥曺文貞公(植)託爲三庚四同之友 李先生子松堂李公(光坤)從子竹閣李公(光友)亦學于兩先正實東方百世之師也培山李氏依中朝微州태氏龍峯劉氏雙峰廖氏尊祖親賢之意由闕祖而追慕兩先生爲同堂合享之擧乃立道東祠于 文廟門外並請儀節磨鍊事

一. 祠下平原另建培山書堂組織培山儒會雖不難乎親祖尙賢之事而其發起宗旨則專以獨尊敎 祖闡明

至聖先師之微言大義爲主方欲溯究今今古文眞僞之別助長東西洋文化之運又求同情於中國孔敎會事


   궐리 연성공부 비서청 회의사항

계해 삼월 이십사일 고려 이병헌이 궐리에 와서 배산유회 공문을 연성공부에 아뢰니 이십사일에 연성공부로부터 비서청 회의를 개최하여 초대원 도식전(陶式銓)의 보고에 의거하면 이변헌의 온 뜻이 세계의 주지가 있음

1. 조선 역내 드러난 선비 이충호 이건우 조용상등이 현세 새 유교 발전을 위하여 세계 문화를 증진하고져하여 옛 단성군 배양리에 문모를 창립하고 대성전 안에 성상을 받들려는 뜻으로 글을 보내 두 번 간청한 것이 벌써 적년 현안이니 이 뜻을 마땅히 판출할 일

1. 배산은 즉 이씨 선조 청향당 이선생 源의 생장한 땅이라 이선생이 동방 선정 퇴계 이문숭공 황과 남명 조문정공 식과 같이 삼경 사동의 벗이 되고 이선생 아들 송당 이공 광곤과 종질 죽각이공 광우가 또 양 선생에게 배웠으니 양선정은 실로 동방 백세의 스승이다. 배산 이씨는 중국 훼주 등씨와 용봉 유씨와 쌍봉 요씨가 조상을 높이고 선현을 친히 하는 뜻에 의거하여 그 선조로 말미암아서 양선정을 추모하여 한당에 합향하는 거사를 하여 이에 도동사를 문모의 문밖에 세우고 아울러 의절을 마련하는 일을 청함.

1. 사당아래 평원 별도로 배산 서다을 세우고 배산 유회를 조직하니 오직 선조를 친친하고 선현을 숭상하는 사실을 떠나지 아니함이요 그 발기하는 종지인즉 오로지 교조를 높이고 지성 선사를 천명하는 미묘한 말과 대의로 주장을 삼아서 바야흐로 금문과 고문의 진위를 소급하여 연구하고 동서양 문화의 운수를 도우며 또 중국 공교회에 종정을 구하는 일.


    第 一 項

秘書廳批曰李忠鎬等主旨前己欽佩無容贅議惟聖像模奉事自端木子設木像以後至東魏時變爲朔像然其間只有唐吳道子墨本石像未有着色之本與其募畫手而施人工朝夕瞻瀆求其彷佛下若命映像者而撮影爲得天眞之爛漫也縱使改日施術只當依映本而模寫可也


   제일항

비서청이 비답하되 이충호 등 주지는 전일에 벌써 흠패하였으니 거듭 의논할 것이 없고 오직 성상을 모하여 바드는 일은 단목자(端木子)1) 마무상을 설치한 뒤로 동위(東魏)때에 이르러 변경하여 흙상(塑像)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다만 당나라 오도자의 묵본(墨本)과 석상이 있고 색을 칠한 화본은 없으나 그 화공을 구하여 인공을 베풀어서 조석으로 첨알 하여 그 방불함을 구하기는 사진사를 명하여 촬영하는 것이 천진난만을 얻는 곳과 같지 못하니 비록 날을 고처 시술할지라도 다만 영본에 의거하여 그리는 것이 가함.

1)단목자(端木子)는 자공(子貢)을 말함

  

  第二項

秘書廳批曰道東祠尊奉事李門親親之意居多實不離乎家族觀念而終以保合國粹爲重旣欲尊奉李退溪曺南冥兩先生據中朝之徽州龍峯雙峰典禮李炳憲言徽州龍峰雙峰之奉朱子也태之三贒劉之二賢廖之二賢亦各與享何必論李門三賢之獨多然事當循公抑私伏乞十分裁正秘書長曰劉廖兩門之祀朱子亦擧闕祖兩賢李門則亦以淸香堂松堂兩位入享何如李炳憲曰淸香堂及松堂公乃炳憲先祖而子孫移居咸陽惟竹閣公子孫世居培山舊里事之緣起多由竹閣公子孫斡旋則三賢之中如擧二賢八享鄙先祖二位中當亭一位可也且炳憲則雖無入享之祖初不慊於心惟知獨尊敎祖之爲義秘書長曰如退溪南冥淸香堂聯享竹閣從享可乎李炳憲曰如是則於情禮妥當惟三先生聯享節次位牌書式當依中國典禮抑牌面何以爲題乎秘書長曰此係貴國典禮與貴國士林議定可也李炳憲曰東方自來專制成習一功儒林家篤守之論皆以爲 文廟與祠宇非朝廷召命不可創設不可虔奉其種種謬論多有不堪設想者況闕里爲儒敎發源之地首先之域則其所尊信不下於昔日之朝論也伏乞叅酌進行秘書長曰此持參攷東方文廟典故及儒林界歷史得其定論而後可發表也至二十五日秘書長開廳協議曰據韓國史則趙靜菴李退溪李栗谷爲東方儒林之宗惟退溪最盛議者以爲東韓四千年眞儒雖東瀛先背亦有退溪學派譬諸閩中之考亭但其生於海外世容有未聞其風者然爲中東後學者當與程朱並尊可也牌面題以先賢退陶李子正合禮典南冥本非東方陞廡之賢且雖在陞廡之例牌面之稱賢稱子恐不可一律槪施或稱以先儒先正似合宜李炳憲曰竊伏大論己發似難改議然於敝邦事實恐或有未及熙管者蓋陞廡則自黨論以後有實學而無援者例難得命南冥之賢不可以此軒輕南冥之學極正大極高明甞作神明舍一銘直心爲太一天君尸而淵者則抑可爲千古心學家之律令居常慕

先聖先師而朝夕瞻拜于位在數百年前知獨尊孔顔之大義自中州漢宋以來亦不可多見也是以一方儒林多右冥左退欲南冥之居先乃今日抑揚懸殊則恐無以慰域中士林之心也秘書長曰題以先正南冥曺子何如(李炳憲)曰此事皆一一據理以陳白則決無含糊未瑩之弊幷稱先賢南冥曺子恐至當秘書長依允取裁又問尊門二賢題以淸香堂李先生竹閣李公何如(李炳憲)曰葛敢不從命遂自當廳述道東祠致祭祝文如左


   제2항

비서청이 비답하되 도동사가 존봉하는 일은 이문 친친의 뜻이 많으나 실상은 가족관념을 떠나지 아니하여 마침 國粹主義를 보합함으로써 무거움을 삼아서 이퇴계 조남명 양 선정을 존봉하기를 중국의 훼주 용봉 쌍봉의 예전에 의거 하고자 함이다. 이병헌이 말하기를 휘주 용봉 쌍봉 등에서 주자를 받들 적에 등씨의 삼현과 유씨의 이현과 요씨의 이충을 배향하였으니 어찌 구태여 이문 삼현이 많은 것을 논하리오. 그러나 일은 마땅히 공도를 딿고 사정을 누러야 하나니 복걸하옵건대 십분 재정하옵소서. 비서장이 말하되 유요 양문이 주자를 봉사할적에 또한 그 선조 양현을 들었으니 이문도 또 청향당과 송당 양위로써 입향이 어떠하리요. 이병헌이 말하되 청향당 및 송당공은 즉 병헌의 선조요 자손이 함양에 이사하고 오직 죽각공의 자손이 배산에 대대로 거주하니 일을 발기함은 죽각공 자손의 주선이 많으니 삼현 가운데 만일 이현을 드러서 입향하려면 비선조 이위 중에 마땅히 한위를 멈춤이 가합니다. 또 병헌은 비록 입향하는 선조가 없어도 처음부터 마음에 부족함이 없고 오직 한 가지 교조를 높이는 대의만 아나이다. 비서장이 말하되 만일 퇴계와 남명과 청향당은 연향하고 죽각은 중향함이 가할가 이병헌이 말하되 이같이 하면 정례에 타당 하오며 삼선생의 연향 절차와 위패 서식은 중국 전례에 의거한 것이오니 억량컨대 패면에 어떻게 쓰오릿가. 비서장이 말하되 이것은 귀국의 전례와 귀국사람이 의논하여 결정함이 가합니다. 이변헌이 말하되 동방이 자고로 전제주의가 습관이 되어 일체 유림가가 독수하는 의논이 모두 말하되 문모와 사우가 조정의 명령한바 아니면 가히 창설하지 못하고 가히 근봉하지 못한다 하여 그 종종 그릇된 의논이 많아 예상하지 못함이 있압거든 하물며 궐리는 유교의 발원한 땅과 수선의 지역이 되니 그 높이고 믿는 바가 옛날의 조정 명령에 떨어지지 않으니 목걸 하옵건대 참작하여 진행하옵게 하소서. 비서장이 말하되 이것은 동방 문모전고 및 유림계의 역사를 참고하여 그 정논을 얻은 뒤에 발표함이 가하다 했다.

이십 오일에 이르러 비서장이 청의 협의를 열고 말하되 한국 역사에 의거한 즉 정정암과 이퇴계와 이율곡이 동방 유림의 종통이 되되 의자들이 오직 퇴계가 제일 성대하여 동한 사천년의 진유가 되며 비록 동영의 선배도 또한 퇴계 학파가 있어서 민중의 考亭에 비유하되 다만 그 해외에서 출생한지라 세상이 그 풍성을 듣지 못한바가 있다. 그러나 중동의 후학자들은 마땅히 주자와 같이 높이는 것이 옳은 것이다. 패면에 先賢退陶李子라고 쓰는 것이 예전에 합당하고 남명은 본래 동방에 陞廡한 현인이 아니요 또 비록 陞廡의 예에 있드라도 패면에 현과 자를 똑같이 호칭하는 것이 의심컨대 불가하니 혹시 先儒先正이라 칭호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이병헌이 말하되 업드려 생각하옵건데 대론이 이미 발했으니 고처 의논키 어려우나 그러나 폐방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함이 있습니다. 대개 승무는 당론이 생긴 이후로 실학이있어도 후원이 없는자는 일례로 명령을 얻지 못하였아오니 남명의 어짊을 이것으로써 경중을 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남명의 학문이 지극히 正大하고 지극히 고명하여 일찍 神明舍銘을 지어서 곳 마음을 가르쳐 太一天君이 주장하여 거침을 삼은 것은 가히 천고 心學家의 법률이 되고 항상 선사를 사모하여 조석으로 위에 첨배하였으니 추백년전에 있어 혼자 공자와 안자를 높일줄을 아는 큰 뜻은 중주의 한나라 송나라 이래로 많이 보지 못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일방의 유림이 많이 남명을 우하고 퇴계를 좌 하여 남명을 선두에 거하고져하니 금일에 누리고 떨침이 너무나 다르면 역중 사림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비서장이 말하되 先正南冥曺子라고 쓰는 것이 어떠할고. 이병헌이 말하되 이일은 모두 낱낱이 이치에 의거하여 진술한 즉 결단코 밝지 못한 폐단이 없으니 先賢南冥曺子라고 같이 호칭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비서장이 허락하고 또 묻되 조문에 이현은 청향당 이선생 죽각 이공으로 쓰는 것이 어떠할고. 이병헌이 말하되 어찌 감히 명령을 쫓지 아니하리요. 드디어 도동사 치제 축문을 지으니 여좌하다.


附  道東祠致祭文

    維

孔子降生二千四百七十四年歲次癸亥    月朔     日 後學敢致祭於

先賢退陶李子

先賢南冥曺子

先儒淸香堂李先生神位前曰伏以洙泗旣東注干隴海瞻彼培山留闕精彩三庚四同百世罔替謹以竹閣李公從享 尙饗

                               衍聖公府秘書廳撰


부 도동사치제문

  유

공자 강생 이천사백칠십사년 세차 계해 월삭  일 후학 감 치제어

선현퇴도이자

선현남명조자

선유청향당이선생 신위 전왈 복이 수사기동 주우농해 첨피 배산 유궐정채 삼경사동 백세망체 근이 죽각이공 종향상

                          연성공비서청 찬


   축문해석

복이 수사가 이미 동방으로 흘러옴에 농운과 산해에 이르도다. 저 배산을 바라봄에 그 정채가 머무렀도다. 삼경과 사동이 백세토록 쇄함이 없도다. 삼가 죽각 이선생으로써 배향 상향합니다.


   第三項

秘書廳批曰培山儒會發起之精神主旨皆在此項至若闡明

至聖先師之微言大義遡求今古文眞僞之別助長東西洋文化之運非特

東方之欲求同情於我中國之亦願求同情於東方者也凡中東之尊

孔敎者宜各勉旃

                 衍聖公府秘書廳長陳允琅


제삼항

비서청이 비삽하되 배산유회가 발기한 정신과 주지가 모두 차항에 있고

지성선사의 미언대의를 천명하는 것은 금고문 진위를 구별 연구하는 것이 도서양 문화의 운수를 도우는 것이니 한갓 동방이 우리 중국에 동정을 구하고져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중국도 또한 동방에 동정을 구함을 원하노니 무릇 중동의 공교를 높이는 자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연성공부 비서청장 진윤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