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闕里衍聖公書

燕庭上公 鑑忠鎬生長東韓受岡極之恩於我 先聖夫子而某區區懸仰之情則亦有別焉窃伏念我先祖文純公講道東溟仰沐洙泗之波雖東瀛先輩比諸閩中之考亭則閣下想亦因滬上各書局可考東韓文化史矣(此一種叅巧書則己備置矣當托南海康公送致于聖公府)近因域內珍城郡多士慨儒敎之不振憂世道之益漓謀虔俎豆之奉而先設書堂于郡之培山欲以先祖庚友曺南冥李淸香堂幷享焉乃惄如而歡曰彼耶佛之徒立敎堂必尊敎祖與其傳奉域內之先賢盍若崇奉我大聖祖使吾輩慕聖衛道之心遠勝於二氏之徒乎遂拓土於其上欲立文廟以享先聖先師兩位顧東方有木牌而無眞像伏乞閣下諗此苦衷特命盡工模出端木子所刻行敎像或尼邱山預頂本使兩李君奉而東還則實海外千載之幸而可聳動儒門之觀聽矣伏惟閣下之留意焉餘敬祝燕庭上公道安

庚申      月      日              李忠鎬

궐리 연성공에게 주는 편지

연정 상공은 조감하옵소서 충호가 동한에 생장하여 우리 선성 부자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자오니 구구하게 현앙하는 정이 또한 별다릅니다. 복렴 아 선조 문순공이 동명에 도를 강논하여 우럴어 수사의 물결에 목욕하니 비록 동영의 선배라도 민중의 고정에게 비교한 즉 각하가 또한 호상1)의 각 서국(書局)으로 인하여 동한의 문화사를 참고했을 것입니다.(아 한가지 참고서는 이미 비치하였아오니 마땅이 남해 강공에게 부탁하여 성공부에 보내리다) 근일 역내 진성군 다사들이 유교가 부진함을 개탄하고 세도가 더욱 혼탁한 것을 근심하여 조두의 맏음을 모의하되 먼저 배산에 서당을 건립하여 선조 경우(庚友) 조 남명 이 청향당으로써 병향코저 하기로 이에 다소 마음이 놓이나 역역이 탄식하되 저 아소와 부처의 무리로 교당을 세우면 반드시 교조(敎祖)를 높이는데 역내의 선현을 존봉하면서 어찌 우리 대성조(大 聖祖)를 숭봉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성인을 사모하고 도를 모시는 마음이 머리 이씨(二氏)2)의 무리를 이겨야 하지 않으리오 드디어 그우에 땅을 개척하여 문모를 세워서 선성과 선사 양위를 봉향코저하되 동방에는 목패(木牌)만 있고 진상(眞像)이 없아오니 복걸 각하는 이같은 고충을 알아 헤아리어 특별이 화공을 명령하여 단목자의 각한바 행교상을 그리거나 혹시 이구산 우정본을 그려서 두 이군으로 하여금 바들고 종방에 돌아오게하여 주시면 실로 바다밖에 천재의 다행이고 가히 유문의 보고 드름이 용동할 것이니 복유 각하는 유의하소서 여는 연정 상공 도안을 경축합니다.

경신    월    일  이충호

 

1)호상(滬上)은 중국 상해(上海)의 별명임
2)이씨(二氏)는 야소와 부처(耶佛)를 말함

 

 

闕里答簡

李十吾軒先生台啓

曲阜衍聖公府秘書處拜干

敬啓者本月十二日李君眞菴偕其价弟不辭跋涉辱臨敝邸並收到來函乙件當波招待員孔慶錩陪謁 朝庭繼由該員報告來意端爲迎請 聖象足徵尊崇聖敎深佩惟敝邸世守供奉祗有大成殿塑 償蔵本所有行世者卽爲唐吳道子石刻行敎 像及後世摹刻之像除此二像敬交李君奉回然我儕讀書尊聖敎要在誠心重質非重文不在形跡上講求也先生達人必不以此言爲不經耳又讀陶山書院通硯山道通祠辨文而尊敎之道漢太史冊列爲世家未聞有年譜之稱自應以太史公爲則至理學家自漢迄今相繼多輩孔族未聞先師以外傳之于鮮鮮安子不過儒家一脈何能與 孔子幷列良謬 先生旣尊敎意誠尙望隨時指正勿視爲異途此不過伊等一時失察其尊  聖心篤亦可嘉也和衷共儕扶持我道渡此厄運則幸甚此頌十吾軒先生有道

                    七十七代衍聖公孔德成 頓首  十六日

 

   궐리 답간

이 십오헌 선생 태계

   곡부 연성공부 비서처 배간(拜干)1)

경계자는 본월 십이일에 이군 진암(眞菴)과 그 개죄가 발섭을 사양치 않고 폐저에 욕되게 오시고 아울러 도래한 편지 을건을 거두었으니 마땅히 초대원 공경청(孔慶錩)을 파견하여 모시고 사당을 배알하고 계속해서 해원이 찾아온 뜻이 성상(聖像)을 영청함을 보고하니 성교를 존숭함을 족히 증거 하겠으며 깊이 감사합니다. 오직 폐저가 대대로 지키고 공봉 하는 것은 다만 대성전 소상(塑像)이요 장본 소유로 세상에 행하는 것은 곳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石刻 행교장과 및 후세에 모각한 상(像)이요 이것을 제하고는 특별히 유상이 없으니 만일 모상을 하려면 심히 어렵고 또 전기 사진기로서 사진을 박으려면 집이 크고 깊어서 손을 쓸 수 없어서 부득이 이 두 유상을 모해서 공경이 이군에게 주어서 받들어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우리 무리가 글을 읽어 성교를 높이는 것이 성심(誠心)에 있는 것이지 바탕이 소중하고 문제가 소중한 것은 아니니 얼굴과 자취 위에서 강구할 것이 아닙니다. 선생은 활달한 사람이라 반드시 이 말로써 들어보지 아니한 말이라도 아니할 것입니다. 또 도산서원 통문과 연산 도통사 변문을 읽으니 존교의 뜻이 다시 전일합니다. 사당의 명칭은 역대가 모두 문묘(文廟)라고 전했으니 만일 이것으로써 사당리라고 말하면 좁고 적어서 크게 존교의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한나라 태사공이 사기를 저작하여 일렬로 世家를 만들고 年譜의 칭호가 있음을 듣지 못했으니 자연히 태사공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하고 이학가들도 한나라로부터 지금까지 서로 계속 한분이 많고 孔族은 先師의 이외는 조선에 전한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安子는 유가의 일맥에 불과하니 어찌 능히 孔子로 더불어 열향하리요. 진실로 선생이 성교를 높이는 뜻과 정성에 어긋났으니 수시로 指正 하고 별다르게 보지 마소서. 이것은 저들이 한때에 살핌을 실수한데 불과하니 그 尊聖하는 마음이 독실한 것은 또한 가상합니다. 마음을 합하여 한가지 rUd제하여 吾道를 붙들어서 이 액운을 지내면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이에 십오헌 선생의 유도를 칭송합니다.
1)拜干은 拜手의 오기인듯 하다.
칠십 칠대 연성공 공덕성 존수 심육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