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孫致溪上李氏書

夙仰聲塵恒切御李之願而但恨山川脩敻不得以時奉接每中夜撫枕惄如而不定情者久矣迺者回鄙近士友合議以爲江右無退陶夫子之祠廟者實吾林之恥慨然欲從事於俎豆之奉而難其地竊伏念朱夫子之祠院遍於中州隨其足跡之所及咳唾之所遺而爲妥靈之所往往以其鄕之先輩門人配焉若泰亨書院之祀高東溪陳北溪汀州府祠之亨郡人楊方槩可知矣惟玆培山一區卽鄙先祖淸香堂及松堂竹閣三先生生長之地而先夫子精彩所留之處也當日切偲親灸之實油然可想而莊誦先夫子記我曾遊地聞君獨臥時之句則雖百世而難諼矣故僉議以爲卽先夫子舊遊地而行釋菜之禮以鄙先祖配食允合禮典生等於此特有所感而敢陳鄙見昔朱先生與諸生膝璘輩遊朱塘(在목源縣東)其後膝之子鉦創祠先生以其父(璘溪齊)叔(蒙齊珙)配之卽徽州府祠也朱先生嘗避僞學之禁至龍峯有劉先生伯仲曰砥曰礪者○師事之至前明時邑令蔣某立祠祀考亭而以二劉선生配之其後邑令萬某孝兼袁文紹諸生劉自源輩踵以修葺卽福州府祠也生等雖無狀願附膝和叔(鉦)劉自源賢賢親親之義謹趨士林之下風奉以周旋伏惟僉君子細察而指揮之
又有一事可陳者當時江右先正惟南冥先生敬義之學壁立之節可砥礪一世而與先夫子託爲百年神交又與鄙先祖倂爲三庚道義之交此事實已傳於中州而闕里故孔太史小霑先生賀九思齋重建詩曰三庚儒望紀朱明云則行釋菜之禮而倂擧冥翁恐合事情此近儒論亦可歸一矣先夫子首冥翁次之鄙先祖又次則實吾嶺大同普合之善擧也伏乞詳燭而俯敎之焉  
   戊午 八月 二十八日
   李晩華  李綄柱  李尙敦  李尙鎬  李炳元  李昌主  李炳瑢  李炳淳  李順華  李泰柱    李炳洪 等

본손이 계상 이씨에게 보낸 편지

  일찍 성명을 앙보하고 항상 이리(御李)1)의 소원이 간절하되 다만 산천이 멀고 멀어서 때로써 봉접하지 못합이 한탄되어 매양 밤중에 벼개를 만지고 주린 듯 정을 정하지 못한지가 오래되었압더니 근일에 비근 사우들이 합의하고 강우에 퇴도 부자의 상당히 없는 것이 실로 오리들의 수치라하여 개연이 조두를 받드는데 종사코져하되 그 땅이 어러운지라 복념 주부자의 사당이 중국에 두루 그 발자취의 미친바와 글춤의 지친바를 따라서 타령소(妥靈所)를 삼고 왕왕히 그 고을의 선배와 문인으로써 배향하니 태형서원에 고동계와 진북계를 제사함과 정주부사의 군인 양방개를 배향하는 것을 가히 알 것입니다.
  이 배산 일구는 즉 비선조 청향당과 송당 및 죽각 삼선생의 생장하신 곳이요 선부자 정채가 머문 곳이라 당일에 절시(切偲)
2)하고 친구(親灸)3)하신 실상을 유연히 생각하겠아오며 선부자자가 기아 증유지하니 문군 독와시라는 글귀를 장송하면 비록 백세라도 잊기가 어려운고로 여러분의 의논이 선부자가 예전에 노시던 땅에 나아가서 석채(釋菜)5)의 향례를 행하고 비선조로써 배향하는 것이 진실로 예전에 합당하다하오니 비 등이 이에 특별한 소감이 있어서 감히 비루한 소견을 지달합니다. 예전에 주선생이 제생 등린의 무리와 더부러 주당(朱塘)에 놀았더니 그후에 등린의 아들 정이 사당을 창설하여 선생을 향사하고 그 부친 계재 린과 숙부 몽재 홍을 배향하니 즉 휘주부 사당이요 주선생이 일찍 위학의 금령을 피하여 용봉에 이르니 유선생의 형제 지(砥)와 여(礪)가 있어 스승으로 섬겼더니 명나라때에 와서 읍령 장모가 사당을 세우고 고정(考亭)을 향사하고 두 유선생으로써 배향하더니 그후에 읍령 만모와 효렴4) 원문소와 제생 유자원 무리가 연이어 중수하니 즉 복주부 사당입니다. 생등이 비록 모양이 없어오나 원컨대 등화숙 정(鉦)과 유자원의 현현과 친친하는 대의에 부쳐서 삼가 사림의 하풍을 받드러 주선코저 하오니 복유컨대 첨굼자는 자세히 살펴 지휘하옵소서

1)어리(御李)는 통감 칠권 후한 시대에 李膺이 사림의 귀수가 되어 이응의 수리를 몰고가는 사람이 그것을 크게 영화로였기로 후세에 높은 사람을 모신 것을 어리라함
2)절시(切偲)는 힘쓰는 것이니 친구간에 쓰는 문자임
3)친구(親灸)는 선생에게 친히 학문을 배우는 것을 말함
4)효렵(孝廉)은 한나라때 선비를 들어 쓰는 이름인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재물에 청렴한 선비를 지방 장관이 나라에 쓰는 이름인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재물에 청렴한 선비를 지방 장관이 나라에 천거하여 관리로 채용하는 것이니 부모에게 효도하면 인군에게 충성할 수 있고 재물에 청렴하면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법임
5)석채(釋菜)는 선생에게 나물 안주로서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이름임

  또 한가지 진정할 일이 있으니 당시에 강우 선정에 오직 남명선생 경의의 학문과 벽립한 절개가 한 세상을 가다듬어서 선부자와 더불어 백년의 신교(神交)1)가 되었고 또 비선조와 더불어 같이 삼경 도의지교가 되었으니 이 사실이 이미 중국에 전달되었으며 고로 궐리에 공태사 소첨 선생이 구사재 중건을 축하하는 시에 삼경 유망기주명이라 하였으니 남명 옹을 같이 모셔 서채례를 행하는 것이 사정에 합당하고 이것이 유림의 일치도;ㄴ 의논이오니 선부자를 수위에 모시고 남명옹을 다음 모시고 비선조를 또 다음에 모시면 살상으로 우리 영남의 대동보함의 착한 일립니다. 복걸 하건데 자세히 살펴서 굽어 가르치소서.
무오년 팔월 이십팔일

1)신교(神交)는 직접 보지 않고 정신으로 친한 친구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