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先生贈淸香堂先生詩(十首錄三)

贈李君浩

四同元不在新知擬我曾於鐘子期七字五言金直萬傍人看作一篇詩

  按四同者同年同道同心同德之謂也退陶詩中三人初度有誰知一絶
  盖和先生此詩故其題語中南冥一絶甲子六月初旬手東中南冥一絶
  之云其直指此詩無疑三先生相與之情益可見矣  

琴韻(淸香堂八詠之一下同)

三聖幽徽在一琴寂然收處是眞音慚君勉我娥洋韻薄劣如何會得吟

經傳

廣文頗似子雲家稽古由來得力多浩法會須堂下劉五車書在一無邪 中宗大王二十三年(嘉靖七年)戊子四月初七日松堂李先生(光坤)生于培山里第據南冥先生師友錄則公名光坤字厚仲厚號松堂淸香堂子也逮其父時己自成人出入於先生之門好善嫉惡出於天性丁憂盧墓三年與寒岡守愚覺齋諸賢情分深厚又據家傳文字則嘗以親命登退陶先生之門云 宣廟壬辰之際先生入關北定平回阻亂流寓見北俗貿甚諭之以學敎之以禮幾乎移風至 肅廟時士林建院于定平鼻白山下以俎豆之年前回邦禁見撤云

  趙月皐性家曰余自小得聞淸香堂之爲退溪南冥四同之友而退溪詩之淸香堂裏舊知人物天   池尙臥濱南冥詩之廣文頗似子雲家稽古由來得力多尙誦之而不忘矣至於松堂之爲退冥兩門   門人而克勤淸香之播且其關北之蹟始聞於李君之所誦老而見識之如是愧孰甚焉聞善而   昔人所譏謹次所示之韻竊寓存先兩先生高山景行之思爾(所示之韻卽松堂本孫某精舍韻也)

中宗大王二十四年(嘉靖八年)己丑二月十三日竹閣李先生(光友)生于培山里第據國朝人物志及東儒師友錄則公字和甫號竹閣陜川人淸香堂(源)從子早遊南冥曺先生門對中庸章句極詳盡無遺先生喜曰不圖汝之曉解如此安貧樂道不爲物欲所累時在要路者欲授官力辭不赴與崔永慶鄭逑河沆爲道義交戊子中風痺時鄭公守咸安劑送藥餌賴以得 明廟十八年癸亥先生之門回往遊淸凉山有詩一絶

明廟丙寅正月又以淸香堂先生往拜退溪先生質問理氣之論有陶山拜門錄一通
退溪先生歿先生爲位慟哭曰斯文喪矣遂爲制服心喪以詩挽之入于兵
惟存學貫天人際一句然意已盡矣
南冥先生歿先生與諸門徒相向而哭失聲而後退共遵遺命以儀禮治喪遂爲心喪三年以詩哭之曰父師三甲契退老及先生道學千年士文章百世英山河收正氣宇宙高名治任將歸路難窮小子情

   남명선생이 청향당선생을 주신 시 십수에 삼수를 기록함

증 이군호(李君浩)

   사동이 본래부터 초면에 부재하나

   내가 일직 만나보고 종자기1)에 견주었네

   칠언시와 어언시는 가치가 만금인데

   곁에 사람 모르고서 일편시만 지여보네

안찰컨대 사동(四同)은 나이 같고 도가 같고 마음이 같고 덕이 같은 것이다.  퇴도2)시중에 삼인초도수지(三人初度誰知) 한수가 대개 선생의 이 시를 화답한 고로 그 글자와 말 가운데 남명 인절과 갑자 유월 초순 수간중 남명 일절이 곧 이 시를 가르친 것이 의심이 없으니 삼선생(三先生)의 상여하는 정을 더욱 가히 알겠음

1)鐘子期는 晉나라 사람으로 거문고 곡조를 잘 알아 들음으로 거문고를 잘 타는 兪伯牙와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음악가와 그 음악을 감상할 줄 아는 우정으로 知音이라 하여 깊은 우정을 의미한다.
2)退陶는 퇴계가 도산에 거처했음을 의미하여 퇴계선생을 지칭하는 의미다.

금운(청향당 팔영의 하나이니 아래와 같음)

  삼성1)의 깊은소리 한 거문고 닮았으니

  적연이 걷는 곳에 이것이 참소리네

  부끄럽다 그대나를 아약곡2)을 힘쓰니

  천박한 지식으로 어이하여 읊으리오

1)삼성(三聖)은 복희(伏羲)와 순(舜)임금과 문왕 무왕(文王 武王)을 말함 듯 함
2)진나라대부 유백아가 마음을 산에 두고 거문고를 타니 종자기가 아아호지재고산(峨峨乎志在高山)이라하고 물을 두고 타면 양양호지재유수(洋洋乎志在流水)라 하였음으로 검곡을 아양곡이라 호칭함

경전

  광문1)의 공부함이 자운2)짐과 같았으니

  예전을 삼고하여 앋은 힘이 많았도다

  활법을 마침내는 당하 촉륜3) 기다리니

  다섯수례4) 서책들이 한 무사5)에 있는거네

1)광문(廣文)은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廣文者傳'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 거지두목
2)자운(子運)은 양웅(楊雄)의 자로 중국 전한의 유학자이다.
3)촉륜(劚輪) 대목이 수레바퀴를 쫏는 것이니 예전에 제환공(齊桓公)이 당상에서 글을 읽으니 대목이 당하에서 촉륜을 하다가 도기를 놓고 말하기를 공의 읽는 글은 모두 고인들 조박(糟粕)이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니 즉 공부를 껍데기만 한단말임
4)오거(五車)는 장자에서 나온 말인데 그때의 천하의 글이 많아서 실으면 다섯수례가 된다는 말임
5)무사(無邪)는 논어에서 나온 사무사(邪無邪)를 의미한 문자로 사람의 생각이 비뚫어짐이 없고 발라야 한다는 말임

중종대왕(中宗大王) 이십삼년(嘉靖七年戊子)사월 초 칠일에 송당(松堂) 이선생 광곤(光坤)이 배산에서 출생하시니 남명선생 사우록(師友錄)에 의거하면 공의 이름은 광곤이요 자는 후중이요 호는 송당이며 청향당의 아드님이니 부친이 살아 계실떼에 벌써 성인이 되어서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다. 친상을 당하여 삼년을 시모살고 한강(寒岡)과 수우(守愚)와 각재(覺齋)의 제현으로 더부러 정분이 심후했고 또 집에서 전한 문자에 의거하면 일찍 어버이 명령으로 퇴도선생의 문하에 올랐다고 한다.

선묘(宣廟) 임진의 때에 선생이 관북 정평(定平)에 들어갔다가 난리에 막혀 유리하며 거주할새 북방 풍속이 무식하기 짝이 없음을 보고 학문으로 개유하고 예법으로 가르쳐서 거의 풍속을 고쳤드니 숙묘(肅廟)때에 이르러 사림(士林)들이 정평 비배산 아래서 서원을 세우고 향례를 드렸으나 연전에 방금(邦禁)으로 훼철을 당했다고한다.
조월고 성가(性家)의 말에 내가 어려서부터 청향당이 퇴계와 남명과 사동의 벗이 도어서 퇴계의 시 청향당리 구지인 괴물천지 상와빈과 남명의 시 광문파사자운가 기고유래 득력다라는 것을 듣고 지금까지 외워서 잊지 아니했고 송당이 퇴계와 남명의 두 문인이 되어 능히 부지런 하엿고 청향당이 전파하고 도 그 관북의 사적같은 것은 이군의 말을 비로소 들으니 늙어서 견식이 얕아서 이와 같으니 부끄러움이 심하도다. 착한 일을 듣고 말하지 아니함은 옛 사람의 기룡함이라 삼가 보여주는 운을 차운하여 가마니 조선조 두 선생의 높은 산
1)과 큰길의 생각을 부침니다.(보여준 운은 즉 송당 본손 아모의 정사(精舍)의 운이다.)

1)고산(高山)과 경행(景行)은 시전에서 나온 고산앙지(高山仰止)하며 경향행지(景行行之)라는 시구(詩句)인데 대현(大賢)의 도학과 덕행을 추앙하고 따라간다는 말임

중종대왕 이십 사년(嘉靖八年 己丑)이월 십삼일 죽각 이선생 광우가 배산에서 출생하였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및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의거하면 공의 자는 화보요 유학하여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대하여 지극히 상시하고 다하시니 선생이 기뻐하여 말씀하되 뜻밖에 너의 해석이 이 같으니 가난을 편안히 생각하고 도의를 즐겨하여 물욕에 더러움이 되지마라 하였다. 이때에 요로(要路)에 있는 자가 벼슬을 주고저하되 힘써 물리치고 최영경(崔永慶)과 정구(鄭逑)와 하항(河沆)으로 더부러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무자년에 중풍에 고생할새 함안을 수임한 정공이 약제를 보내여 병이 나아졌다.

명묘(明廟)십팔년 계해에 선생이 삼십오세로 백부 청향당 선생을 모시고 도산에 가서 절을 드리고 퇴계 이선생의 문하에 배움을 청하였으며 인해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놀고 시 한수를 지었고
명묘 병인년 정월에 또 청향당의 명령으로써 퇴계선생을 가서 배알하고 이기(理氣)
1) 지론을 물었으니 도산배문록(陶山拜門錄)한통이 있다.

1)이기론(理氣論)은 심성이기논이니 성리학(性理學)의 원칙논을 말함

퇴계 선생이 별세하니 선생이 여위를 만들고 통곡하되 사문(斯文)이 상실되었다 하고 북제를 마들어 심상(心喪)1)을 입고 시를 지어 만장하였더니 병화에 타고 오직 학관천인제(學貫天人際)라는 즉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통달했다는 일구만 남겼다. 그러나 뜻은 이미 다하였다.

1)심상(心喪)은 스승님의 복을 말한 것인데 여기에 부모상은 참최 삼년이요 인군의 상은 방상 삼년이요 스승의 상은 심상 삼년이라함

남명선생이 별세함에 선생이 여러 문도로 더부러 상향곡(相向哭)을 하여 목소리가 쉰뒤에 물러나와 함께 유명을 좇차 의례(儀禮)을 다하여 상사를 다스리고 드디어 심상 삼년을 입으시되 시를지어 통곡하니

   아버지와 스승님의 셋동갑 계회는

   되계와 및 선생님이시다

   도학은 천년의 선비요

   문장은 백세에 정영 아름답다

   산과 하수는 정기를 거두었으되

   우주에는 오히려 높은 이름이 남아있다

   짐을 묶어서 도라가는 길에

   소자의 정을 다할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