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2018) 시향 소고

  따뜻한 제물(떡, 밥, 생선, 수육 등)이 도착하자 집을 나섰다. 자동차가 육중하게 느껴졌다. 나동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넣고 나오자 짙은 안개비가 내린다. 아내가 부산 사람들을 걱정을 하며 전화를 하더니 금년은 참석을 못한단다. 작년에 대왕문어 두 마리를 젯상에 올려준 종열 사촌인 종윤부부다. 봉안당에 10시쯤 도착했다.

 제물을 내릴때 고전형수와 명열이가 왔다. 그 뒤 원덕이가 오고, 세 번째 총무 종수부부가 왔다. 아내가 나를 처다보며 미소 짓는다. 더 올 사람이 없다는 이심을 전하는 것 같다. 청소를 하고 젯상을 차릴무렵 종인과 그 사촌 종시 종수 부부가 정찰병처럼 나타났다. 부인들은 금년을 마감하는 일이라며 제례준비를 즐겁게 한다.

  제물이 상당히 고급품이라며 좋아했다. 금년은 부인들도 윗대 선조에게 잔을 올렸다. 이들의 진지한 모습에 건강하기를 빌었다. 향제가 끝난 식사 시간은 총회로 바뀐다. 그러나 의제는 재쳐놓고 음해와 성토로 돌입한다. 아내는 화를 참으라 권유했으나 종인의 사악한 선동에 화를 참지 못했다.

   총무가 지난 해의 결산 내용을 서면으로 보여달라 한다. 봉안당 준공(2004년)이래 결산 내용을 알려주었다. 전 총무가 종중돈을 다 써버린 후부터 성묘일에 감사가 보고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감사(종인)가 한번도 오지 않아 홈페이지에 공고하기로 했다고 말해주었다.

  금년 성묘일에 예결산서류를 만들어 왔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금년은 연락병처럼 원덕이 혼자 와서 아무도 안 올 것이란 말을 하고 돌아가며 소문중 위토조성 경위를 알려달라 하였다. 금년은 세 번이나 이사회를 소집했으나, 이사와 총무, 감사도 참석하지 않았다.

  소문중의 위토조성 경위서를 총회원에게 우송하기로 한다. 간명한 기록을 위해 모든 경어와 존칭은 생략한다.

  하동읍 원동의 33세 백만(병철)은 광복전후(내가 중학교 졸업때까지) 한문서당 훈장을 하면서 종중재산을 총괄하였다. 1983년 내가 진주 전입한 그해부터 병자(병철, 병태, 병윤, 병길)와 정규, 채규, 영규, 종희, 종태, 종엽 등 원로가 종중정관을 제정하고 사단등록을 후 종중재산(신탁관리재산과 소문중관리재산)을 종중이 직접 통합관리하기로 결의하였다.

 실행방법으로 봉안당을 건설하여 서부경남과 광양에 산재한 조상영령을 이 곳에 모셔 재원의 낭비를 줄이고 증식된 재원으로 경로, 장학금으로 분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주무를 정규와 집행 감사를 진원에게 위임하였다.

  산청의 배산서원은 우리 문중을 성천파로 불렀고, 본향에 살던 상자와 병자는 대부분 동학농민으로 살았다. 추원재는 동학운동 아지트로 쓰기 위함이었다. 광복후 추원재 건립후 남은 자금이 문중의 재원이었다.

  해방이 되자 우리 가문에 일본의 귀환동포와[개명창씨; 기무라(木村 : 합천이씨 편입자란 낭설도 있다)과 본향의 일가[개명창씨; 요시가와(慶川 : 경주이씨의 후손인 합천이씨)]가 상당기간 구분되었고, 생활 습성도 이질적인 모습으로 지냈다.

  종중은 생계가 어려운 귀환동포 일가에게 종중재산 관리를 맡겨 도와주기로 정하였다. 당시의 종중 선산은 산청(단성,묵실), 진주(대평), 횡천(남산, 애치), 양보(구정, 장암), 고전(성천, 전도, 배들이), 적량(삼화, 공월치), 광양(진월, 다압) 등지였다.
 위토는 횡천(남산), 산청(단성), 횡천(남산), 적량(삼화), 고전(성천) 등지에 있었다.
 금융재산은 금4천여만원이었는데 34세 남조가 맡았고, 선산은 주거지역 일가가 맡았다. 고전과 양보는 형제끼리 다투는 일도 있었다.

  곧이어 6.25동란이 일어났고, 혼란 중 남조, 삼조, 학조 등 형제들이 현금을 유용하고 변제하지 못하자, 부산 재규가 중재하여 턱없이 부족한 남조, 삼조 형제의 집과 텃밭을 종중에 모두 헌납케하였고, 부족분을 채운다며 하동읍에서 숙박업을 하던 순덕이 오빠 남조의 빚으로 두마지기 논을 위토헌납하였다. 당시 학조는 생활이 어려워 가족이 추원재에서 살고있어 변상할 형편이 못되었다.

   시향은 다섯 가문이 돌아가며 차례를 모시기로 하였다.
   종손 가문은 종희가 두마지기 밭을 헌납하고 종중명의로 등기하고도 정관시행후 소유권을 주장하던 중 작고했다.
   종엽이도 순덕이가 헌납한 위토 매입을 거절하던 중 작고했다. 현재 원덕이가 매입을 거절하고 있는 위토다.
   구정 종수가 관리하는 위토 1마지기는 오진 가문의 병자형제계금으로 장만한 것이다.    상은명의 위토 2마지기는 광양여관을 하던 병민부부가 헌납한 것이다.
   정관시행후 구정의 의문은 정규의 지급명령을 거절하며 반항 하던 중 별세했다. 의문의 셋째 도석은 형제계금2천여만원을 종중에 헌납하지 않으려고 시향에 오지 않던 중 요절하였다.

   병길과 병태는 정규가 납골당 준공을 위해 위토를 팔지 못하게 공동명의 이전 직후 별세했다. 병윤도 이를 묵인하다 별세했다. 동규가 관리하고 있는 위토 7마지기 중 1마지기와 소문중 제각 집터는 병태가 헌납한 것이고, 논 6마지기는 정규의 토지를 종중(회장 병대)이 구입한 것이다.

  종중재산에 탐욕을 부리던 사람 모두가 그때 사망, 요절하였다. 그 자식들이 지금도 탐욕을 부리며 동란직후처럼 종중을 파산지경으로 몰아가려 한다.
 종윤은 총무때 제아비(차백)명의의 선산을 빼돌려 등기이전했다. 산청 하규는 종록이가 종중 값보다 더 많은 돈을 납골당 공사에 충당했고, 진주 영규명의 선산은 종진이가 동의하여 종중명의로 이전되었다.

  적량공월티 선산은 35세 종아(노아)가 매입했고, 남산은 관리자가, 고전위토와 선산도 관리자가 인수해 <제향귀진>이 준공되었으나, 주차장등 환경 준공검사가 되지 않았다. 농지복원기한을 지키기 위해 오두재를 관리자(정학래)에게 헐값 매각하여 주차장 준공검사는 마쳤으나, 조경이 완성되지 않아 분양에 어려움을 겪고있다.

  2000년 종중정관 시행후 지번이 확인된 선산은 종중명의로 이전을 하였다. 그러나 가장큰 재원인 농지(위토)는 등기를 할 수 없어 신탁자가 인수하거나 매각해야 한다. 그러나 종윤이가 선산을 탐하여 사악한 선동으로 선한 일가들이 시향에 참가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있다.

  종중정관시행을 합의하러 삼천포 대창물산을 처음방문했을 때 학조는 숨김없이 말했다. 종중돈으로 산 삼천포 갯펄에 새부두가 들어서면서 그땅이 일부 들어간 보상금으로 건어물 공장(대창물산)을 남은 땅위에 세웠다며 빌린 종중돈의 열배 백배를 갚을 것이라 했었다. 전처 아들 종철이와 지금의 애들에게 상속이 끝나면 종중 빚을 정리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종철이 요절하고, 신음 하던 학조가 뒤이어 작고 했다.

   종중의 목표는 종중재산을 정리하여 투명하게 투자하여 증식된 재원을 매년 시향날 총회원의 헌납과 공헌의 비율에 따라 정직한 분배를 받는 실질적 음복을 내리는 정언공중중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2018. 11. 30.

     합천이씨정언공파종중대표

     회장 강양군34세손 진 원 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