陜川李氏 始祖淵源


   합천이씨의 비조(鼻祖)는 표암공(瓢巖公) 휘(諱) 알평(謁平)이시다. 기원전 50년대 진한(辰韓)의 땅 표암봉하(瓢巖峰下:지금의 경주지방)에서 탄강(誕降)하시었다.

당시 진한에는 육촌이 있었고 촌에는 각각 촌장이 있었다. 그 중에서 표암공은 알천양산촌(謁川楊山村)의 촌장으로서 6촌장 중 가장 수장(首長)으로 BC 57년 13세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개국함으로써 신라 건국의 주역이며 공신으로 대인(大人)이시다. 신라 건국 후 서기32년(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씨족촌인 위 6촌의 이름을 고치면서 각각 성(姓)을 하사하였는데 이때 양산촌을 급양부로 하고 표암공에게 이씨 성(李氏 姓)을 하사하였다. 그 뒤 2천여년을 처쳐 오는 동안 여기에서 경주(慶州), 합천(陜川), 재령(載寧), 원주(原州), 아산(牙山), 가평(加平), 평창(平昌), 흥양(興陽), 차성(車城), 우계(羽溪), 우봉(牛峰) 이씨 등 11개 관향으로 나누어져 내려오고 있다.


합천이씨 시조는 강양군(江陽君) 휘(諱) 개(開)이시다. 강양군은 신라말에 지금의 경주 지역에서 탄생하였으며, 비조 표암공 알평의 39세손이다.

강양군께서는 신라 말 최대의 명 문장가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을 사숙(私淑)하여 높은 학덕(學德)을 쌓으시고 벼슬길에 나가 한림(翰林)에 올랐으며, 마침내 국가의 훈신(勳臣)으로 강양군에 봉군(封君)되었으나 신라 사직이 무너지고 고려가 건국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로 고려왕실에 불복하니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직(降職)되셨다.

얼마후 또 조정에서 이일에 대한 이의(異議)가 있어 장차 화(禍)를 예측할 수가 없게 되자, 당시 18세의 따님이 고신탄원(告身歎願)하여 화를 면하였으니 그 효성은 효(孝)의 표상인 제영(緹榮)에 비견되었다.


그후 강양군은 강양호장(江陽戶長)이 되시어 덕(德)으로 선정(善政)하니 만인으로부터 현인(賢人)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만서정사(晩棲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시다가 고려 경종 3년 4월 처조부(妻祖父)이신 경순왕의 훙서(薨逝)를 당하여 몹시 애통해 하시다가 그 망극지통(罔極之痛)으로 인한 환후로 얼마 후 별세하였다. 강양군의 배위(配位)는 군부인(郡夫人) 경주김씨이니 공부시랑(工部侍郞) 은열(殷說)의 따님이요 경순왕 부(傅)의 손녀이시다.


강양군의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시다. 고려말 사헌부 대간들이 강양군의 청시상계(請諡上啓를 하면서 “신라의 이 개(李 開)는 도학문장(道學文章)이 백세(百世)의 사표(師表)요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천고(千古)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강양군의 학문과 충절은 선현(先賢)들도 숭앙하였고, 일월과 같이 빛났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강양군은 강양(지금의 합천)에 오래 전거(奠居)해 오신 大 賢人으로 관향(貫鄕)을 강양(江陽:陜川)으로하여 합천이씨의 관조(貫祖)가 되신 것이다.


강양군께서 1남 1녀를 두셨고 손자 때인 3세부터 자손이 번연(蕃衍)하였으며, 지금 계하(係下)에는 전객령, 판사, 전서, 병사, 교리, 첨사, 목사, 부사, 대사간, 직제학, 사인, 생원, 상서, 참지, 참지공파 등 15개 파로 나뉘어져 있으나, 판사, 대사간, 사인, 생원공파 등 4개 파는 후손의 거주여부가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