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록>

삶의 노오트

 

                                                                                                    교사   정  덕  기

     옛날 한 아이가 있었다. 그의 다부진 얼굴이 말해 주 듯이, 날마다 그저 빈둥대며 들이나 강가를 뛰놀며 다녔다. 때때로 풀 나물을 캐는 솜씨에다, 잠자리를 잡는 둥, 미꾸라지를 잡는 둥, 개울 진흙에 빠진 사람처럼 항상 흙 투성이었다.

   어른들께서 '이 놈, 공부는 안 하고 밭을 왜 밟고다녀!'하고 나무라면, 그 아이는 '빌어먹을 영감탕구요!'하고 놀리며 비웃음 소리와 더불어 뺑소니 쳐 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이 아이에게 부랑아란 별명을 이름 붙였다.

   어떤 장날에 아이는 시장통을 이리저리 돌아 다니며 둘러보았다. 때 마침 물건을 파는사람, 사는 사람, 떠돌이 장꾼들이 우글 거리고 있었다. 해질부렵이 되어 이 부랑아는 뱃심 좋은 촌 사람이 감과 고구마를 잔뜩 실고온 가마니를 풀어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 물건을 훔쳐내려고 궁리를 하였다.

  시장통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는 <저 장꾼이 다 무슨 상관이냐?> 일축 하고 이윽고 감과 고구마를 하나씩 훔쳐내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 주체 할 수가 없었다. 물건을 훔친 것이 처음이다. 참다 못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이걸 도루 갖다 줄까? 날 새면 어쩌노? 예끼, 주인 한테 갖다 줘 버리자.> 결심 하고 아이는 훔친물건을 주인한테로 가져갔다.

 「저― 요, 감 하고 고구마 하고 도로 가져왔어요.」하고 아이는 솔직하게 말하였다.
 「뭣고? 이놈아. 저리비켜!」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무턱대고 내쫓아 버리려 한다. 아이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있다가 다시금 다가 섰다. 처음보다 겁도 나지 않고 용기가 더 났다.

「이거, 제가 훔쳤어요.」주인이 이 소리를 듣고「뭐라고?」하며 와락 아이의 손목을 움켜잡고 사정없이 따귀를 두어대 갈긴다. 그래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도둑놈은 매를 맞아야 되는 줄로 알았을 뿐이다. 아이는 얼마 동안 시달림을 받은 뒤에, '도둑질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려났다. 땀이밴 삼베바지 차림의 가련한 모습으로 아이는 날마다 그런 짓을 하던 그해 풍년의 가을은 늦도록 무더웠다. 내 나이 아홉 살 때 일이다.

  지금도 젊은 나의 삶은 아직도 멍청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삶을 예쁘게 꾸밀까를 말 못할 만큼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면 생명조차 느껴질까 의심스럽다. 하여튼 내가 누구와 더불어 삶을 지키고 있으므로 적지 않은 말을 하고 있나 보다.

   자, 넓어졌다 오무라들었다 하는 느낌이 드는 하늘 아래, 나무가 자라나는 산과 날 먹일 곡식이 심어지는 들판을 눈앞에 두고, 나는 올 해에 곪아 터질 듯한 시름으로 살맛을 챙길참이다.
 「저 아이는 얼마나 자유스러웠느냐? 만일 너의 갖가지 일이 잘못인 줄 알았다면, 너를 애태워 그립게 한 오늘의 내가, 갓난 아기의 아우성과 마찬가지로 꾸물꾸물 움직이다 바르게 자랄 됨됨이, 그것은 제 뜻대로 즐긴다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었다.」

  이제 나는 지난날을 돌이켜보곤 한다. 쉽사리 잊혀버리질 군더더기라고 나홀로 뇌까리기에는 우리들의 보통스러운 아이들의 일이므로, 다만 그 참됨이 나의 앞날로 비추어 들이고 싶다.

  나에게 어렵고 귀찮은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염치 저염치 구데기 얌체! 작으나 크나 바로 그것들로 물들어진 나의 어린 때에 못 갚은 빚을 깨닫고, 나는 앞으로 올바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길이다. 말하자면 스르륵 뚝딱 똑딱 때(時)를 매기는 돌림 바람을 뒤 쫓으며, 모두에게 주어진 문명의 세대를 짊어지고, 쉬어가고 쉬어가고 하여 죽음의 임금에게 영원한 인사말을 여쭐 것인가를 곰곰히 알아보려고 하는 하루의 생활이 있다.

 오뉴월. 숲속에 난데없이 푸름을 똑똑 갉아먹고 있는 새, 고목에 싸리같이 핀 즙을 쪼옥쪼옥 빠는 매미가 그리로 올까싶어 거기에 버섯이되어 밟힌 풀잎의 길터를 걷노라면, 머언 외로움일까, 서러움일까. 한여름에 웬 눈송이 같은 나비 바람이 부는 것, 그리하여 하늘을 띄운 구름과 별과달, 그리고 우리들의 우주를 다듬어 내고 죽어간 사람들로부터 받은 넋을 돌보자 꾸나…….

   한낮에 밤으로의 숲 위에 달이 떳을 때에, 우리는 그래도 어두움을 잘 이기는 무리랄까……. 아마 밤 하늘에 또 다른 별이 생겨 날지 모르지만, 저달과 나의 외로움 같은 운명의 전체 일까? 아니면 저달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사람의 이웃일까?

   어떤 사람이 저달로 향하여 로켓트의 여행을 즐기드라도 나의 고독한 벗이여! 존엄과 우정을 잃음없이, 나는 자바의 쟝글, 아마존의 열풍(熱風), 사하라의 모래알, 스위스의 호수, 남극의 펭귄, 알라스카의 에스키모의 문명과도 모두 나의 밝은 삶을 의롭게 비치오.

  나는 저 달에게 빚을 지더라도, 이 땅을 떠나서 저 달의 세계로 결코 가지 않으리! 나의 지혜여, 고마운 일이다. 온갖 여름 빛마져 색록한데, 얼마나 자랑스러운 나의 지헤가 온 누리에 하얗게 쌓여지니 말이다.

  자, 튀는 별똥별, 살별처럼 이 땅과 나의 생명이 우주로 떨어져서 영원한 고요, 우리들이 느끼지도 못 할 모습에 얼마든지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일을 하다보면 바램대로 되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못하면 마음을 갈팡질팡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어찌다가 사람된 희망을 갖어 볼 겨를을 갖게되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쁘다. 적어도 이 눈 깜작할 사이에 나의 움직임이 저 태양의 반대쪽에서 여기로서 확실하게 태양의 궤도를 걸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게 한, 어떤 사람의 힘을 입었으므로, 나는 알 듯 모를 듯 분에 맞게시리 남을 도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느릿느릿한 그 어둠은 물론, 어려움이야 말로 삶의 짜임 틀에 기름이라고…….

  빛없는 꼬부랑 길을 감각의 더듬이로 기어가는 오랜 여유를 품속에 숨겨두고 싶다. 서뿔리 잔꾀(奸智)를 팔다가 외디프스에게 배척된 스핑크스의 비운(悲運)을 믿어라. 비록 이것이 신화 일지라도 사람이 만든 얘기요, 사람의 삶을 참뜻으로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지난날은 한 편으로는 슬픈 눈망울의 윙크를 느끼며 살아왔었다. 한마디로서 그것은 괴로움의 인생무대였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너와 나의 새로운 기쁨을 그리게 되었다.

 「잠없는 번개가 뭉쳐진 벼락을 삼키고 저 진땅속에 나동그라질 즈음, 나의 넋은 관능(官能)에 겨운 비바람에 부대끼고 있는 것일까. 밤마다 유령의 등살에 못이겨, 나의 둘째 번 무덤을 수없이 후비어 낼 빗방울의 통곡이어, 나는 할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