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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의 연가와 한
1 <쌍가락지 논개> 복지관 경로 식당에서 70년 동안 보지 못한 학창의 고우를 만났다. ‘어서 와, 하동 빨갱이!’ 하고 손들어 맞아주면 폐허가 되어있는 영남백화점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고 우범지역이란 주민의 민원이 쇄도하자 진주시는 이 건물을 철거했다. 그 후부터 친구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코로나로 잠겼던 경로 식당 문이 열리자 다시 만난 친구는 구 보건소 자리 주차장 옆에 거처를 옮겼다고 하였다. 기력이 없어 보이는 친구에게 농담처럼 ‘치매는 치료하고 있냐?’고 물었다. 대답처럼 대뜸 하는 말이 ‘작사자가 누군지 아나?’ 하고 묻는다. ‘몰라, 이재호 선생이 작곡하신 것 같은데?’ 1953년쯤인가 중고교 시절 국어숙제로 장난삼아 제출한 ‘쌍가락지 논개’란 제목의 이 시를 담임선생님이 보시고 다듬어 곡을 붙이면 어떻겠냐고 하기에 그래 보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이 노래가 석류알처럼 맑고 붉은 애국 충절의 연가<쌍가락지 논개>가 된 것이라 했다. 고교 시절 교내브라스밴드 주장이었던 나는 이 노래를 친구들과 연주하며 노래 부르기도 했었다. 동네 모임이 있는 날이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쌍가락지 논개’를 친구와 열창해주면 이웃들이 그렇게 좋아했다. 나와 친구는 학창시절 권투로 체력을 단련하며 정의심을 길렀다. 그는 지금도 자작시를 2절까지 모두 외우고 있었으나 나는 일절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 논개야 쌍가락지 손가락 매디마다 술잔 위에 서린 분노 시퍼런 칼 비수 되어 왜장 놈의 목을 끓어 남강물에 내 청춘을 촉석루에 진달래가 필적마다 아- 아- 아- 논개야 논개야 너를 찾는다’ 이런 것 같다.
산청이 고향인 친구는 진주 농고를 다녔고, 나는 하동고교를 다닌 동년배로 서로 힘자랑을 하던 학교 대표 권투선수였다. 1957년 7월경 진주극장에서 열린 <제1회 서부 경남 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 때 결승진출을 다투었던 친구다. 진주에서 강펀치를 자랑하던 선수들도 반 박자 빠른 나의 순발력에 밀려 <챔피언 컵>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건강한 이성을 간직한다는 논리를 예체능 일체라 한다.
2 <포니 나무>
5.16 혁명군이란 휘장을 달고 해병대 사령부에서 1962년 2월 만기제대를 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재건국민운동 하동군지부 새마을 운동 간사로 일했다. 혁명이 성공하여 화폐개혁까지 마친 혁명정부는 재건국민운동조직을 해체하였다. 그 후 경상남도경찰청에서 기능직 4급으로 3년을 근무하다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그만두었다. 어린이의 꿈이였던 세계 일주를 해보고 말겠다는 의지로 한국해양대학 전수기관학과를 수료하고 해기사 면허를 얻은 1969년 수료와 동시에 해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20년여 동안의 해상생활을 접고 정성껏 모아온 무거운 등짐을 메고 부산 동래를 떠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도 곤 어려 왜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나 하여라 <장 만>의 시조를 읊어보며 귀향길을 멈춘 곳이 지금의 그라운드골프장(진주시 신안동 590-1, 2, 5번지 4,579.0㎡)이다. 이곳은 동란 전후만 해도 젊은이들이 낭만을 즐겼던 남강 대숲 속의 유명한 딸기밭이었다. ‘진주라 천 리길’이란 한 여인의 연가도 이곳에서 태동한 연가다. 아름다운 풍광의 잔영이 나의 짐을 내리게 한 것이다. 네델란드에서 본 멋진 튤립농장을 이곳에 만들어 보고 싶었다. 1982년만 해도 강변 버들 그늘 숲에 발을 담그면 은빛 피리와 쉬리 떼가 발끝을 간지럽게 하던 강물은 깨끗하여 식수로 길러다 먹었다. 쉬리를 잡아 어항에 넣어 관상하며 즐겨 보기도 하였다. 어항에서 잘 커가는 놈은 강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친구들은 나를 자연인이라며 부러워했다. 1986년 88올림픽 성화 봉송로에 지정되어 강변 도로변 농지를 매입하여 공원으로 조성한다며 농장 위의 집과 창고 축사 등 모든 영농 시설을 자진 철거하고 큰 나무를 모두 옮겨달라 하였다. 한국 공무원도 일본이나 미국 유럽의 공무원같이 신뢰가 있는 줄 믿고 지시대로 응해주었다. 이웃들이 공무원 앞잡이 같다며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림픽이 끝나고 1990년도 토지 공시지가제도가 시행될 때까지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공시지가는 평당 30만 원이 넘는 재산세와 최고한계치의 건강보험료만 부과시켰다. 보상만 기다리던 어느 날 토지가 국유화되었으니 건보료를 면제한다는 통보가 왔다. 내용을 알아보니 토지가의 10%도 못 되는 지장물보상공탁금을 걸고 국유화해버린 것이다. 부당한 행정처리에 항소하여 소유권은 되찾았으나 당사자도 몰래 그 공탁금마저 회수하고 온전한 보상 처리되지 않은 상태의 땅이 바로 이 그라운드골프장이다. 많은 시민의 건강을 지켜주는 이<그라운드골프장>은 한 해기사가 해상생활 20년의 젊은 꿈이 침몰한 ‘빼앗긴 들’인 것이다. 인생무상을 깨달은 팔순 나이에 ‘내 고장 자랑’이란 글로 한을 지워보려는 의지라 여겨준다면 한풀이를 돕는 배려가 될 것이다. 어떤 잃음이 생기면 그만큼 큰 얻음으로 되돌려 준다는 신의 의지가 동학사상의 일부다. 이를 깨닫게 해준 곳이 골프장 곁의 <인라인스케이트장>이다. <그라운드골프장> 강변 쪽에 버드나무 한그루가 홀로 뽐내며 산책인의 사색을 돕는 쉼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이 버드나무는 내가 꺾어 심은 나무로 두 번이나 베었으나 신기하게 다시 자란 것이다. 늦은 밤업소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반갑게 마중을 해주던 <포니>가 어느 날 마중을 나와주지 않았다. 농장 주변을 찾아보자 울타리 밖 버드나무 아래 죽어있어 그 자리에 깊게 묻어 주었다. 그때부터 이 버드나무를 <포니 나무>라 불렀다. 이 나무를 볼 때면 넓고 검은 귀를 펄럭이며 뛰어오는 키 큰 포니(잉글리시포인터)의 형상이 떠오른다.
재산과 건강까지 잃어버린 나에게 가족이 다시 모이고 건강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재기시켜 준 곳이 신안동 <인라인스케이트장>이다. 만물은 주변의 환경을 모방하며 미래를 설계한다. 건강한 삶이란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생활신조로 여기며 살아왔던 해기사의 해상의무가 무참하게 무너진 형국이 <세월호 참사>였다. 학생들의 비참한 환상이 일주일 넘도록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다 기어이 우울증 환자처럼 되어 버렸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잃어버린 나의 뜰 안<포니 나무> 아래 힘없이 앉아 시름없이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단잠이 깨니 맑게 비친 인라인스케이트장 푸른 물결 위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한 노인이 벤치에 앉아 인라인스케이트장을 얼빠진 듯 바라보고 있다. 아이와 손잡고 스케이트를 타던 엄마가 내 곁에 앉으며 인라인스케이트가 타고 싶으세요? 하고 묻는다. 늙은이도 가르쳐 줍니까? 의지만 있으면 쉽게 배울 수 있는 균형 운동이라며 지도 선생이 오면 누구나 가르쳐 준다며 스케이트를 살 수 있는 곳도 알려주었다. 이마트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샀다. 스케이트를 신고 일어서고 앉는 것부터 시작하여 걷기를 시작한 때의 나이가 75세였다. 얼굴 감각이 둔해질 정도로 땀을 흘리니 깊은 잠을 자게 되고 우울증이 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독차지한 인라인스케이트장이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잃은 것보다 더 큰 얻음이란 생각으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도 되찾게 되었다. 인라인스케이팅을 시작한 지 10년이다. 탐욕을 버리지 못한 우울증이 사라지고 생명 세포가 재생되었는지 생명 세포의 텔로미어가 늘어났는지 알 수 없는 10년 이상의 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청량한 날씨면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시속 15km 이상의 속도로 10Km의 자전거길을 지금도 단숨에 달린다. <웅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