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

<다정한 기다림>

9남매의 늦둥이 막내라는 뜻으로 아버지는 나의 아명을 구용(九龍, 족보에는 항열 따라 奎龍)이라 하셨다. 국민학교에 입학 하기 위해 창씨 개명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학적부에는 이진원(慶川進元)이가 되었다고 하셨다. 초·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방과후에 집에 오면 누나들이 아버지가 일하고 계시는 너뱅이 들에 새참을 갖다드리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때가 되면 항상 나를 기다리셨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척의 빚 보증 때문에 우리의 논밭과 여관집까지 빼앗기고 파산이 되었다. 신농이란 별명을 가지신 아버지도 늙은 나무꾼으로 변하여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도우셨다. 나의 등교길에 나무를 하러 가시는 아버지가 남 부끄러웠다. 친구들은 아버지를 할아버지라 부르며 인사를 한다. 친구들의 어머님은 대부분 누나들의 동기였다. 나는 아버지 몰래 나뭇지개 멜방을 잘라버렸다.

이른 아침에 이를 발견한 아버지가 넋을 잃고 한숨을 지으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두 세번 등교 전에 집을 나서셨다가 학교를 마치기 전에 돌아 오셨다. 내가 고교에 진학 할 무렵 우리 가족은 채권자로부터 여관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갈곳이 막연한 어머니는 연화동 화장막 입구에 있는 쓸어질 것 같은 초가집 지붕밑을 기둥으로 받쳐 놓은 방 두 칸이 있는 집을 구하여 이사를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무를 하여 푼푼히 모아둔 비상금 7만원을 주고 이집을 샀다고 하셨다. 이때서야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년만하신 아버지가 애쓰신 뜻을 알고 아버지를 도와드릴 생각을 하였다. 저녁에 마루에 앉아 밤 달을 보시며 곰방대를 피시는 아버지 곁에 앉아 천기를 물어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주말에만 나무를 하시면 어떨까요?」
「주말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하시며 주저 하신다.

주말에 항상 쉬셨던 아버지가 토요일인데 지게를 지고 나의 등교길에 나서더니 교문 앞을 지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 날부터 방과후 특활이 없는 날이면 책가방을 친구에게 맡기고 섬진교를 건너 갔다. 아버지는 서대식 친구의 마을 뒷산에서 나무를 하셨고 선진다리를 건너기 전에 큰 벗꽃나무 거늘 아래서 쉬셨다. 나는 그 곳에서 나뭇짐을 받아 지고 단숨에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쉬지 않고 올 때면 아버지는 천천히 쉬어 가자고 하셨다.

나뭇짐을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을 때, 부모님은 측은 해 하시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보이셨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다리목에 도착하지 않아 이선화 친구의 동네까지 마중 간 일이 잦아지더니 점점 더 늦어져 해가 기울무렵 아버지가 나무를 하는 현장까지 가서 나뭇짐을 지고 온 일도 있었다. 이런 날은 나무짐이 더 무거웠고 내가 온다는 믿음이 탐욕으로 변한 것이다. 언제나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 하시던 아버지가 이상하였다.

주말도 아닌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일찍 돌아오시던 아버지가 아직 안 오셨다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둑한 노을을 바라보며 선짐교를 건너 뛰어갔다. 나무를 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오솔길에서 나뭇짐을 진채 쓸어지셨는지 얼굴이 피범벅이되어 주저앉은 채 넋을 잃고 계셨다. 무거운 나뭇짐을 받아 지고 겨우 일어나 산을 내려 오면서 아버지를 원망하다 내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어 있는 힘을 다하여 섬진교에 도착하니 캄캄한 강변엔 가로등이 띠엄띠엄 켜져있었다. 따라 오시던 아버지도 지치신 것 같았다. 어머님은 아버지의 모습을 비쳐보시더니 말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셨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노환이 엄습하여 자리를 보존하시게 되었다. 내가 군에서 훈련을 마치고 첫 휴가를 올 때까지 아버지는 집을 보고 어머니와 유덕이가 나무를 하여 생계를 이어셨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드린 선물이 몇 봉지의 <해병건빵>이었다. 아버지는 두 개만 남은 송곳니로 쪼는 듯이 부수어 드시면서 '다람쥐 도토리 식량이지'하시며 웃으셨다.
「다음 휴가 때는 많이 가지고 오너라!」하시던 아버지가 하얀 어린이 같았다.
일년 후 정기휴가 때는 모아 두었던<해병건빵>을 이낭에 가득담아 둘러메고 집으로 왔었다. 나를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건빵 이낭을 안고 기뻐하시는 모습이 나의 누시울을 훔치게 했다.

두 번째의 휴가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기다림은 우리 가족의 행복한 만남이었다. 제대를 하고 돌아왔을 때는 자리에 누우신 채 나를 보신 듯 눈물을 흘리시며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눈을 감으셨다!' 하시며 아버지가 당신의 목숨처럼 아끼는 건빵을 나무를 하러 갈 때마다 꼭 한봉을 주시며 굶지 말라고 하셨다면서 눈물을 닦으셨다. 아버지는 다정했던 기다림을 끝내신 것이다. <정유년 5월>

웅암 이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