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나무

웅암 이진원

1

    1965년무렵 혁명정부는 외화벌이 수단으로 소양교육――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한다.――을 시킨 기능 인력을 저임금으로 수출했다. 일종의 국제 앵벌이 대작전이다.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노예생활인들 마다할 이유없이 경쟁적으로 지원했던 시절 이었다. 선원 해외송출을 필두로, 독일광부와 간호원, 월남파병 등이 같은 맥락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한국 선원들은 피나는 노력과 악착같은 학습으로 신임을 얻었다. 선진 해양국들은 자국 국적의 선박을 편의치적선으로 ――주로 리베리아, 파나마, 멕시코, 알제리아 등―― 바꾸어 한국 해원(해기사와 기능선원)을 고용하기 시작 하였다. 백인선원 절반의 임금으로 동격의 고급 용역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ITF를 만들어 한국해원을 고용한 편의치적선의 하역 작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노조파업을 일삼았다. 이것이 그들의 gentleman-ship의 실상이었다. 이들의 명목적 파업이유는 동일 노동의 동일 임금 지급이었다. 한국해원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선동한 것처럼, 이렇게 20년의 세월을 착취 당한 피땀으로 얻어온 눈물겨운 돈으로, 진주 남강가의 포도농원 약4500평을 구입하고, 바다를 떠날 결심을 했다. 송곳 꽂을 땅 한평 없던 나에게 가슴 벅찬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관개시설, 교통편리도, 농토의 비옥함 등 최상의 영농 조건이었다. 부드러운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농장의 아름다운 풍경은 꿈속의 도원경이었다.

   네델란드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튤립정원과 포도원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내가 이땅을 매입할 당시 주택2동, 창고, 양계축사, 온실 각1동, 20년생 과수목300주, 감나무20,000주, 목련 6000주, 장미6,000주, 측백15,000주, 석류1000의 묘목이 있었다. 이듬해 봄에 모든 묘목의 접목을 끝내고, 묘포장 온실 60평짜리 2동을 더 지었다.  그러나 이렇게 부풀었던 나의 꿈은 해난 사고보다 더 무서운 시청공무원의 농간에 속아, 예산이 집행된 수억원의 보상금은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산고법의 조정시 지장물 2억7천만원, 토지보상2억4천만원을 재판장이 제시하여 이를 쌍방이 인정했던 터였다.

   아는 놈이 도둑이라 했던가. 향우란 지연, 선후배란 학연을 미끼로, 나를 회유하여 시민의 사유권을 탈취하는 술수가 자신이 출세(진급)하는 행정능력으로 인정되는 행정후진국의 관행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고속 승진을 하였고, 퇴임 후에도 많은 연금을 받아 먹고있는 것은 한국정부의 행정이 세계의 부패지수 하위권을 고수 하고 있는 원인이다. 이런 공무원들은 사회에 나와서까지 곳곳에서 이권 개입의 행정프락치 노릇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선진국이 되기 힘들게 하는 걸림돌이다. 지금도 이들의 변명을 인용하고 있는 법원의 판결이 더 문제다. 한국이 부패지수가 높은 것은 법원, 검찰, 경찰이 삼위일체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개혁되지 않아서다.

   내가 살던 곳의 앞 뒷 집은 토지와 지장물 보상금을 다 받아, 유출된 정보의 도시개발지역으로 농장을 이전하여 거부가 되었는데, 한 사람은 교직자였고, 한사람은 경찰 퇴임자였다. 나만 땅이 넓어 보상금이 많다는 이유로, 외지에서 전입하여 청탁을 하지 않고, 정직한 행정 집행을 원한다는 이유로, 토지는 공시지가150,000만원/㎡의 과세를 하고서도 1/10에 해당하는 23000원/㎡으로 보상하면서, 지장물 보상금을 송두리채 가로채는 행정만행을 누가 탓하지 않겠는가! 힘있고 청탁하는 자에게는 공시지가를 상회한 현시세로 보상해주고, 힘없는 나에게는 중토위의 감정가를 적용하는 불평등이 진주시에만 있으니, 옛부터 형평운동이 일어난 연유가 아닌가.

  과세할 때의 감정가와 보상할 때의 감정가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것은, 일물일가의 경제원칙과 인권의 형평성을 무시한 행정부패인 것이다. 이렇게 법의 효력은 강자에게만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민초들은 집단으로 항거하고, 단체행동의 조직적 시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법원은 아직도 집단이기주의 ――좌경, 우경, 진보, 보수라는 이념으로 터부시 하고 있다.――라 집착하여 행정제국의 만행을 옹호 하고 있다. 법원과 검찰이 청렴하고 정직한 공복의 의무를 완수한다면, 신뢰성이 바탕이 되어 일등 선진국 처럼 지역별, 계층별 갈등이나, 사회의 님비현상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강변에 자전거를 타고 나올 때면, 아름다운 <포니나무>가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그 때의 추억을 회상케 한다. 이것은 지금의 행복일 수도 있다. 수 많은 변호사들의 똑같은 거짓에 허송한 그 세월이 나를 법학도로 만들었고, 컴퓨터를 알게 하였다. 정보를 얻기위해 미디어영상과 중문학과 국문학도 전공을 하게 되었다. 개인의 힘은 원칙을 바로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란 나의 좌우명이 15년여의 법정 투쟁을 하게 하였다. 침탈당한 나의 토지도 되찾았다. 그러나 행정만행에 짓밟혀버린 진주20년의 청년세월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추방된 무능한 가장으로, 서글픈 노년을 스스로 보살피는 작은 아지터를 가져 노숙을 면케해 준 것이었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팔아 말을 사니
   구절 양장이 물도 곤 어려왜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나 하여라

  <장만>의 시조가 나의 인생 역정 같다. 그런데 밭 갈기도 편히 못하는 이 나라 백성이 정직하게 살기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관료들 때문이다. 신안동 594-1,2,5번지, 남강가의 4500여평의 아름다운 네모 반듯한 넓은 잔디공원 중간 지점의 강변에 품위있게 당당히 서있는 능수버들 한 그루가 있다. 이 능수버들은 <포니나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포니나무>가 생겨난 것은, 어머니에게 불효했던 과오를 기억하고 참회하라고 생긴 것이라 믿고있다. 어머님을 모시고 진주로 이사를 했더라면 만사가 형통했으리라. 그래서 진주에 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의 잘못을 참회하는 상징물로 <포니니무>가 생겨난 것이라 믿는다.

   1984년 늦은 봄이다. 맑고 깨끗한 남강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그늘 밑에는 피리와 쉬리떼가 은빛 찬란하게 놀고 있다. 파리통으로 고기를 잡아 어항에 넣어 보았다. 먹이를 받아 먹는 놈은 살아 남고, 성질이 급한 놈은 지레 죽어 다른 고기들의 밥이 되곤 했다. 어항 가득했던 쉬리가 점점 줄면서 상당히 커가는 놈도 있었다. 어느날 쉬리를 잡아 오면서 꺽어온 버들 가지를 강변대문 옆에 꽂아 두었다. 그것이 이듬해 뿌리를 내려 올곧게 자라났다.

   1986년 보상을 해 준다는 K란 건설행정계장의 말을 믿고, 농장 안의 집을 자진 철거하고 큰 나무를 옮길무렵 키가 큰 이 버드나무도 함께 베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보상도 받지 못한채 영농을 못하게 하는 시청의 방해로 폐허가 되어버린 농장 대문 옆에 잘려진 둥치에 외줄기로 돋아난 새 버들이 아름답게 자라났던 것이다.
   잘려지기 전, 그 버드나무 곁에 나의 애견 포니(일글리쉬 포인터)를 묻었기에 그대로 자라나게 두었던 것이다. 이 농장에 살고 있을 때 <진>이라는 진돗개 암컷과 수컷 포니를 길렀다. 어느날 밤 포니는 약물 중독으로 죽고 <진>이는 없어져 버렸다. 남들은 개도둑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포니를 작은 버드나무 곁에 묻어 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어머님을 우겨서라도 꼭 모시고 오지 않은 것은, 장모님을 생각한 아내의 염력이 작용한 때문이다. 이제 참회를 하여도 부끄럽지 않은 황혼이기에, 모든 삶이 행복한 것임을 깨달 았기에 술회 하는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배를 타지 않아야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노아의 미래를 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인생은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는 어릴때 각인을 시켜 스스로 살아갈 모습을 보여주는 것 뿐인데 자식의 인생을 자기의 이상형으로 되기를 바라는 지나친 욕망이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도 동물이나 식물처럼 주위의 삶을 모방하며 자기의 미래를 설계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정직하고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 바른 사고를 가지려고 노력할 때만 미래의 교육이 받아지는 의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노아에게 나의 삶이 잘못된 각인으로 남게 한 것은, 주위의 인식을 모방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 나의 무능이었다. 첫 번째의 십사년의 초혼가정의 파탄은 아내의 외도였고, 두 번째 12년의 재혼의 파탄은 아들의 반항적 탈선과 정직을 빙자한 새엄마의 이기적 아집과의 갈등이었다. 세 번째의 파탄은 부패행정을 이겨내지 못한 나의 무능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탈선과 친인척의 농간이 부패행정을 이길 수 없게 하였던 것도 있었다.

    또 한가지 나의 무능은 정직한 삶을 산다는 인식을 남에게 각인시키려고 어리석은 노력을 한 내 자신이었다. 이것이 가정의 행복과 자식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으로 집착하였다. 물론 돈 있는체 하는 것처럼 불행을 만드는 행세가 없다. 나의 불행은 처자식이나, 형제, 친인척들이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라는 가정적 인식이 만들어 낸 것이다. 공무원들도 이같은 생각으로 옹생원인 나의 등을 쳐보려는 의도가 민원 처리 불능 또는 지연된 이유였다. 지금부터 진주로 이사를 오게된 인연과 1986년부터 진주시 하수과와 건설과가 나의 청년 20년을 짓밟은 픽션 다큐로 전개 할 것이다. 행불행을 회상할 수 있는 노년이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행복했던 나의인생을 <포니나무>라 이름을 붙인다.

 

2

    며느리에게 쫓겨나듯 서울로 올라 가셨던 어머니는 다시 돌아와 14년의 결혼생활이 파탄된 대신동 셋집에서 도망치듯 부민동 작은집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노아를 데리고 월세를 들었다. 그 곳에서 동래 장전동 새집으로 이사를 할 때에도 그동안 정이 든 부민동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담벼락 밑의 방 두 칸짜리 집을 사려고 해도 일시불 할 돈이 부족했다. 그러나 같은 값으로 동래에 새로 지은 집 두채는 재혼녀의 외삼촌이 저당잡은 집으로 부족한 돈은 일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외상으로 구입했던 것이다. 훗날 두 번째의 파탄을 잉태한 씨앗이되었다.

    알뜰 하신 어머님은 초혼녀가 저질러 놓았던 친인척들의 많은 부채를 모두 갚아 주고, 2년 남짓한 기간에 새집을 장만 할 정도로 안정된 가정을 이루셨다. 그때 어머님의 말씀대로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부민동에 더 머물렀다면, 두 번째의 가정 파탄도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해 본곤 한다. 이 역시 재혼녀의 입김이 작용한 잘못된 나의 판단이었다. 초혼녀가 어머니를 기어이 서울 형님집으로 보낸 후에 파탄을 내었던 것이다. 아들 딸들이 그들의 배우자 보다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한다면 뒤늦은 후회나 참회를 하는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어머님은 휴가를 올 때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재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연만하신 어머님을 위해서도 재혼을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도와 주시던 막내 누님의 시가 쪽의 여자를 재혼녀로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에 재혼녀의 외삼촌이 채권으로 차압한 장전동 한 필지116평 대지 내에 집 두 채를 완공해 주는 조건으로 매매계약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처외삼촌의 채권을 변제해주는 불량 리스상품을 인수한 것이었다. 부실공사로 인한 물질적 피해는 상당히 컸었다. 그러나 집을 장만했다는 부푼 마음이 어청난 바가지를 감내케 했던 것이다.

    동래로 이사온 후의 어머님은 새로운 환경에 곧 적응하시었다. 이웃 노인들과 친해지고, 경노당 노인회장까지 맡으시며 이웃을 화목하게 하시었다. 아마도 동학사상이 몸에 배인 생활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노아가 문제를 일으켰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래도 새엄마의 통제가 가능했으나, 중학교에 들어가자 할머니의 비호를 받아오던 아들은, 고부간의 갈등을 부추기며 부랑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재혼녀까지 노아의 행패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회사는 뉴욕에 입항한 나를 두 번째 소환명령으로 불러 들였던 것이다.

   안정된 선상생활을 배려한 회사의 조치는 신뢰성이 있었다. 귀국한 일주일 후에야 아내가 인근 천주교 요양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혼녀는 아이가 집에 있는 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마치 어머니가 있는 집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초혼녀의 가출 같았다.     중학생인 아들도 결코 새엄마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노아와 재혼녀가 바라는 조건――집 한 채를 주고 이혼을 하는 것――을 받아 주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의 이기심과 재혼녀의 몰인정이 두 번째의 이혼을 강요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남에게 천사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시노모와 아들에게 몰인정한 원칙을 따지는 것으로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

   나는 뒷집 한 채를 재혼녀에게 증여하고 합의 이혼을 한 후, 죄지은 부끄러운 나그네처럼 도망치듯 다시 바다로 떠나 버렸다. 도저히 뭍에 머물러 있고 싶은 용기가 없었다. 이것이 두 번째의 파탄이었다. 초혼녀는 자신의 외도로 14년의 결혼생활을 망쳐놓고도 생모의 시샘어린 악령은 그 아들의 가슴에 프락치처럼 스며들어, 자신을 길러 준 은혜를 앙갚음으로 12년간 새로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또 허물어 버렸던 것이다. 나의 시련이 겹칠때마다 어머님은 더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손자 노아를 더욱 탕자로 길러냈던 것이다.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새 엄마를 쫓아내고, 할머니밖에 없는 집은 그야말로 노아가 불량친구를 불러들여 즐기는 방탕의 천국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어머님은 더 이상 감당할 기력이 없었는지 누님들에게 숨겨왔던 노아의 방탕을 회사측에 알리고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시드니에서 세 번째 귀국명령을 받은 이유는 학교에 등교를 하지 않는 아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회사는 내가 더 이상 승선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퇴사를 종용했던 것이다. 집에와 보니 아들은 가출해 없었고, 어머님 혼자 불안한 외로움으로 지쳐있었다.

   어린 노아의 약속을 믿고 생명을 바다에 걸었던 한심한 나였다. 어린 노아인들 외로움에 희생 당하는 일방적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는 일이다. 서글픈 마음으로 귀국한 나는 여행 가방도 열지 못한 채, 어머니의 눈물만 처다볼 뿐이었다.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어 나를 불렀을까 생각하니 참 불효막심이었다. 정직한 고생을 견디어내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른 교육이다. 나는 처자식들이 외로운 나의 선원생활은 모두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 믿고 협력 해줄 것으로 믿었다. 모든 것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의 무능한 나의 변명이었다.

   정직하지 못한 변명을 깨달은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탓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부산대사대부고를 방문했다. 나는 요즘 선생을 학창시절의 사표로 착각을 했었다. 담임은 10일 안에 학생이 복교하면, 견책으로 용서하겠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 왔다. 아들은 가출을 한 상태로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우선 어머님의 불안을 안심시켜 드리며, 아이가 하루 빨리 돌아 오기만 기다렸다. 노아의 이웃 친구인 강일이 집에 들렸더니 그 아이도 가출한 상태였다.

   강일 어머님은 불안해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으니 돈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며, 이삼일 안에 집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태연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강일 어머니는 나의 아들 노아 때문에 자기 아들까지 문제아가 되었다고 나를 원망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부언하는 말이, 아들이 돌아오면 꾸중을 하지 말고 배를 탄 죄로 알고 잘 타일러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노아는 외로움을 잊기위해 강일 어머니가 나와 종씨라는 핑계로 이집에 살다시피 하였고, 친 고모처럼 알랑거리며 우리집안의 모든 것을 털어 놓았던 것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강일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들이 오늘 오후에 집으로 들어면 잘 타일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일족이라 선지, 아들을 사랑해 주는 이웃의 마음인지 알수 없는 고마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저녁에 들어온 노아를 나는 약속대로 조금도 꾸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롭게 해서 미안 하다고 위로를 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배를 탈 수가 없게 되어 육지에서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잘 다니라고 눈물을 글성이며 간절히 부탁을 했었다. 가정이 안정되지 못한 해원은 능력이 있어도 승선을 권하지 못한다.

    다음날 노아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조례를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오는 선생님을 보는 아이는 미안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담임 역시 덤덤하게 믿을 수 도둑을 보는 듯이 이번 까지는 아버지의 간곡한 약속 때문에 용서를 하겠으나, 한 번 더 무단 결석을 하면 자퇴할 수밖에 없으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이와 선생이 서로 지친 마음을 보여주는 듯 사무적인 경고만 받았다.
  어머니는 퇴학을 당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말에, '참 다행이다' 하시며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안도의 눈물을 흘리셨다.

 

3

   이렇게 한 순간의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다음 주말에는 노아와 함께 성묘를 겸한 고향 나들이를 겸한 1박 2일 여행을 약속해 둔 터였다. 그런데 노아가 전화를 받고 나가더니 뜻밖에 형님의 둘째 딸 미양이와 희멀겋게 생긴 한 청년을 데리고 들어 왔다. 집에 들어온 그들은 어머니와 나에게 공손한 인사도 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집안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내가 집에 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노아가 미양이 남자 친구를 보고 형님이라 부르는 모습이 허물없이 지낸 친분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직감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조카딸이 반갑기도 하고, 학교도 가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져먹고,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 가겠다는 미양의 말을 믿어주며 하롯 밤을 머물렀다 가게 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그들이 떠날 때 노아가 마중을 나갔다가,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노아는 나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미양이 누나를 마중하고 오다가 친구를 만나 놀다 왔다며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어머님은 나를 불러 한숨을 쉬며 돈이 든 봉투를 내밀며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봉투 안의 돈을 세어 보았다. 15만원이었다. 한참 후에 정신을 가다듬은 어머님은 누님들이 생일때 마다 만들어 준 금목걸이, 금비녀, 금팔찌, 금반지 등 4~5냥중이 넘는 금붙이를 노아가 찾기에 숨겨 둘 수가 없어, 모두 팔아 현금으로 봉투에 넣에 어머니 이부자리 밑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 돈이 전부 없어졌다는 것이다. 노아가 할머니 용돈으로 이 돈을 남겨둔 것 같다고 하시며, 할미를 생각하는 양심이 기특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오면 예금을 시킬 심산이었으나, 나의 마음을 상할까 눈치를 보다가, 아이가 가출하도록 만든 꼴이 되었다며 자학을 하시는 것이다. 참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불효였다. 나의 자식이 어머님을 괴롭혀 죄송하다며 오히려 안심시키고, 방과후에 노아가 집에 돌아 오면, 한 번 알아 보자고 변명하였으나, 어머님은 저녁에 들어올리가 없다며, 당장 학교에 가보라고 서두르신다. 나는 주저없이 학교 담임 선생을 찾아가 보았으나, 노아는 역시 등교를 하지 않았었다.

    노아를 만난 학생을 찾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겼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어머님은 당신 잘 못이라고 하시며 미안해 하신다. 내 마음도 지쳐 어머님을 위로 해드릴 용기마져 없었다. 쓸데 없는 돈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속담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돈을 맡기지 못하신 것도 손자를 고자질하는 것이 될까 걱정했기 때문인 줄도 나는 알고 있었다. 가장이 집을 비우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방랑이나 외도와 큰 차이가 없다. 결국 매사가 나의 책임이었다.

  어머니가 손자를 과잉보호해 준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린 시절처럼 엄하게 보호하실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힘없는 모습이 나를 더 서글프게 했다. 노아가 저녁에라도 잘못을 반성하고 집으로 돌아온다면 한 번 더 용서할 것이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어머니가 잠자리에 들실 때까지 노아는 들어오지 않았다. 부산 발 서울행 열차가 대구 경산에서 정면충돌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뉴스특보에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연고 시체가 많다고 종일 보도했다. 그 뉴스를 보면서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도 많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신경질적인 전화소리가 울렸다. 나는 대뜸 <노아가!>하고 전화를 받았다.

「노아 집에 있습니까?」
「아니 없는데, 왜?」
「저 부고 학생인데요, 오늘 부산역에서 노아를 만났는데, 어떤 친구들하고 열차를 타고 서울 간다고 하든데요……」
「그래서?」하고 다급히 물었다.
「그 사고 열차로 간다고 해서요.」
「오냐, 고맙다.」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머님이 모르게 하였다.

   수백 명의 환자와 파열된 시신을 조합하여 대구와 경산에 있는 병원 7곳에 분산하여 신분을 알 수 없는 시신의 인상착의 또는 특징을 방송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절대 이 열차를 타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고열차는 분명 노아 친구가 말해준 그 시간대의 열차였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지도 않았다. 태풍을 만나 조난을 당했을 때의 비장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던 그 때처럼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새벽에 어머니에게 좀 늦게 돌아올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일찍 주무시라고 말씀 드린 후 집을 나섰다. 제일 먼저 가는 차를 타고 대구로 갔다. 간밤에 메모 해 둔 병원 리스터를 보고 옆에 앉은 대구 사람에게 어떤 병원부터 돌아보면 시간이 절약되는지 물어 보았으나, 버스 터미널에서 가까운 병원만 지적해 줄 뿐 그 외는 잘 몰랐다. 우선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제2 경산병원부터 돌아보았다. 물론 <무연고자>란 표기가 붙어있는 시체만 확인 해 보았다.

   몸의 일부만 있는 것도 있었다. 노아가 입고 간 옷이 교복이 아니고, 사복을 입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강일 누나가 선물해 준 십자목걸이와 은반지를 끼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연고자의 시체가 있는 병원을 모두 돌아보고 막차로 부산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은 내가 돌아 올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 힘없이 들어오는 나를 보고
「대구 갔다오는 길이냐?」하신다.
「예.」하고 대답하였다.
「네 성정에 현장을 보고 싶겠지만, 노아는 절대 그 열차를 안탔다.」하셨다.
  나의 마음도 같았으나, 만에 하나라도 정성이 부족하여 후회스러운 일이 생길까 근심이 되었다. 훗날 노아는 돈이 많아 서울행 열차표를 바꾸어 제주도 가는 배를 타고 제주도에서 놀다가 비행기로 서울에 갔다고 했다.

    며칠 후에 학교에서 두 번째 연락이 왔다. 퇴학을 당하면 이 학교에 복교가 어려우므로 자퇴서를 쓰면 복교를 할 수가 있다고 종용했던 것이다. 나는 담임의 말을 믿고 자퇴서를 써 주었다. 담임의 표정은 체증이 내려간 듯 한숨을 쉬었다. 학생을 선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죄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아린 이빨을 뽑은 듯이 바쁘다는 말을 남기고 나의 곁을 떠나 버렸다. 모든 선생이 문제 학생의 학부모를 재수없는 도깨비처럼여겨 눈을 맞추는것도 싫어했다. 교장, 교감은 벌써부터 자리를 피하여 담임의 말을 확인 해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선생들이 무책임에 도통한 안일족속이란 것을 각인하는 순간이었다. 학생과 부형은 그들의 진딧물에 불과 했다.

   뉴스가 뜸해진 일주일이 지난 시기가 되었다. 노아가 열차를 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는 안도감이 생겨났다. 탔다면 벌써 연고자에게 연락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배를 타는 것은 고사하고, 육지의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그렇다고 집에서 마냥 아이를 기다리는 것도, 찾아 다니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할 일 없으면 장가나 가거라!'할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되 찾으시었다. 뱃놈이란 배를 탈 때는 진창 만창으로 낭비를 하다가, 배를 내리면 굶기를 밥먹 듯 한다는 영국이 속담이 나에게 꼭 맞는 말이었다. 또 약속을 미루는 희망의 속담으로 '배가 돌아오면'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조강지처라고 큰 소리 치던 초혼녀부터 이런 인생을 살았다. 주위의 형제 자매들도 같은 바람을 넣어 진딧물을 기르는 개미처럼 아내의 주위를 맴돌았다. 은행에 근무하는 동서가 아내에게 4천만원짜리 가짜 적금통장을 만들어 주면서까지 나를 속여가며 외도하는 초혼녀를 보호했던 것이다. 이 가짜 통장의 액수가 나에게 전가 된 훗날의 빚이었다. 이렇게 많은 빚을 어머니는 어린 손자를 지키며 모두 갚고, 동래의 새집까지 짓게 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또 집에 들어오면 나의 인생은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의 결혼 실패로 배를 탈때는 아내가 필요치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만약 육지에서 직장을 구하면 재혼을 생각해 보겠다고 어머님과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혼을 요청하는 쪽은 모두가 배 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어릴때 고향에서 아버지의 친구라는 관상장이가 나를 보고 너는 장가를 3번에서, 5번가야 할 관상이라고 말했다. 그 어른의 예언이 3번까지는 맞았다. 더 이상은 맞게 하지 않을 것이란 마음으로 수련공부를 하고 있다. 이 마음공부 중의 하나가 이 참회록을 쓰는 일이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신입학 무렵에 노아가 돌아왔다. 마치 북한 수용소를 탈출한 고아처럼 형편 없는 몰골의 노아를 강일 어미가 데리고 들어왔다. 절대 아이를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며, 나의 서글픈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내가 알겠다고 돌아가라고 해도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자기의 아들처럼, 노아의 수호자처럼 분수넘은 행동이 나의 화를 돋구었다. 어머니와 나의 인생을 송두리채 훔쳐다 이 여자와 그의 딸에게 효자처럼 바쳤다는 것을 훗날 알았다. 이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민 노아부부를 농락하여 나를 또 궁지에 밀어넣었고, 그 여파로 나를 지금의 독거노인으로 살게 한 것이다.

   나는 노아를 꿇어 앉히고, 용서 할테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노아는 옆에 있는 강일 어미를 믿고 있었다. 착한 노아를 배를 탄 아버지가 들어 아들을 외롭게 망쳐놓았다는 그들의 말을 믿고 있는것 같았다. 강일 어미도 보기가 딱하고 미안했던지 곁에서 건성으로라도 빌어라고 말했다. 그래도 노아는 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면서 씩씩거리며 결단코 잘못했다고 빌지 않았다. 나는 이때 까지 노아를 꾸중하거나 화를 내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노아가 새엄마와 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원하는 대로 집 한 채를 빼앗기고 두 번째의 이혼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강일어미의 세뇌를 받은 노아가 이제 집에서 겁나는 사람이 없었다. 노아는 나를 노려보며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듯이 반항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양보를 해 주었다간 노아와 나의 미래가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위엄과 공포를 주어라도, 용서를 강요하기 위해 가죽혁대를 풀어 들었다. 그래도 노아는 때려보라는 듯이 호기를 부리며 코브라처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나는 이때 아들의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가정은 파탄이 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아의 생모도, 강일 어미도, 심지어 형제와 조카자식들까지도 노아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지금도 노아의 그 주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엄포를 놓으려했던 나의 채찍이 사정없이 노아를 후려쳤다. 두 번, 세 번을 사정없이 후려치자, 벌떡 일어나 혁대를 낙아 잡고 급하게 잘못 했다고 말했다. 이성을 잃은 나는 혁대를 뽑아내어 다시 후려 치려고 하자 성열어미가 나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노아가 문을 박차고 도망을 친다. 나도 맨발로 뛰어 나가 마당에서 붙잡은 아들을 주먹다짐으로 항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일 어미는 '아이고 사람죽인다'고함을 지르며 이웃사람을 불렀다. 한 사람도 나의 완력을 말리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은 노아가 수 차례 말썽을 부려 파출소에서 신변보증을 하고 데려고 나온 문제아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이렇게 나를 동정하는 고마운 이웃이었다.

   노아도 치져 더 이상 반항하거나,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잘못했다고 힘없이 두 손을 비는 노아의 정직한 표정을 보았다. 나도 지쳐 더 이상 아이를 꾸짖지 못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와 주저 앉아 버렸다. 토네이도처럼 휘몰아 치던 나의 분노가 갈아앉듯 평온해 졌다. 노아도 그때서야 아버지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잘못했다는 생각을 가진듯 했다. 노아도 도망을 하지않고 방으로 따라 들어 왔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노아가 고통을 참느라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깨었다. 매를 많이 맞아 다친데가 생긴줄 알고 놀라 물어보았다.

   노아가 집으로 들어온 이유는 몸이 아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른편 어깨죽지에 커다란 문신을 넣었다가 후회하고 남몰래 지워보려고 생마늘접을 발랐던 것이다. 피부가 부풀면 색소를 빼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마늘접을 많이 발라 문신부분의 피부가 화상처럼 동통이 나서 큰 상처로 변해 있었다. 생명까지 위험한 짓을 한 것이다. 이렇게 아픈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렸으니 내 마음이 어떻했겠는가. 너무나 원망스럽고 원통하여 아이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의사와 약사들에게 상담을 하여 자가치료를 하면서 마늘 독기를 뽑아내는데 최선을 다했다. 정성과 사랑이 스며들었는지, 노아의 눈동자도 옛날 처럼 평온하고 다정하게 변하였다. 노아가 집에 들어온지 10여일이 지나자 상처도 잘 아물었다.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방문했더니 담임은 전학도, 복학도 할 수 없는 문제아라고 말했던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 문제아를 받아 주겠느냐고 전학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거짓말로 밥을 처먹는 담임선생의 멱살이라도 잡고 혼을 내 주고 싶었다.

   노아가 한 해 늦더라도 강일이가 다니는 도예 공고에 신입학을 해보겠다고 했다. 어차피 문제아들끼리 어울려도 고등학교는 졸업을 하겠다니 다행으로 생각했다. 나는 육상에서 호구지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사상공단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대학교에 근무하는 친구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금방 자리를 만들어 줄 듯이 아그레망이 들어 왔다는 친구말이 고마워 선물을 주기도 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학장은 나를 원하였는데 친구가 어렵게 했다는 말을 직접 들었던 것이다. 또 어떤 친구의 공장에서는 이사로 추대하여 모신다며 나의 돈을 융통해 쓰고, 돌려 주지 않아 생계마져 어렵게 하기도 했다.

  <뱃놈의 돈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속담이 나에게 해당이 되었다. 형제 친척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하물며 남이야 어련하겠는가. 육지에서 머문 시간이 상당히 길어졌다. 실속은 어려웠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휴가를 온 뱃놈이 아직도 돈이 많아 바다로 나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 저기서 매파가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잡고 다녔다. 도무지 생활고를 숨기며 허세를 부리는 것도 참 힘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재승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자주 집에 올 수 있는 다른 회사에 추천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4

   육상에서 직장을 구해보려고 애를 쓰면서 머물렀던 육지 생활은 힘든 고문(拷問)과도 같았다. 생각보다도 더 심하게 오염된 육지생활에 견디지 못하고 훨훨 먼지를 털어버리 듯 바다로 뛰쳐나나가고 싶었다. 그 전에는 외롭고, 힘들고, 괴롭다고만 생각해 왔던 선박생활이 이렇게 편안하고 즐거울 수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사형집행직전에 사면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사형수의 마음과도 같았다. 힘들고,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운 시련일 것이라고만 여겨왔던 성직자들의 수련이 참으로 행복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여장을 미처 풀기도 전에 나를 환영하며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님과 누님들은 또 재혼을 먼저 들먹였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하며 이제는 아들의 뜻에 따라서 재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노아의 의중을 들어보라고 하였다. 이때까지도 노아는 의도적으로 새엄마는 제자신의 인생을 망치려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배를 타는 나의 약점을 이용하여 새엄마를 의도적으로 괴롭혀 왔고, 노아의 주위에도 이런 편력을 지원하는 배경이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배를 완전히 내린 이후에야 재혼을 생각해보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내 뜻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머님대로, 누님과 조카들과 이웃사람들 나름대로 그들의 손가락 끝에 매달아 둔 실오라기에 걸려있는 꼭두각시처럼, 나도 모르게 그들의 조종에 놀아나고 있었다. 모두가 좋은 일이라고 하는데, 나 혼자 우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집요하고 끈질긴 교사에 감각이 무딜 정도로 지쳐버렸다. 그저 육지에 머무는 동안 즐겁게 지내다가 배를 타고 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만 했던 것이다. 행복을 설계했던 옛날의 의욕이 없어진 빈가슴에는 타락과 허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선한지 보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혼기를 놓진 아가씨들이 세 사람이나 집을 방문하고 갔다. 그러나 노아는 한사코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에 살고 있는 임점이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신뢰하는 횡천누님이 직접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전화를 받은 노아도 가보고 싶다고하였다. 병득과 임점이 오누이는 가출한 아내가 급여를 송두리째 가로채 집에는 생계비를 주지 않을 때, 노아와 어머니를 보살펴 주었고, 노아도 <병가형>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그래선지 뜻밖에 노아는 진주를 함께 가보자고 했다.

   진주 조카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처녀 쪽의 어른들이었다. 친절한 환대는 화목함이 느껴졌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나이가 열 살 정도차이라고 해서 만나보기로 했는데, 사실은 14살이나 젊은 처녀가 중학생 아들을 동반하고 맞선을 보러온 뻔뻔스런 40대를 놀려볼 생각도 했으나, 막상 만나보니 매파의 이야기보다 더 호감이 갔다고 했었다. 그리고 모든 정보를 미리 다 알고 있는 듯이 노아에게 친숙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중학을 졸업하고 말썽만 부리는 아들을 일부러 대동하고 젊은 처녀에게 새 장가를 가려는 뻔뻔한 맞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비웃음을 당할 각오는 물론, 나와의 결혼을 할 생각을 말라는 경고를 하러갔던 것이다. 하기 싫은 재혼이지만, 모처럼 누님의 체면을 생각하여 형식적 인사만 하고 돌아 올 심산이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저녁초대를 하였던 것이가. 나는 미안할 정도로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노아에게 의향을 물었더니 천연덕스럽게 그러자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예상 밖의 일이라 어머니에게 대략을 말씀 드리고 하루를 머물겠다는 전화를 걸었다. 그날 저녁 우리를 초대한 처녀의 집은 중앙시장 통 한 복판에 있었다. 첫선을 보실 때 듬직하고 진실해 보인다고 하시던 둘째 이모님의 소유라고 하였다. 집 대문 옆에 붙은 작은 점포는 막내딸이 구제품을 전문 코딩하는 가게였다. 집안이 좁아선지 잔 인정이 넘치고 상당히 화목하였다. 둘째인 당사자는 비교적 말수가 적었고 물음에는 웃음이 묻은 조용한 대답이었다.

   내가 이곳으로 새장가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주신 분은 어머님 풍모를 닮은 둘째 이모님의 나에 대한 칭찬 때문이었다. 저녁초대에는 큰언니와 그녀남편도 참석하여 좁은 방은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마치 정해진 일처럼, 신혼 첫날같이 어색함 없이 기다렸던 모임 같았다. 나는 이집 막내가 배운다는 기타를 반주하면서 노래를 돌아가며 부르게 할 정도로 스스럼이 없었다. 큰 동서될 사람은 부족한 술과 안주를 직접 사다 나르면서 마치 신혼부부 탄생을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우쭐해진 나는 어느새 익살스런 장난 끼가 발동하여 당돌한 제안을 해버렸다.「진심으로 시집 올 생각이 있다면 내일 나를 따라 부산으로 함께 내려가 어머니를 찾아 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말이 결혼의 성사는 나의 책임으로 되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노아와 나는 부득이 이 집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우리와 함께 부산으로 따라가겠다는 당사자가 약속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키가 늘씬하게 크고 목이긴 젊은 미인을 대동하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바라본 어머니의 눈빛은 체념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추천했던 처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미안하고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신 것 같았다. 어머님이 자리에 앉으시자 처녀는 조용하게 인사를 하였다.
「아무렴 한마디 언질도 없이 인사를 시켜 허락을 강요하는 무뢰가 어디 있느냐?!」하신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노아가 좋아했나 보구나!」하신다.

    그렇게 새 엄마를 받아들이지 않던 노아가 이제라도 마음을 돌렸으니 다행이란 듯 어머님은 체념을 하시고, 고모들에게 연락하여 모두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즉시 누님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저녁밥 때가 다되어서야 두 누님이 오셨다. 인사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할 선뵈러 온 처녀가 부엌에서 누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며 밥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는 듯 빈정거리는 웃음으로 상견례를 대신해 버린다.

 「아무리 스피드 시대라 하지만 이렇게 일사천리로 달리는 말을 누가 막겠느냐.」하며 두 누님도 재혼을 안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며 어머니처럼 모두 승복하고 말았다.
「작은 키에 표독스럽던 두 며느리보다 훤칠한 키에 온순하고 목이긴 미인이라서 덕성이 있을 것 같다.」하고 어머님은 칭찬을 했다. 그러나 두 누님은 투정처럼
「허우대만 보고 산답니까. 참 마음이 중하지요.」하였다. 여러 사람의 궁합을 보고난 태운 누님은 그 중에서 조금 낫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들은 애정과 믿음 없이 살면 언제나 어렵다고 하였다.」하고 말씀하시었다.

    태운 누님의 진지한 충고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를 자극하였다. 내 혼자만이라도 애정과 믿음으로 살아보리라고 결심하였다. 인사를 마친 처녀는 해운대에 두 오라버니가 살고 계신다며 그곳에 들러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다음 연락은 그녀가 먼저 하겠다고 하였다. 일주일이 좀 지난 후에 우리는 다시 만나 부산 집에서 하루를 머물며 결혼 날자를 정하고 그날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우리의 결혼일은 바로 추석 전날이었다.

   출국일자를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세 번째의 결혼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신부 쪽에서도 양 가족끼리 조용한 결혼을 하자고 하여 조용한 축배를 들고 몰래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2박3일의 경주여행은 참 행복했었다. 매사에 순응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숨기지 않는 조용한 아내가 참 믿음직스러웠다. 예전의 아집적인 여인들의 짙은 잔상과 비교가 되었다. 머리를 흔들며 부질없는 생각을 지우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첫번째의 아내는 매사에 들 익은 버찌의 붉은 거짓 웃음으로 일관 하였고, 두 번째 아내는 정직과 결벽증을 위장한 표독한 아집으로 뭉친 작은 체구의 이기적인 여인이었다. 이들이 지금의 여유롭고 너그럽게 보이는 세 번째 재혼녀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삼시세판! 이번만은 사랑과 믿음으로 아내를 보살펴 주고 싶었다. 그녀의 친정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가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처가에 봉사하겠다는 결심도 하였다. 지난날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두 처가의 잔상이 하루 아침에 이처럼 달라질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5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면 해상생활을 접을 결심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배를 타는 남편을 원했던 것이다. 남편이 배를 타면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면 여가를 이용하여 자기가 하고 싶었던 공부와 여러 가지 능력을 개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궁핍했던 가정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고 하며, 나에게 시집 올 결심을 한 이유라고 말했다. 남편이 없는 여유 있는 시간을 자신의 도야에 힘써보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야간 학교에 진학도 하고, 피아노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의 생활신조에‘시작은 언제나 빠른 것’이라고 했다. 나의 신념에 어울리는 생각이었기에 아내를 칭찬하며 다시금 새로운 계획을 세워 출국할 결심을 했다. 생활이 어렵고 좀 힘이 들더라도 기관장면허시험을 치르고 내년에 기관장으로 출국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좋은 조건의 승선요청이 때를 맞추어 전해왔다. 다음 승선 때나 선박 인수를 위해 轉船을 할 때는 기관장대리로 승진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누구나 중추절 같은 명절에 출국하고 싶은 사람이 없기에 회유하는 조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조건은 고사 하고라도 아내가 들어 알고 있는 것보다 몇 배가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한 때 기관장 대리로 승진 발령을 제안 받았으나 면장을 취득한 후에 정식으로 승선하겠다며 고사한 일이 있었다. 아무리 능력을 인정받아도 형식적 결격사유가 있는 약점 때문에 비굴해 지거나 야비한 덤터기를 쓸 공산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급료가 많은 큰 배였다.

   아내가 바라던 출국이 앞당겨졌다. 예전처럼 어머니나 아내 한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았다. 식구가 서로의 책임질 수 있도록 각자의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본인이 원하는 만큼 정하기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서로 불신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먼저 네 식구의 공동의식주 생활비를 정했다. 어머니, 노아, 아내, 나까지 합하여 네 사람의 생활비로 하였다. 어머니와 아내가 정하는 액수보다 20%를 증액하여 정하고, 그 다음은 어머니, 노아, 아내의 개별 후생 및 취미생활과 사교를 위한 용돈을 각자가 원하는 금액에 20%를 증액하여 정해주고, 급료에서 공제하고 잔액은 회사에 맡겨 은행에 적립하기로 약속하고 출국하였다.

   출국후 어언 10개월이 다되었는데도 아내나 노아로부터 한 장의 편지도 오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지만 너무 허전하였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꿈에서나 평상시에도 불안하거나 걱정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마치 도통한 사람처럼 매사에 안정이 되었다. 차라리 예전의 거짓 편지로 인하여 부질없는 욕망이나 쓸데없는 망상을 하는 일이 없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들 서너 번이나 편지를 받았는데 내 혼자만 편지 한 장 없었다. 남 보기도 민망하여 일본에 입항하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잘못된 전화번호거나 없는 전화번호니 다시 확인 하라'는 ARS 메시지만 반복되었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이곳 저곳에 편지를 보내면서 집안 형편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항해 중에도 몇 번의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접속이 되지 않았다. 롱비치의 부두에 접안하자마자마자 동전을 한 움큼 준비하고 부둣가의 공중전화부스로 뛰어 갔다. 이번에는 통화가 되었으나 남의 집이었다. 국제 전화에 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역정을 내었으나, 상대방은 사돈 남의 말 한다면서 욕지거리로 나를 몰아 부치며 두 번이나 전화를 끊어버린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십 수 년을 써온 나의 전화번호(백색전화는 사유재산)에 어떻게 남의 문패로 바꾼단 말인가 싶었다.

   나의 위치가 갑자기 짙은 안개에 속에 쌓여 버린 듯 하였다. 슬픈 고동소리를 내며 기어가듯 항진하는 휘발유탱커처럼 위험한 순간이었다. 너무 참담하여 힘이 쭉 빠져버렸다. 생각 할수록 키 크고 미련하고 싱겁고 덩치값도 못하는 미련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원망이 일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비뚤어지기 시작한 마음은 숨이 막혔고 입안은 바싹 타 버려 물을 마셔도 입술 옆으로 흘러 버리며 물맛을 느낄 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하선을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휴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동유럽조선소에서 새로운 M0선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감독과 선박 인수인계 감독경험이 많은 나를 인수 책임 감독으로 보낼 심산이 커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휴가를 반납하고 그곳으로 가게 되면 더 많은 상여급여를 받아 기관장 대우를 받는 것과 같다. 호사다마란 이런 것인가.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언제나 함께 있다. 다만 그 순서와 시차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기뻐하거나 슬퍼할 인생은 없는 것이다. 다만 평온한 마음으로 그 호사다마란 빛과 그림자라 여길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글은 과거를 형상할 뿐이다. 더러는 미래를 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은 모두가 현존하는 이성일 뿐이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agent가 다녀갔다. 그러나 나는 아예 기대를 하지도 않고, 미련도 두지 않았다. 혼자 벌렁 넘어지듯 침대에 쓰러져 나도 모르게 깊은 잠이 들었다. 저녁식사를 하라고 문을 두드리는 saloon boy의 짜증스런 목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식사시간을 마치고 외출을 하려던 boy가 식사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는 투정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입항한 후의 육지에서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 선원생활이기 때문이다.
   급하게 식당으로 뛰어 갔다. 저녁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내가 치우겠다고 말하며 외출 하라고 말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질을 부려 죄송하단다. 오히려 미안하다고 내가 사과를 해 주었다. 모두들 다투어 외출을 하고 난 배는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고드름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싸늘한 기관실을 둘러보고 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편지 한통이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통신장이 갔다 두었나보다. 편지를 보니 집에서 온 편지였다. 보낸 사람의 주소글씨와 받을 사람의 주소 글씨가 달랐다. 편지 내용은 너무나 간단했다.  내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집 전화가 갑자기 불통이 되어 전화국에 알아보니 계약자가 옮겨갔다고 하였다. 전처에게 해약금을 돌려줄 테니 전화번호를 돌려 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기어이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부득이 새 전화번호를 알려드린다는 편지였다. 너무나 다급하고 중대한 일이라 선박 주소를 알지 못해 회사를 찾아와 편지를 부탁했다고 하였다.

   내가 승선 중에 그 전화를 설치하라고 했을 때 전처의 이름으로 등록을 해두라고 했던것이다. 그것이 자기 소유라고 해지하여 국제전화까지 불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직을 위장한 표독한 여자였다. 난생 처음 써 보는 편지라고 했다. 무슨 말을 써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끝을 맺은 서너 줄의 어색한 글씨였다. 글씨는 자주 써야 맛이 난다는 말이 이것이다. 전처의 고상하고 문학으로 위장한 거짓편지 보다 더 멋있고 믿음직 스러운 마음의 편지였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 편지였다. 그래서 진실은 서로 통하게 마련인가보다. 이제 편안하게 배를 탈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역이 끝나고 출항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선장이 하선준비를 하고 기다리란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기관장을 찾아 갔다. 기관장도 고개를 저어며 아마도 선박인수 때문인 것 같다고 하였다. 가방을 챙겨 gang way를 내려왔다. 도선사가 승선 했다는 pilot 깃발이 선교에 매달려 있었다. all stand by 상태에서 gang way를 반쯤 들어 올린 상태로 agent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후에 넓고 긴 링컨콘티넨탈 승용차가 나의 앞에 섰다. 면식이 있는 일등기관사가 내리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자기하고 자리바꿈을 한다고 하였다.

   정리 정돈이 되지 않아 기관정비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배를 힘들게 정비하여 편안하고 안정되게 일 할만 하게 되자, 또 다른 배로 내어 쫓는 회사가 참으로 불만스러웠다. 일등기관사가 gang way에 뛰어 오르자 배는 기적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부두를 빠져 나갔다.
   내가 탔던 배를 내손으로 전송하는 일이 처음이다. 거대한 선체가 가만히 있는듯하다가 어느새 멀어져 조그마한 점으로 사라져 버린다. agent는 나를 태우고 LA로 돌아왔다. 말썽으로 소문난 MO(man zero)선 즉, 무인전자동화 선이다. 선장과 모든 선원은 한국 사람이다. 그러나 기관장과 조선소 측의 보증기사(guarantee engineer)는 폴란드 사람(Polish)이였다.

   5만 톤이 넘는 이배는 폴란드 그디니아 조선소에서 만들었다고 했다. 대통령을 했던 바웬사가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그 조선소 사람들이었다. 보통 배는 30인 이상의 선원이 승선하는데 자동화 선은 20인 내외의 선원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배는 그렇지 못하다. 아마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선지 그 중간의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기관부의 책임이 사실상 나에게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선장은 나를 데리고 기관장과 보증기사(전기사)에게 인사를 시키며 잘 부탁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조선소에서 선박을 인수하거나 선박을 인계해 본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사실상 조선소 측의 전기부와 기관부의 보증기사일 뿐이다. 그러므로 선박을 인수한 회사 측의 기관장이나 일등기관사의 업무지시와 협조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국선장은 이들이 영어를 잘하고 본사에 걸핏하면 선내의 정보를 왜곡하여 고자질하는 바람에 이들에게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마저 예산절약을 탐하여 내 월급보다 적은 승선 수당으로 형식적 기관장으로 겸하여 고용하면서, 한국 기관사들이 본선에 숙련될 때까지 그 기관장의 지시를 받게한 약은 수가 새배를 망쳐버리고 큰 손해를 보면서 되 팔 수밖에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런것을 소탐대실이라 한다.

   폴란드 기관장은 나에게 기관부의 모든 정비점검은 자기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전기사도 덩달아 모든 자동기기의 정비점검도 자기의 지시에 따라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의 지시에 따라 정비 점검을 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않으려고 했다.    아무런 입증도 못하면서 한국선원이 잘못해서 된 결과라는 서면보고를 해 왔던 것이다. 신조선을 인수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한국의 일등기관사가 벌써 세 번째 바뀐다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공동 report에 한국 해기사가 추풍낙엽이 되었던 것이다.

    2등기관사와 삼등기관사도 벌써 두 번째 바뀌었다고 했다. 기관조종실에는 한 시간이 멀다하고 비상 앨람이 울었다. 그 때마다 보증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 내리면 제 혼자만 가서 손을 보고 알람을 꺼주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동장치의 도면을 열어놓고 2기사와 3기사를 불러 함께 모든 센서와 연결단자의 현장 위치를 확인해가며 한달이 되지 않아 리스트를 완성하여 정기적으로 우선 순위별로 자동시스템의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항해 중에도 당직 기관사가 모든 자동기기의 오류를 파악하고 간단히 처리했던 것이다. 상당기간 폴란드 전기사와 기관장을 기관실로 불러내리는 알람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어느 날 폴란드 기관장과 보증기사가 기관실로 내려와 자동시스템에 문제가 없느냐고 묻기에 나는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그 때 프로펠러샤프트 블록 베어링 온도 알람이 울었다. 그러자 2기사가 나가 곧 정지를 시켰다. 그러자 폴란드 전기사가 왜 자기 허락도 없이 자동기기를 함부로 만지느냐고 책임을 추궁한다. 나는 전기사에게 내가 만들어 놓은 정비작업 리스트를 내어놓고 앞으로 매일 아침 8시에 기관실에 내려와 작업순서대로 예비점검과 청결 및 라인접속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선원이 아니고 보증기사라고 하면서도 도무지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당신이 조선소 보증기사라면 우리가 요구하는 하자보수는 철저하게 이행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마저 방해를 한다고 야단을 쳤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당신이 이배에 머물면서 정비한 모든 작업 내용과 교환한 부품 및 소모품 리스터를 작성하여 본사에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그렇게 하게 되면 자기는 조선소에서 파면된다고 하며 당장 하선하겠다고 말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도대체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란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들 인가 싶었다.

   이러한 지시를 하는 나의 말을 듣고 기관장이 멀뚱거리고 있다가 나의 지시를 가로막으며 그건 자기가 할 일이라고 하면서 붉은 얼굴로 그를 데리고 선장실로 올라갔다. 두어 시간 지나 선장이 나를 불렀다. 선장은 골치 아픈 듯 일등기관사가 항명 한다고 기관장이 보고서를 내겠다는데 무슨 영문인가를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면서, 이제 본선에서 이 사람들이 해온 일들을 저의 보고서와 같이 작성하여 선장님이 본사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인 선장은 그들만 믿는지 나의 보고서를 그대로 전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LA를 떠날 때부터 나는 폴란드 기관장의 실력을 의심했다. 슈퍼차자의 청소 때문이었다. 과열된 상태에서 1~2분의 냉수급랭으로 gas turbine과 blower의 청소는 충분하다. 그런데 기관장은 한 시간 이상 연속 급수를 하여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청소를 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만 하고 나는 원칙대로 해버렸다. 기관장은 노발대발 하며 항명 보고서를 작성하겠다고 하였다. 인간의 천성인 거짓말을 누군들 말릴 수가 있겠는가.

    나는 많은 물을 오랫동안 넣어면 turbine사이의 throttle 마찰에 의한 pitting으로 gas turbine이나 blower가 손상하고, 과중한 원심력으로 bearing과 shaft gas seal 등이 손상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도 경력있는 기관장이라며 그정도는 기초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기초도 제대로 못하면서 의도적으로 안전항해를 방해한다고 몰아 세웠다. 나의 거센 항변에 시뻘겋게 질린 얼굴로 또 선장실로 뛰어갔다. 이번에는 선장이 부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에게 같은 하극상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항해 스케줄이 잡혔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뉴욕으로 간다. 우리 배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 할 수 있는 maximum선폭의 배다. 그래서 장시간 엔진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종전처럼 파나마 운하의 첫 갑문입구에서 A bunker로 완전히 바꾸어지도록 하였다. A bunker를 다소 소비하더라도 안전항해의 완수가 제일 덕목이라는 말이 옳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관장은 이때부터 A bunker로 교환하라고 하였다. 아무리 전자동시스템이라고 하지만 불면증에 시달리도록 오류가 잦은 자동장치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사고가 날 경우 한국해기사의 무능 때문이라고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거짓 report를 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항명이라며 다음 항구에서 하선을 시키겠다고 얼음장을 놓았다. 나는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기관장을 충동질했다. 파나마 운하를 무사히 통과하자 한국선장은 폴란드 기관장이 만들어준 원문대로 세 번의 항명사실을 일본 본사에 팩스로 보냈던 것이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본사의 공무감독이 나의 방으로 찾아왔다. 물어볼 말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사관식당으로 들어갔다. 책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앉았다. 비행기티켓 한 장을 자기 앞에 내 보란 듯이 내어놓고 영어로 신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영어로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나의 영어 설명이 길어선지 해득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공무감독은 멋적게 웃으며 일본말로 물어도 되겠느냐고 하기에 좋을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일본말로 내용을 반복하여 간략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나역시 이렇게 무책임한 기관장과는 대서양을 함께 건너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공무감독은 잘 알았다고 말하고 나가려는 것을 잠깐 기다라고 한 후, 나는 그동안 본선에서 점검한 자동장치 정비기록과 교체해야 할 불량 senser목록을 넘겨주면서 긴급한 부품이라며 청구서까지 함께 주었다.

   나는 공무감독과 기관 조종실을 둘러보면서 자동화된 선박일수록 오류는 치명적 사고원인이므로 완벽한 오류의 제거를 위한 정비점검에는 더 많은 기능인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넘기지 못한 상태에서 선원을 무작정 줄이는 것은 위험 천만 이라고 말했다. 본선의 상황이 이처럼 참으로 위험한 상태라고 설명해주었다.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공무감독은 마치 이배가 보기도 싫은 듯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떠나 버렸다.

   뉴욕에 입항한지 일주일이 넘었다. central park등 여러 곳을 구경하고 괴물 같은 지하전차를 타고 뉴욕을 일주하기도 하였다. 뉴욕은「오 헨리의 뉴욕인」처럼 정말 미국의 다른 도시와는 스케일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치 세계의 대도시를 이곳에 모아둔 곳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배가 팔렸다는 소문이 들렸다. 얼마 후 본사로부터 그리스에서 선박을 인계한다고 팩스가 왔다. 출항 준비를 하겠다고 기관장 방에 들렀더니 그는 가방을 챙기다 말고 함께 있는 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한다. 하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서로 다툰정이 들었나 보다.

   공무감독과 agent의 승용차가 함께 도착하였다. 공무감독은 한국 선장과 기관장을 대동하고 왔다. 선장은 내가 삼등기관사로 일할 때 모셨던 분이고, 기관장은 해군 출신이었다. 공무감독은 지난번 내가 청구한 부품은 유럽규격이므로 유럽현지에서 공급해 준다며 인계 시 잘 설명하여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화물을 실지 않고 공선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인계를 위한 단장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갑판부는 선창과 갑판상의 페인팅 작업이 주었고, 기관부는 자동시스템의 오류를 완벽히 제거 하는 정비작업이었다.

   그리스에 도착하여 선박을 인계해 주는데도 약 1주일정도가 걸렸다. 문명의 고도를 관광하는 것도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인수 인계하는 양쪽회사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아가며 인계인수를 꼼꼼하게 챙겨주는 보람은 양 쪽 회사의 기쁨과 한국해원의 신뢰로 되돌아 왔다. 심지어 배를 인수하는 회사측의 독일인 기관장은 폴란드 그디니아 조선소에서 만든 자동화선을 많이 보았지만, 한국 선원처럼 이렇게 완벽하게 고쳐쓰는 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번에 자기 회사가 봉을 잡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선장은 나를 보고 3기사 때 고집이 너무 세다고 강제 하선을 시키려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유능해질 수가 있는가하고 웃었다. 저도 그때 그런 기관장 밑에서는 일하기가 싫었다고 웃었다. 사람이 정직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거나, 남의 말을 들어줄 때만이 상대방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기의 생각을 앞세운 채 남의 말이나 요구를 듣기 때문에 혜안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아테네에서 이스탄불 델리 타이베이 도쿄 오사카를 거쳐 부산으로 오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간은 참 길고 지겹다. 숨 쉬기도 힘들게 구속하는 비행기 타기가 싫어서도 해외취업을 그만두고 싶어진다. 뱃놈이 배불러 여유가 생겼을 때마다 입술에 바르는 말이다.
  불혹이 넘도록 열심히 살았다는 인생이 이 체 바퀴를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다람쥐 꼴이다. 배타기 싫어 머뭇거리는 것도, 생계가 어려워 배를 서둘러 탈 때도 모두 처자식들을 위한 것이란 자신을 속이는 흰소리다. 가족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은 내의 몫이니, 결국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부산에 도착하자 여행에 지친 피로가 사라진다. 부푼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도 어머니와 아내는 반가움이 없었다. 노아 때문에 또 특별휴가를 얻어 온 것으로 알고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노아가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노아의 위협에 각자의 용돈을 빼앗기고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웃 박 화백에게 이 사실을 회사에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제발 육지에서 함께 살자고 하였다. 나는 육지에서 살아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난 첫 휴가라 진주 처가를 방문하였다. 진양호와 남강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었다. 포도와 딸기, 통닭요리까지 모두 좋았다. 내가 살고 싶은 아담한 농장도 눈에 띄었다. 네덜란드의 튤립정원을 만들어 포도와 딸기를 맛볼 수 있는 관광 사유공원을 만들어 개방하면 멋진 여생이 될 것 같았다. 마침 팔려고 내 놓은 것이라고 동서가 알려주었다. 1500평의 네모난 땅 한 가운데 두 가옥과 창고 가 있었고 농장주변으로 축사와 온실이 경계를 이루었다. 바둑판같은 넓은 묘판에는 남강 심층수를 퍼 올리는 관개시설도 되어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남강 물을 길러다 먹었다. 이 농장을 구입한 때는 1982년 9월경이었고 이곳으로 이사를 한 때는 1983년 4월이었다.

   어머니는 진주로 오시지 않겠다고 고집하셨다. 아마도 태운 누님을 믿고 계신 듯했다. 그러나 태운누님은 어머님을 모시려 하지 않았다. 누님들도 배를 그만 두더라도 부산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모두 노아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나는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해상생활을 포기하고, 노아가 바라는 대로 독립환경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노아도 어머님도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결심 하신 듯 서울 형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셨다. 이를 끝까지 말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 나의 불효였다.

  노아가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면 우리집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철부지가 아닌 청년이 된 아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네 식구는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이렇게 독립하여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노아의 뜻대로 부산대학교 의대생들이 하숙하는 부민동 하숙전문집에 방을 얻어주고, 이웃도 형제 친척도 몰래 부산을 떠나 버렸다. 그 해 가을 10월 어느 날 어린 딸 수지를 안고 있는데, 회사 감독이 진주까지 나를 찾아왔다. 수 개월이나 수배를 하여 겨우 찾았다고 말했다. 승선 위약금을 퇴직금과 상여금에서 공제한 경비 내역과 잔액을 넘겨주며 배를 탈 생각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명함을 남기고 갔다.

 

6

    88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바덴바덴에서 확정되자 선진국이나 된 것 처럼 국민들은 의욕적으로 정부의 정책을 믿어주기 시작하였다. 20년여의 해상 생활에서 선진국 공무원을 보아왔던 터라, 우리의 공무원도 이제는 예전과 달라진 줄 믿었다. 혁명군으로 제대를 한 후 도청에서 기능직 공무원을 했던(1964~7년) 그 때의 생각을 해 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아마도 이 또한  힘든 농장에서 벗어나려는 아내와 장모의 입김이 또 작용했다. 선진국물 맛을 본 어슬픈 개명이 착각한 자가당착이니 남을 탓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지금도 <KBS 6시 55분 우리사는세상>처럼 한국 공무원의 말을 믿는 것은 자멸하는 일이란 사실이다.

 진주로 이사한 그해 여름에 우리의 결혼을 중매한 질녀 임점이가 방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정직하고 말이 없던 임점이가 시집을 잘 못가서 호소하는 모양이 누님을 슬프게 하는 것 같았다. 사기성이 많은 남편의 꼭두각시노릇을 할 것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탁이라기 보다 자문형식으로 경영이 여려운 주점을 인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얻은 부채로 어려운 형편이라, 부산 집이 팔리면 생각을 해 보자고 달래어 보냈다. 그 뒤로 질녀는 잦은 방문을 하여 집이 팔린 여부를 확인했다. 어릴때부터 한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외삼촌의 근성을 잘 알고 있었다.

  집이 팔리자 나는 동서가 앙탈을 부리며 독촉하는 빚을 갚아주고, 남은 돈으로 봉곡동 대웅클럽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인수를 해 주었던 것이다. 음악을 잘 하기 때문에 클럽을 경영하는데 이로움이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임점이 부부가 나에게 그렇게 덤터기를 쒸울 줄은 정말 몰랐다. 상거래에는 형제 부모가 따로 없다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것 같았다. 인수를 마치고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말썽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창고 같은 가건물이었다. 건물 주인은 이것을 헐어 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어 극장을 만든다고 하였다. 본전 생각이 간절했다. 큰집을 살수 있는 1천만원을 송두리채 날리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이듬해 새 건물을 다시 임대하여 '대웅 나이트'란 이름으로 신장개업을 하였다. 유흥주점이란 불량배들이 들끓기 마련이다. 젊은 시절 나는 격투기의 운동을 하면서 조금 이름이 알려진 것이 이 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대위에서 음악 반주를 해주면서 얻는 <오부빵>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월세를 감당하였고, 개업당시 빌린 장모님의 전세값도, 부산 누님의 빚도 일년이 되어 모두 갚게 되었다. 신장개업을 위해 장모님의 전세금으로 합가를 하고 딸 수지를 장모님에게 맡곁다. 야간 업소를 운영하면서 낮에 농장일을 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그러나 영농자본이 풍부해지자 나는 농장 시설을 더욱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영농으로 지상천국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였다.

   한 해가 지나자 농장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화원으로 변해 갔다.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전원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야간 업소는 그런대로 발전 현상이 유지되었고, 노아도 경성대 사진예술학과에 입학하여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듯 하였다. 복덩이 같이 예쁜 딸을 이곳에서 얻었기에 땅과 남강을 기념하여 이름을 수지(水地)라고 지었다.
   행복이 가득한 나의 농장에 진주시 건설과 행정계장 K란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주면서 나를 찾아온 동향인이 있었다. 88올림픽 상화 봉송로로 지정이 되어 도로 주변을 공원화 한다며, 지상물과 토지를 현시세로 일괄 보상하게 된다고 하여 선매합의를 하러 왔던 것이다. 이때가 1984년 5월경이었다.

   이들은 농장매입실가를 물어 일일이 기록하고 농장의 환경을 며칠을 두고 주기적으로 조사를 한 후 1미터 이상의 큰 나무와 주택 및 영농시설물을 자진 철거해주면 이식비와 철거비용을 지원해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사된 토지와 지장물은 실질감정에 따라 1년안에 일괄 보상해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은 일괄보상을 받은 후 철거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나는 공무원을 믿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자진 철거를 결심하였다. 그리고 합의서에 서명하고 계좌에 지원금이 입금되는 즉시 이식과 지장물을 철거해 주었던 것이다. 이웃은 나를 공무원 앞잽이라고 험담 하며 기어이 일괄 보상을 받은 후 철거를 했다.

   나는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현명한 그 이웃을 칭찬하고 있다. 어머님이 나와 함께 계셨더라면 아내와 장모와 달리, 공무원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은 왜정 때부터 공무원의 말을 믿지 않는 생활을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 이듬해가 되자 내년 86년으로 또 지연되었다. 이웃은 모두 일괄보상을 받아 넓은 곳으로 확장 이전을 하였다. 그러나 자진 철거로 황폐해 버린 나의 토지와 지장물 일괄 보상은 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상 가상으로 노아마져 대학 등록금을 받아 탕진하고 등록을 하지 않아, 대학당국으로 부터 퇴학 통보가 왔다. 나는 학교로 달려가 부총장(일족조카 종석)을 찾아가 재 등록을 할테니 퇴학을 보류해 달라고 하였으나 받아 주지 않았다. 노아는 그때부터 옛날의 부랑아로 돌아 가 버렸다. 미국에서 유덕조카사위가 애원했던 카메라셋트를 주지 않고 아껴온 것을 대학신문기자를 잘 해보려면 필요하다고 해서 노아에게 주었는데 이것 마져 팔아 먹고 방탕했던 것이다.
   그기에다 다소 여유있던 자만이 입대아파트로 이사를 옮겨주고 농장을 자철거해 준 나의 과오가 자가당착이었던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함께 진주로 와주셨다면, 처가 식구들의 편력이 없는 이성으로 매사에 신중했을 것이다. 이를 보고 <내눈에 콩깍지란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어머니도 나도 시련을 자초했던 것이 태초의 잘못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도 부모님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설득하지 못한 자식들의 변명은 스스로 불효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불효한 참회의 결과가 지금의 서러운 노년을 맞이한 꼴이나, 그나마 다소 빨리 깨달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지금의 노년을 지키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