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파 탄(1)

 

     요꼬하마 항에서 뉴욕으로 떠날 채비가 다되었을 무렵 agent가 숨을 몰아쉬며 본선의  gang way를 뛰어올라 온다. 이 사람은 입출항 때마다 항상 제일 먼저 본선을 방문하여 우리들이 기다리는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다. 오늘도 예외 없이 그를 반기며 mail? 하고 갑판원이 고함을 친다. 그러면 그는 OK!를 연발하며 선장실로 뛰어간다. 그는 항상 바쁘다. 그리고 항상 바쁜 듯이 설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선박을 돌며 그들의 요구조건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중압감 때문이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를 가도 이런 사람들이 올라오는 모습은 하나같이 같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목격하면 항상 즐겁고 기뻐했던 나는 오늘따라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통신장이 각 방으로 전해주기도 전에 나는 그의 방을 방문했으나 그도 없었다.

 선장실로 바로 가 보려고 하는데 all standby station! 방송이 경적과 함께 울려 퍼진다. 도선사의 승선 깃발이 fore mast에 걸려 있었다. 바쁘게 기관실로 내려와 출항준비가 완료된 조종실에 앉았다. ‘아, 이번에는 편지 한 장 못 받아보고 일본을 떠나는가!’하며 바쁜 일정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한다.

  도선사(배에서는‘빠이라’라 한다)가 내리고 공해상으로 빠져 나오자, 모두들 정신없이 분주했던 도쿄 체류기간의 잔상을 씻어버리고 앞으로 25여일의 장기 항해준비를 위해 차분하게 각자의 일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나에게는 2항차나 아내로부터 편지 한 장 오지 않았다. 불안하고 답답하여 동전을 한 움큼 바꿔들고 조용한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아도 전화 받는 사람이 없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지난번 항차에 겨우 받은 한 장의 편지에, 누님들이 자주 찾아와 금전적으로 너무 자기를 괴롭힌다며 저축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편지도 두 항차를 넘겨 가까스로 나의 뒤를 따라 다니다 싱가포르 해협을 지날 때 ‘빠이라’가 가져다준 것을 받아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의 편지는 없었다. 참으로 불안하고 괴로웠다. 뒤 늦은 답장이나마 부지런히 고운 글로 써서 보고 싶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붙여 보내주었던 것이다.

  선원들이 목숨을 걸고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악전고투를 참아내는 것도, 항상 외롭고 힘들어도 즐겁고 용감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가장으로서 충실한 사명감을 지켜준다는 가족들의 칭찬과 감사하는 마음의 편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선원에게 치명적인 것은 가정의 불안과 가족친지간의 불화다. 그렇게 훌륭했던 어느 선장이 행해 중 자살을 하였고, 어느 통신장은 정신착란증에 걸려 본선과 본사간의 통신두절이 생겨 항진명령은 물론, 기상예보마저 받을 수 없어 눈뜬 봉사처럼 제도지에 그어놓은 연필 선을 따라 운명에 맡기는 무작정 항해를 할 때도 더러 있었다.

  어떤 때는 우울증 환자가 발생하여 모든 선원들을 긴장하게 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실과 갑판 위를 걸어 다니는 정신환자가 발생하여 전 선원을 시달리게 하는 등 그 모든 동기가 바로 가정으로부터 전해온 한 장의 편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지는 선원들을 안정된 마음으로 충실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기에 본사에서는 우편물 송달을 대리점의 최운선 업무로 취급하게 한다.

  심지어 어느 배은 항구에 접안한 후에 편지를 가져오지 않는 agent를 배에 오르지 못하게 gang way를 내려주지 않는 선원도 있다. 특히 미국 국적선이 더욱 그렇다고 한다.

 바다의 날자는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 지나는 것 같다. 벌서 일주일을 넘어 항해를 계속 했는지 하루가 겹치는 date line(날자 변경선)을 지났다. 간밤에 불길한 느낌을 주는 꿈이 너무나 생생했다.  아내가 불륜을 하고서도 항변하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식은땀을 닦고 정신을 차려 시게를 보았다. 아직도 당직 시간은 좀 더 남았다. 조용한 밤바다의 잔디밭 위에 굴렁쇠를 굴리듯 공공거리며 들여오는 main engine의 회전소리가 작은 진동에 묻혀 침대의 머리맡에 조용히 진동한다.

  침대 머리에 놓아둔 라디오를 켠다. 단파로 맞춰둔 LA의 한인방송 ‘자유의 소리’에서 장 현의 노래가 차분하게 갈아 앉은 음성으로 라틴계열의 보사노바 리듬에 실려 ‘나는 너를’이라는 노래가 가슴이 저리도록 깊이 파고든다.

‘시냇물 흘러서 가면 넓은 바닷물이 되겠지…’

아, 불행의 씨앗은 이렇게 움이 트는 것이로구나! 하는 직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려움을 헤치고 의욕적으로 살아왔던 수년전의 일이 편지속의 영상처럼 파노라마 진다. 부친께서 환원하시자 어머님을 모시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우리 집은 생활이 안정되었고 상당히 윤택해졌다. 어머님이 계시는 동안 집에는 항상 누님과 친지들이 어머니를 찾아와 문안을 하는 바람에 아내는 항상 분주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편지에 자주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아내가 셋째 처제가 집에 드나들면서 어머니의 눈치가 보기가 싫어지자, 어머님을 형님 댁으로 보낼 궁리를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서울에 계신 형님은 고급공직생활을 하면서도 4째 태운누님이 사둔 집을 점유하고 여유 있게 살다가, 누님이 막상 집을 팔고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안일했던 형님은 급격하게 생활이 옹색하게 되어버렸다.

  넓은 집에서 여유 있게 살 때는 어머님 모시기를 그렇게 기피하던 형님내외가, 옹색한 집에서 살기가 힘들 때 어머님을 모시겠다고 나선 것은 나로부터 생활지원을 받아보려는 형수의 얕은 심사가 있었고, 여기에 아내의 시어머니 기피증이 야합되어 어머님을 기어이 서울로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를 곁에서 모시며 잘 지내던 생질녀 유덕이도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위생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면서도 기숙사로 들어갔고, 이제 6~7살 들어선 노아는 동네 아이들과 철없이 놀기가 바빴던 때였다. 어머니 없는 집에는 친척도 누님들 까지도 오지 않는 조용한 집이 되었고, 한가한 아내는 처제와 어울려 여가를 즐기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나의 가정파탄이 시작된 동기였다.


  미국 서부해안의 롱비치를 거쳐 파나마운하를 통과하여 뉴욕 항에 도착하자마자 선장은 나를 불렀다. 본사에서 특별휴가 명령이 내렸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덕이가 보낸 편지를 전해 주었다.

  편지에는 숙모가 집을 버린 지가 오래 되었다. 노아의 장래를 위해서도 삼촌이 선원생활을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는 사연과 삼촌의 급여를 본인에게 지급해주도록 회사에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회사는 비밀조회를 하여 부득이 특별휴가조치를 내리고 집안정리가 완결될 때까지(약6개월)특별유급휴가를 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표가 벌써 준비되어 있었고, 새로 승선할 1기사를  실고 온 agent의 승용차는 내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나의 건투를 빌며 용기를 가지라고 위로해주면서 선장과 기관장 두 사람은 이제야 살겠다고 한숨을 쉰다. 긴 25일간의 항해 중 일기사의 비밀을 지키느라 무진장 애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서너 장의 티켓이 합쳐진 두툼한 비행기 표를 넘겨보니, 뉴욕-시카고-알라스카-도교-오사카-부산의 장장17시간이 넘는 비행 이었다. 지루하고 불안한 비행은 가슴을 할퀴는 고문 같았다. 고급사관이 되어 이제 날개를 펴고 용트림하며 날아오르려고 하는 순간에 나의 발목하나가 덫에 결려버린 꼴이 되었다.

  노란 하늘을 바라보며 집에 돌아온 시간은 점심시간이 좀 지난 때였다. 집에는 서울에서 내려오신 어머님 혼자 계셨다. 건강하셨던 어머님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많아졌다. 행여 자식이 실망하여 큰 자멸감이나 절망으로 사고를 내지 않을까 안절부절 하시는 것 같았다.

  마치 어머니가 끝까지 집을 지켜주시지 못하고 며느리에 쫓겨 서울로 올라가버린 것이 당신의 죄인 것처럼 자학하고 계셨다.

 「어? 어머니가 계시네…」

 「그래, 어서 오이라」

 「서울에서 언제 오셨어요?」

 「좀 됐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웃었다. 그런 나의 웃음을 보고

 「니가 웃을 기라고는 상상도 안했다.」

 「노아는 요?」

 「아침부터 나갔는데 아직 안 온다.」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한 달이 다된다. 지난달에 월급이 통장에 안 들어 왔다고 회사에 따지러 갔다가 챙피를 당하고 와서 나한테 앙성을 하더라」

  노아가 숨을 할딱거리며 뛰어 들어오며 아부지! 하고 부른다. 꾀죄죄하게 마른데다 목욕을 안해선지 목들미에 흐른 땀이 흰 줄을 여러 개 그었다. 그러게 포동포동하게 건강했던 아이가 거지같았다.

 「이리 오너라.」

 「엄마 보고 싶재?」

 「…」

 「와 대답이 없노?」

 「…」

  노아는 할머니만 멍청히 처다 본다. 어머니가 <라면 끼리 주까?> 하니 그때서야 좋아하면서 나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제가 가지고 놀든 장남감만 만지면서 장남감과 이야기를 하듯 중얼 그린다. 어머니 없이 외롭게 혼자 놀았던 모습이 역력하게 보였다. 나의 가슴이 찡하게 북받쳐 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연실이는 어디 갔어요?」

 「지난달에 방직공장에서 일한다고 나갔다. 기숙사에서 잔다고 하더라. 니가 오면 연락 좀 해주라 카더라.」

 「왜요?」

 「월급 밀린 거 받을 기라고」

 「연실이도 집을 나간 뒤에 병득이와 임점이가 노아를 데리고 있었다.」

 「그래 애를 두고 보고 싶지도 않은지 독한 년!」

  어머님은 나의 눈치를 보며 작은 소리로 집을 나간 아내를 원망한다. 아직도 나는 아내가 불륜으로 가정이 파탄되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본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다.

  다음날 막내 누님이 오셨다. 누님도 그동안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단다. 너의 처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아내가 편지에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누님들이 나를 생각하여 좀 지켜주시지 않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누님은 잠자코 있다가 조용한 말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 때문에 네 처가 집을 나간 것처럼 들리는 구나」하시며

 「어머니, 갈랍니다. 이집에 다시 오기 힘들 것 같네요」하며 나가신다. 그리고 얼마 후 이웃에 사시던 이모님이 찾아와 한마디 위로도 없이 그동안의 자기 이야기만 해 주신다.  아내가 이모님으로부터 급전을 상당히 많이 빌려갔는데 그때마다 집을 살려고 하는데 계약금부족해서, 중도금이 부족하다면서 이야기를 하기에, 빌려갈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차용증 없이 무조건 빌려주며 격려를 했단다. 그 돈은 작은 집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지금 와서 이자는 그만 두더라도 원전은 당장 갚아달라고 조르신다. 옆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님은 자네는 항상 남을 도와준답시고 저지르는 일이 모두가 이 모양이라며, 이번은 모두 포기하고 마음이나 곱게 다스려 머리를 깎고 절에나 들어가라고 야단을 치신다. 이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셨다. 너무나 정다웠던 형제들끼리 저토록 마음의 상처를 남게 한 것이다.

  다음날 이종사촌 큰형님이 직접 찾아와 이모님의 돈을 갚아주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우격다짐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 너무 심했다. 나도 참다못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동생이 이지경이 되어 있는데 제일 큰형이라면 말이라도 위로를 먼저하고 형편이 되거든 천천히 갚아 달라고 사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인데, 돈은 빌려준 사람한테서 받으시오! 나는 그 돈을 빌린 일도 알지 못합니다.」

  이종사촌 큰형님은 온몸을 떨며 네가 그렇게 나오면 법적으로 부부공모사기죄로 고발을 하겠다며 노발대발 하고 나가신다. 싸우는 소리가 동네에 퍼지자 신호라도 한 것처럼 이웃의 이집 저집에서 나를 찾아와 차용증을 내어 보이며 예전의 다정했던 이야기를 곁들이며 참 안 됐다고 위로한다. 배타는 사람 중에 한 둘이 있을법한 일이 정직하고 경위 바른 노아아빠에게 생길 줄을 꿈에도 몰랐다며, 돈은 천천히 갚아도 좋다며 차용증을 거두어 나에게 돌려준다. 영수증을 찢어버리고 안 갚아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느냐고 했더니, 어차피 노아아버지 한 테서  받아낼 돈이 아니라며, 옛정이나 잊지 말자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옮기도록 권한다.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노는 노아를 위해서도 자기 아이들을 위해서도 서로 좋을 것 같다고 이구동성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이웃이었다. 이웃사촌이라더니 진짜 이종사촌 큰 형님보다 이모님보다 더 고마웠다.

  

  집에 온지 보름이 다 되었으나 아내는 주위를 숨어 맴돌며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엄격하고 성질이 불같은 나를 만나면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죽일 것이라고 넘겨짚었거나 처갓집 사람들의 잔꾀였다는 후문이다. 신문광고라도 내어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그런 조건부 광고를 기다렸던 것 같다.

 회사에 들러 지난달의 급여와 휴가보너스를 받았다. 회사의 선원감독관이 아내를 만나 합의를 보았는지 묻기에 만나지도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을 많이 당해본 감독관은 상당히 악성이라는 표정을 짓는 것 같이 직감되었다. 감독은 휴가기간은 넉넉하니 서둘지 말고 천천히 이성으로 냉정하게 풀어야 한다고 말해주면서, 선장출신의 감독관은 한번 불륜을 저지른 선원 아내가 재기하여 가정을 정상적으로 이루어낸 사례는 한 번도 없다며,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가혹한 충고를 해 주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었으나 주위의 친구나 일부 가족은 아이를 봐서라도 재결합을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서울 형님 내외가 그랬다. 형수와 아내의 밀약이 있었다는 것도 뒤에 알았다.

   처음으로 많은 봉급을 탄 나는 노아를 데리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노아야, 아빠랑 목욕하고 먹고 싶은 것 사줄까?」

「응, 짜장면!」

「그래 가자」

노아를 데리고 구덕탕으로 갔다. 서대신동에서 제일 크고 시설이 좋은 구덕탕을 판다고 내어놓은 값이 약 600만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지난번 출국할 때 아내가 나에게 저축해둔 돈이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던 제일은행 적금통장에 500여 만 원이 저축되어 있었고, 일 년만 더 고생하면 구덕탕도 살 수 있을 것이란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통장을 찾을 수가 없어 지금도 설마하고 아내를 기다렸던 것이다.

「노아야 양궁은 왜 안 쏘냐?」

「엄마가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고 해서」

「너 친구 많나?」

「응, 그런데 나 혼자 놀아.」

「왜 혼자 노는데?」

「전에는 나도 과자를 샀는데 요새는 안사」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노아의 그 팔팔 했던 기가 꺾여 있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아내를 용서를 할 수가 없다는 결심이 더욱 짙어 갔다. 신뢰할 수 없는 부부간은 남보다 못하다는 형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짜장면 두 개요」

어린 노아가 나보다 더 빨리 짜짱면을 먹어치우고 나의 그릇을 넘본다.

조금도 식탐이 없든 노아가 이토록 허기를 이기지 못하는 거지아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불쌍하였다. 슬픈 나는 그만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더 먹고 싶냐? 한 그릇 더 시켜 줄까?」했더니

 「응, 더 먹고 싶어」한다

 「진짜 더 먹을 수 있어?」다짐해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안 시켜 줄 수가 없다. 한 그릇을 더 먹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시장 통을 걸어 나오는데 다른 중국집 윈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만두와 튀김 만두를 보고 저것도 사달란다. 할 수없이 들어가 찐만두와 튀김 만두 두 접시를 시켜 한 접시는 싸가지고 할머니와 같이 먹기로 하였다.

  노아는 식탁에 바싹 다가앉아 만두접시를 제 앞으로 잡아당긴다. 나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배탈 나면 큰일이라며 천천히 욕심내지 말고 네가 다 먹어라 했다.

너무나 잘 먹는 아이를 보고 좋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찐만두 한 접시를 혼자 다 먹고도 아쉬운 눈치다. 나는 걱정이 되어 나머지는 집에서 할머니와 같이 먹으라고 달랬다. 집에 와서도 튀김 만두접시에서 노아의 눈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질기고 기름 냄새가 싫다며 먹고 싶지 않다고 노아와 너나 먹으라고 양보를 하신다. 부득이 노아를 위해서 내가 만두를 몇 개라도 줄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두 두 개를 먹었는데 노아가 접시를 제 앞으로 당겨 갔다. 아버지는 먹지 말라는 신호다. 노아가 기어이 다 먹어 치우고, 입맛을 다시며 뒤뚱 뒤뚱 오리걸음을 하는 모습은 마치 굶은 어린 악귀 같아보였다. 좀 불안하였으나 아무 탈 없이 잘 자는 듯 했다. 자정이 넘자 어린 노아는 별안간 배를 움켜쥐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파 울었다. 쥐죽은 듯 조용한 밤에 노아를 업고 이웃 병원에 들렀으나 의사가 없다. 서 너 곳을 찾아다니다가 파란녹색 십자가 보이는 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더니 마침 의사가 있었다. 아이가 탈진하여 죽은 듯이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왼 일인가 묻기에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큰일 날 뻔 했다며 아이를 엎드리게 하여 물에서 건져낸 아이처럼 목구멍에 손을 넣어 얼마간의 음식을 토하게 하고 소화제를 먹인 후 혈관 주사를 놓아 아이를 편안히 잠들게 한 후에 등에 업혀 주면서 사랑도 지나치면 이렇게 된단다. 새벽바람이 차디찬 이슬을 나의 양 볼에 뿌려주는 것 같이 시원했다. 나의 등에서 색색이며 편안히 잠든 노아의 체온이 나의 등을 따듯하게 해 주었다. 삼경의 이슬을 맞으며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얼굴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뜻밖에 서울 형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들리는 소문에 행패만 부리지 않으면 만나 주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해 준다. 행패부릴 것도 없고, 하루 빨리 조용히 결말을 짓고 남을 위해서라도 다시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더니 일주일 쯤 후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후 한 시경 서구청 앞 OO대서소에서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 그날도 아내는 막내처제와 장인과 함께 왔었다. 벌써 이혼 서류를 만들어 준비해가지고 있었다. 말로는 용서만 해주면 모든 빚과 통장의 돈을 집을 팔아서라도 되갚아 주겠다고 장인은 말하였다. 나의 인감만 떼 주면 자네가 출국한 후에라도 ‘기장원래’ 집을 팔아서 적금통장의 돈과 남의 빚을 갚아주겠다며 간절하게 용서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혼 서류가 대서방 서사에 의하여 구청에 접수 되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합의이혼 한다는 것이다. 서러간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대서방 서사를 제삼자 증인을 서게 한 것이다. 달포를 그렇게 힘들게 하드니 결국은 무책임하게 도망갈 궁리를 해두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 이었다.

  합의 이혼을 한 다음날 나는 회사에 찾아가 정리가 끝났다고 신고를 하였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당장 출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어머니에게 이제 곧 출국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집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 또 목숨을 걸고 배를 타려고 하느냐고 한사코 말리신다. 그래도 어차피 남의 빚은 갚아주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며 1년만 잘 참아 달라고 어머님께 빌었다. 그리고  장인이 요구한 나의 인감증명서를 어머니에게 맡기며 마음대로 처리 하시라고 하였다.

  어느새 일 년이 지나 정기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동안 모든 빚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갚아주시고도 작은 집을 살만큼 많은 저축을 하여두시었다. 그리고 나 역시 한 푼이라도 아껴 가지고 온 선상지급금을 합하니 부자 같았다. 노아는 멋지게 커서 부민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똑똑하여 반장을 한단다. 방과 후에는 어떤 놈들이 노아를 납치하려고 교문에서 기다린다는 소리를 듣고 담장을 넘어 내리다 발목을 삐어 절룩거리며 집으로 왔다고 했다. 아마 옛날 외삼촌들이거나 제어미가 그런 짓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장인은 내가 출국한 후에 이틀이 멀다하고 어머님께 무릎을 꿇고 빌기에 인감증명서를 내어 주었더니 그 후로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에 500만원의 적립금 통장도 제일은행에 근무했던 둘째 동서가 가짜로 만들어 나에게 보여준 것이라 했다. 그 당시 동서에게 고맙다고 내가 아끼던 금시계까지 선물 했을 때, 극구 사양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장인은 인감을 가지고 나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기장원래의 여인숙을 자기 이름으로 바꾸고 난 뒤 그들의 소식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