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향우학원과 나

                                                                    이 진 원

 

    병장계급장을 달면서 만기제대일자를 확연하게 알게 되었다. 내년(1962. 2. 28일자 제대특명)에 제대를 한다. 막상 제대특명을 받게 되니 직장걱정이 앞선다. 소속감을 잃은 듯 소외감을 감출수가 없다. 나의 앞일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외롭고 막막하다. 행병대의 고된 훈련을 이겨낼 때는 무엇을 하던 고향의 노부모님의 생계를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제대를 앞두고, 밭 때기 하나 없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일을 하여 생계를 꾸릴 수도 없고, 직장 구하기가 더욱 힘든 고향 하동이다.

  나보다 1년을 먼저 제대한 형님은 서울에서 직장을 구한 후 부모님을 모시고 오겠다는 핑계로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직장을 구한 후에도 부모님을 모시려고 노력을 한 형님의 모습을 본 기억은 전혀 없었다. 이것이 공직자의 전형적 모습이다.

  나 역시 제대특명을 받았을 때에는 군속에 머물거나, 육군보병학교에 지원하여 직업군인으로 남을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형님은 부모님을 걱정하시며 무조건 나를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종로5가쯤인가 청계천 인근에 있던 삼화인쇄소에서 제대 후 이곳에서 일을 좀 해달라는<아그레망>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보병학교 입소마저 포기한 채 부모님 곁으로 무작정 돌아 왔던 것이다.

  군복차림으로 싸리문을 들어서는 나를 반겨주신 것은 아버지의 힘없는 웃음이셨다. 도배지가 떨어진 흙벽에 등받이를 하신 채 햇볕을 쪼이시고 계신 아버지가 불편하신 몸을 가까스로 가누시며 힘없는 미소로 나를 맞아 주셨다. 어머니와 유덕이 안부를 묻는 나에게 나무하러 갔다고 하시며 어두워야 올 것이라 말씀 하셨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입대하기 전에 내가 쓰던 앉은뱅이 작은 책상서랍에서 유덕이의 초등학교의 학습일기를 보았다.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할머니가 독 지네에 다리를 물려서 나무를 하다말고 혼자 할머니를 부축하여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큰 고생하셨던 이야기, 할머니가 욕심을 내어 많이 한 나무를 가져오지 못해 산 아래로 굴려서 오거나, 부득이 나누어 두었다가 다음날 가져오는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땔 나무를 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고 하였다. 착한 유덕이가 대견스러웠다. 입학원서접수는 마감되었으나 시험일자는 이삼일이 남아 있었다.

  갈아입을 사복이 변변하지 못해 군복을 입은 채로 모교 은사님을 찾아 갔다. 졸업 후 3년 만에 찾아온 모교가 하동종합고등학교로 바뀌었고 병설중학교가 새로 설립되어 있었다.

  하동중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셨던 정원용은사께서 종고와 병중의 통합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던 것이다. 얼마나 다행하고 반가운 일인지 참으로 기뻤다. 은사님께서 “정직한 용기를 가진 자만이 진정한 사나이임을 명심하라!”는 명제를 나에게 주시며 진실한 용기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학창시절 나의 권투시합을 참관하시고 상장을 주시며 나에게 당부하여주신 말씀이다.

  점잖은 듯 교문을 나서자마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집을 향해 뛰었다. 언제나 분명하시고 위엄 속에서도 다정하셨던 정원용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귓가를 몇 번이고 맴돈다.

“원서마감은 이미 끝났다. 학생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학교장의 재량으로 형식적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고, 그 성적이 10위 이내에 들면 교직원 총회를 거쳐 입학허가를 결정해 볼 수는 있다”고 하셨다. 만약 성적이 낮으면 내년에 입학을 시키고 그동안 부모님께 효도나 잘 하라고 일러 주셨다. 매사는 스스로 하기에 달려있다. 언제나 가능성을 열어주셨던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자식들에게도, 교우관계에도 선생님의 말씀을 생활신조처럼 행동한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입학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를 하기 수일 전 학교로 급히 오라는 은사님의 전갈을 받았다. 방과 후에 혼자 교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은사님께서 반기시며

「힘들지?」 하신다.

「이 사람아, 유덕이가 1등일세!」

「선생님들이 장학생으로 입학을 시키자고 했네!」

「신학기 등록금과 입학금은 면제네」

「학업에 필요한 준비는 힘들더라도 자네가 마련해 보게」 하신다.

   나는 목이 뫼어 감사의 인사말도 못하고 헛기침만 하였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막무가내 흘러 내렸다. 못 본 척 하시는 선생의 눈시울도 붉어 보였다.

선생님께 말없이 고개만 깊이 숙인 인사를 드리고 조용히 돌아서는 나의 등 뒤에서 인재를 보내준 자네가 오히려 고맙다고 하셨던 그 은사님이 한없이 그립다.

  유덕이 입학통지서를 받고 나는 읍내 <동아인쇄소>로 가서 정기일 사장님을 찾아가 군대에서 배운 필경실력이 있으니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일은 차치하더라도 유덕이 입학수속은 제때에 하라고 하시며 필요한 학자금을 선뜻 내어 주시며

「고향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일을 찾아다니는 자네 마음이 훌륭하네!」하셨다.

「필경일이 생기면 자네를 부르겠네.」

 학자금을 구했다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나의 말을 믿고 함께 일을 해보자고 허락해준 사장님의 신뢰였다. 정기일 사장님은 나가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참존 회장 김광석 친구의 빙장님이시다.

  예전에는 등사물을 받지 않았던 동아인쇄소에서 나를 위해 하나 둘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고 그때 마다 자전거를 타고 나에게 일거리를 갖다 주었던 인쇄소 직원이 있었다.

  그가 “김동명”이었고 나의 초등학교 사오년 후배였다. 초등학교졸업 후 취업한 그는 활판과 석판 옵셋인쇄 숙련공이 되어있었다. 그는 내가 필경을 하면서 한자나 영어의 원고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교정하는 것을 보고, 옵셋 원판의 잘못된 글자는 없는지 물어서 한두 번 고쳐준 일이 있었다. 미리 고쳐 인쇄를 하면 주문자도 고마워하고 밤새워 재작업을 하는 일도 줄어서 서로 좋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동명 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형님은 모리는 글자가 없이 어찌 그 뜻을 다 압니꺼?」

「한문도 영어도 전부다 잘 알아서 요새 사장님은 형님 때문에 살맛이 난다 캅디다.」

「왜 거런대?」

「옵셋이나 활판원판을 떠놓고 인쇄에 들어 가지전에 사장님이 직접 교정을 보았기 때문에 항상 자리를 비우지 못했는데, 요새는 형님이 사장님보다 더 잘 알고 영어 때문에 골치 아팠던 일이 다 없어 졌다고 그래요.」

「그 정도는 중학교공부만 하면 다 아는 기다」

「나도 중학공부를 하믄 될까요? 야간 학교가 있으면 좋은디…」

「동명이는 언제 군대에 가노?」

「호적이 좀 늦어 3년 후에요.」

「동명이 너 같은 아들이 읍에 몇 명이나 되것나?」

「주차장에서 구두 닦는 아들, 신문 파는 아들, 읍 변두리서 농사일을 돕는 아들 까지 합치면 한 50명은 훨씬 넘을 깁니더.」

「네가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들 20명 이상만 모이면 내가 야학교를 만들지」

「정말이지예?」

「선생님과 교실은 내가 구하고, 학생은 네가 모아라!」

「좋심니더. 해보겠십니더」

 김동명 군이 내가 등사하여 만들어 준 야학교(향우학원)학생 모집광고를 퇴근 후에 자전거를 타고 읍 내외 곳곳 전봇대에 붙였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일하며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모여라!

라고 쓴 기억이 난다.

  전후 공회당이라 했던 이 건물에 공민학교전신이었던 <동명중학>이 세 개의 교실과 교무실로 나누어 학교로 사용하고 있었다. 학생은 123학년 세 학급으로 전교생 수는 60십 명 내외였다, 중고등학교 선배이신 유한철 씨가 교감으로 계시면서 나를 교사로 추천하여 한 해 후배인 정무옥 여선생과 함께 이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정무옥 선생은 내가 이곳에서 야학(향우학원)을 만들어 중등교육을 무상으로 하겠다고 하자 학교에서 허락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 하였고, 역시나 다른 선생님들은 동명중학교자체의 존폐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모두가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이 학교의 설립목적도 공민학교였으며 본래의 중학 2부 교육을 의무적 사명감으로 재건해야 된다고 줄기차게 설득하였다. 선생님들은 옳은 주장이라 말을 하면서도 생계의 위협을 떨칠 수가 없는 듯하였다. 나는 굶는 한이 있더라도 올바른 교육목적을 달성하여 보람을 찾는 것이 더 값진 것이라고 우겼다. 모두가 묵시적 동의를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장소는 마련했으나 동명중학교 선생님들은 야학지도에 참여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장소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족하다. 처음부터 순순한 사고결핍 자들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이제 봉사자를 초빙하는 일이다. 봉사활동에 일가견이 있는 정찬갑 일 년 선배를 찾았다. 그는 일언지하에 불가능하다고 거절하였다.

  역대로 야학을 만들어 봉사하겠다고 나선 선후배가 수없이 많았고, 그중에 그자신도 포함된다면서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하고 용두사미가 되어 나중에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만 남기는 죄를 수없이 저질렀고 그런 전철을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거절이유였다.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한다. 그것은 교육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고 싶은 사람이 모여서 선생님을 모시는 것은 우리가 응해주지 않을 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때서야 학생이 모인다면 참여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공부하고 싶은 학생을 모이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 가르쳐 주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공명심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요즈음 교육당국과 일부 선생들의 자세를 보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싶도록 교육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공부를 강요하기 때문에 어려워지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잘못은 조금도 반성하지 못하고 제도 탓만 하고 있다.

  50명 정도를 예상했으나 80명에 육박했다. 주간의 동명중학생보다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처음 나와 더불어 한두 사람의 봉사자가 있었으나 김종원, 정무옥, 진용현, 정동석, 오준명, 김홍곤, 윤미자, 이미도자, 조광자, 김인태, 정회경, 이순익 등 많은 선생님이 봉사자원을 하여 첫해부터 3학급이 되었다. 모든 교재와 노트까지 선생님들의 용돈을 털어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동기금을 마련하여 노트와 교재 등 학용품을 준비하였고, 가나한 학우를 서로 도와 가며 결석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 졸업을 하자고 서로위로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어린 학생에서부터 장정에 이르는 나이의 학생들이 성별과 연령별 계층을 뛰어 넘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김동명군의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선생님도 두서넛 있었으나 부끄러워하거나 열등의식을 갖지 않고 오직 제대로 알고 제대로 가르친다는 서로의 신념이 교실 안에 가득 했던 기억이 난다. 첫 졸업생이 탄생할 무렵 정원용 은사님께서 동명중학교와 향우학원을 합쳐 하동중학교 2부로 편입케 주선하여 주셨고, 그 졸업생을 고등학교입학시험에 응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향우학원 개교당시 귀빈으로 참석하신 정원용 은사님의 축하말씀에 향우학원의 학생 여러분이 앞으로 3년의 졸업과정을 충실하게 마치고 졸업을 한다면 고교입학시험에 응시토록 하여 인재를 구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켜 주신 것이다.

  향우학원이 답답한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게 해 주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도 들었고, 심지어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은사라고 찾아준 부산의 정수열 부부도 있었다.

  함께 늙어가는 세월 속에서 선생과 학생을 구별할 수 없는 친구 같은 스승과 제자가 아름답게 늙어가는 서로의 멋진 모습을 보며,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보람을 가진 내가 진정한 교육자라고 스스로 자만하며 미소를 지어본다.